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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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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던 네 사람이 칼링바 외곽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밀러!”
저 멀리서 밀러를 발견한 라일리가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덕분에 그녀와 함께 있는 블레이크와 에이버리를 발견한 그가 서둘러 네 사람에게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개를 꾸벅인 밀러는 블레이크와 에이버리 곁에서 함께 가기 시작했다.
“준비는 어떻게 됐어?”
블레이크의 질문에 밀러는 기사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제1기사단을 제외한 기사단 대부분을 에르텔로 보내 놨습니다. 맥스의 지휘하에 가고 있을 겁니다.”
“아, 그래서 인원이…….”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기사단을 보고 의아해하던 에이버리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적죠? 물론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반대에 대비해 전부 다 끌고 올라오라고 하셨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소규모로 왔습니다. 뭐, 제1기사단만으로도 황궁 정도는 점령 가능하기도 하고요.”
당당한 밀러의 말처럼, 수적 열세 때문에 쉽지는 않아도 점령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최소 인원만 남긴 기사단 전부를 끌고 오라고 한 블레이크의 전언에도, 제1기사단만 데리고 온 밀러였다.
그 인원을 전부 데리고 오는 것보다 일부를 에르텔로 보내 놓는 게 더 효율적이었으니.
게다가 그의 말대로 황제가 반대할 리가 없었다. 라위타를 바친다는데, 제 업적을 가장 위하는 황제가 반대할 리가.
“나머지 기사단은 에르텔에서 루이스 경과 함께 그때 말씀하신 전술을 전달하고 상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비삭과 돈에게도 출정을 명령했으니, 중간에 합류할 겁니다. 전하, 혹시 핀에게는…….”
“핀은 이곳 분위기를 파악하고 우리가 준비한 대로 소문에 대응하기로 했어.”
이미 이런저런 준비를 해 둔 블레이크와 밀러는 각자의 일을 확인하고선 기사단에 합류했다. 밀러와 함께 블레이크 일행이 다가오자, 기사단이 길을 텄다.
“울티모 성문을 지나서 가는 거로 하지. 에이버리와 라일리, 그리고 미아는 그곳에서 헤어질 거야.”
“명 따르겠습니다.”
블레이크와 에이버리가 탄 말이 기사단을 가로지르자 대기하던 기사들이 고개를 꾸벅였다.
뒤이어 밀러, 라일리 그리고 미아까지 따르자 일사불란하게 모인 기사단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  
생각보다 작은 규모였던 데다, 밤을 새워 달려온 덕에 다음 날 새벽녘에 울티모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았기에 잠시 쉬어 가기로 한 그들은 외곽에 있는 한 여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래도 중간에 쉬어 갈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침대에 눕자마자 한 에이버리의 말에 블레이크는 그녀의 금빛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과 라일리 그리고 미아는 어제 새벽까지 쉬었다지만, 밀러와 제1기사단은 이틀 밤을 새운 꼴이었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많이 지친 듯 보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에이버리랑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 덕분에 기사단이 편하게 쉴 수 있게 됐네요.”
물론 길어 봐야 서너 시간 정도겠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이런 휴식도 사치일 테니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졸리지 않아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블레이크를 올려다본 에이버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나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그대를 바라보는 게 더 좋으니까.”
그러곤 에이버리의 볼에 입을 맞춘 그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의 녹안에 에이버리의 얼굴이 담겼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금발, 맑은 하늘보다 더 푸른 눈동자, 잘 익은 라즈베리같이 붉은 입술. 그 모든 걸 하나하나 담던 그에게 에이버리가 천천히 다가갔다.
쪽.
살짝 닿았다 떨어진 붉은 입술이 이내 다시 다가왔다.
쪽. 쪽. 쪽.
“푸흡.”
제 입술과 볼 그리고 목덜미에 번갈아 가며 입을 맞추는 에이버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블레이크는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도 좋지만, 조금 부족한데.”
블레이크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눈가를 찡긋거리자, 몸을 일으킨 에이버리는 그에게 다가갔다.
사락.
촉촉한 입술이 닿자, 그녀의 머리칼이 그의 목덜미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으음.”
아까와는 다른 깊은 입맞춤에, 블레이크는 조금 놀라면서도 기껍게 받아들였다.
“에이버리. 잠깐…….”
갑작스럽게 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손에 당황한 블레이크가 가녀린 팔목을 잡아 저지하자, 에이버리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싫어요?”
싫을 리가 없었다. 어젯밤에도 에이버리를 끌어안고 싶은 걸 꾹 참다 밤까지 지새운 그였다.
얼마 전에 폭주했을 때 그녀에게 남겼던 생채기가 여전히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걸 떠올릴 때마다 자신이 짐승이 된 것 같았다. 혹시 에이버리마저 그렇게 생각할까 봐 자제하는 중이었다.
“그게…….”
자신을 바라보는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오만하게 굴었던 블레이크는 에이버리가 너무 어려웠다.
“당신이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나를 안아 줬으면 좋겠는데.”
말끝을 흐리던 블레이크는 에이버리가 한 말에 곧장 팔을 들어 제 셔츠를 벗었다. 그러곤 에이버리를 들어 침대에 곱게 눕혔다.
“언제든 그만하고 싶으면 말해요.”
쪽.
“나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서.”
쪽. 쪽.
얼굴이 상기된 블레이크의 입술이 볼에서 귓가로, 그리고 목덜미로 닿았을 때, 에이버리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살짝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블레이크의 입술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때,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중간에 멈추지 말고, 끝까지 가요.”
지금껏 단 한 번도 끝까지 간 적 없었다. 이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이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으니.
“…….”
블레이크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에이버리를 내려다봤다. 푸른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다 괜찮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해 줘요.”
다정한 얼굴로 그의 볼을 어루만진 에이버리는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손에 볼을 비비다 이내 붉은 입술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에이버리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 설령 그게 원대한 계획을 세운 그녀의 발목을 잡는 일일지라도.
*** 
몇 시간 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블레이크와 에이버리, 그리고 기사단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밀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블레이크를 바라보던 에이버리는 어째 좀 불공평하단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
몇 시간 동안 격하게 움직인 건 그인데, 왜인지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쌩쌩해 보였으니까.
그에 반해 에이버리는 서 있기도 힘들 만큼 지친 상태였다.
“마차를 불렀으니 금방 올 겁니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파악한 블레이크는 일찌감치 밀러에게 마차를 부르라고 명한 상태였다.
“나도 체력이 부족한 편이 아닌데…….”
에이버리가 말끝을 흐리자, 피식 웃은 블레이크가 그녀의 발간 볼에 입을 맞추곤 귓가에 속삭였다.
“아마 나오기 전에 에이버리가 치유해 준 덕인가 봅니다.”
그의 말대로 출발 전 마지막으로 치유를 해 주긴 했다. 치유 전에도 쌩쌩했던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한 에이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다치지 말고, 조심해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울티모 안이면 어디든 가도 되지만, 그래도 미아 혹은 라일리 함께 다녀요.”
“그렇게 할게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당당하게 말하는 에이버리의 손을 잡으며 블레이크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녀를 두고 떠나려니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
그때, 밀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둘 다 아무 곳에도 못 가겠어요.”
아쉬워하는 블레이크의 손을 놓은 그녀는 머리를 묶고 있던 푸른 천을 잡아끌었다.
휘잉.
갑작스럽게 부는 바람에 금빛 머리칼이 춤을 추듯 휘날렸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요. 울티모에서 기다릴 테니.”
조곤조곤히 말하며 그의 팔에 천을 묶어 준 에이버리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작별 인사가 마무리되자, 에이버리는 울티모로 그리고 블레이크는 에르텔로 향했다.
서로가 왔던 곳에서, 각자의 목적을 이뤄 내기 위해서.
***
에이버리가 탄 마차가 울티모 저택에 도착했을 때, 집사장 아이작과 루시를 포함한 사용인들이 전부 나와 대기를 하고 있었다.
“아…….”
마차에서 나오던 에이버리는 모두를 발견하고선 어색하게 웃었다.
“다들…… 잘 지냈나? 소란을 만들어서 미안하군.”
에이버리가 미안하다는 듯 말하자, 눈물이 맺힌 눈으로 지나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대공비 전하를 믿습니다! 다 헛소문인걸요!”
이번 개국 기념 파티에 함께 가지 않았던 지나는, 소문을 듣자마자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었었다. 대공비께서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 확신했으니까.
“맞아요! 저희는 그런 헛소리 안 믿습니다!”
“맞습니다!”
“두 분이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지나가 먼저 물꼬를 트고 나니, 다들 용기 내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에이버리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며 촉촉해졌다.
“큼. 다들 조용히.”
하녀장 루시가 헛기침하며 명하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용해진 사용인들을 슬쩍 바라본 집사장 아이작이 서둘러 예의를 갖춰 에이버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비 전하, 집으로 잘 돌아오셨습니다.”
“잘 돌아오셨습니다!”
아이작의 말을 따라 한 사용인들도 에이버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눈물이 가득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완연했다.
“다들 고맙네.”
손가락으로 눈물을 살짝 닦아 낸 에이버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다들 알다시피 블레이크가 출정 명령을 받고 라위타로 향했어. 예전엔 그가 전쟁을 나가면 자네들이 영지를 지켜 왔다는 거 잘 알고 있네.”
꼿꼿하게 서서 모두를 응시한 에이버리가 격려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나도 도울 테니, 블레이크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우리 더 열심히 체스터령을 지키세.”
그 말에 모두 감동한 눈으로 에이버리를 바라봤다. 역시 그 모든 소문은 헛소문이었다 다시 한번 확신하면서.
***
한 번도 쉬지 않고 빠른 속도로 달린 덕에 블레이크와 밀러, 그리고 그의 기사단은 출발한 지 이틀째 자정에 에르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졸린 기색 하나 없는 루이스가 그들을 반겼다.
“대공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이스 경.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었네.”
인사 대신 내뱉은 블레이크의 퉁명스러운 말에, 옆에 있던 밀러가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서둘러 오는 게 낫겠다 싶어 속력을 내다보니, 이렇게 한밤중에 오게 되었습니다.”
친절히 설명을 덧붙이는 밀러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은 루이스가 뒤편의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쉬지 않고 달려오신 것 같은데, 일단은 좀 쉬시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나누는 거로 하죠.”
“다들 그렇게 해. 밀러, 너도. 그리고 루이스 경 괜찮으면 단둘이 이야기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