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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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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고 나오니 블레이크가 소파에 앉아 손에 든 액자를 보고 있었다. 에이버리는 그런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뭐 봐요?”
“에이버리요.”
액자 속 에이버리의 초상화를 보여 주며 미소 지은 블레이크가 그림 속 그녀의 볼을 톡 쳤다.
“몇 살 때예요?”
곰곰이 생각하던 에이버리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10살 때였을 거예요. 원래 생일 때마다 푸른 드레스를 입었는데,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걸 보니 그때가 맞을 거예요.”
“말도 못 하게 귀여웠네요. 그런데 왜 이때는 초록 드레스를 입게 된 거예요?”
“그냥…… 그때 동생이 저 옷을 함께 입자고 했었어요.”
에이버리는 자신과 같은 옷을 입겠다, 울며불며 난리를 쳤던 해나를 떠올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력 때문에…… 에이버리를 라위타에게 팔아넘기려 했었다는 그 동생 말이죠?”
고개를 끄덕인 에이버리는 씁쓸히 웃었다.
“맞아요. 제가 많이 아꼈던 동생이었죠.”
하지만 생일에 왕족들이 입는 푸른 드레스를 해나는 입을 수 없었다. 그런 해나를 아낀 나머지 에이버리는 그녀와 같은 드레스를 입었었다.
‘그때 해나의 표정이 어땠더라?’
기억하기론 울음은 멈췄었지만, 그렇다고 웃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나?”
“뭐가요?”
“그냥. 해나가 그렇게 변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싶어서.”
사실 처음엔 복수심에 이 모든 계획을 시작했다. 여전히 복수심으로 계획을 진행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해해 보려고 했던 거 같아요. 너는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기에 너는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 우리가 뭘 했기에, 그런 계획을 세웠을까.”
에이버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이뤄 냈을 때, 어떻게 너는 그렇게 웃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이해하려고 해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걸 어떻게 이해해요?”
“…….”
“에이버리도 에르텔도 잘못한 건 없습니다. 그냥 그 동생이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뿐이죠.”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하는 블레이크에게 에이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런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쓸쓸한 눈으로 웃는 에이버리를 꼭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나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에이버리가 그의 품에서 중얼거리자, 그는 알겠다는 듯 다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
늦은 밤. 잠든 블레이크를 뒤로한 채 침실을 빠져나온 에이버리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아, 왕녀님.”
에이버리가 굳게 닫힌 하얀 문 앞에 다다르자, 그녀를 발견한 기사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이미 루이스 경에게 언질을 들은 덕에 기사는 놀라지 않고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소란 피울 것 없네. 그냥 문만 열어 주게. 전하를 뵈러 온 거니.”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기사가 서둘러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에이버리는 푸른 빛이 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후…….”
낮은 한숨과 함께 잠시 멈춰 섰던 에이버리는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뚜벅. 뚜벅.
점점 침대가 가까워졌고, 그 위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에이버리의 눈동자 안에 들어왔다.
“아버지…….”
수많은 시간을 걸쳐 침대에 불어 넣은 신비한 힘 덕에, 여전히 살아생전의 모습으로 보존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자마자, 그녀의 눈에선 툭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읍, 흑.”
해나는 아버지도, 그리고 에르텔 군인들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였다. 이유가 뭐가 됐든,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 마음 약해져선 안 돼. 그렇죠, 아버지?”
차가워진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에이버리는 어깨에 내려앉는 묵직한 현실감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텅 빈 방 안에 가득 찼다.
문밖에 우뚝 서 있던 블레이크는 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을 멀리 보내 버렸다.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갑자기 사라진 에이버리를 찾다 여기까지 오게 된 그가 문을 지켰다. 얼마가 됐든, 그녀가 맘껏 울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이 돼서야 방으로 돌아온 에이버리는 침대에 자는 블레이크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블레이크는 이미 옷을 차려입고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블레이크?”
“잘 잤어요? 루이스 경이 함께 식사하자고 하던데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이버리가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
“이런 장소로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안 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메인 다이닝 룸이 아닌, 작은 다이닝 룸에 그들을 초대한 루이스 경은 면목 없어 보였다.
“아주 훌륭하네.”
잘 구워진 고기를 본 블레이크의 짧은 감탄에, 에이버리는 웃음을 애써 삼켰다.
“잘 지냈나요, 루이스 경?”
루이스는 에이버리의 질문에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 저희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보내주신 물품들 덕에 새롭게 뽑은 기사들도 수월하게 훈련할 수 있었고요.”
“중간중간……?”
에이버리가 말끝을 흐리며 블레이크를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낀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아무래도 에르텔과 교류가 많다 보니, 보내는 짐도 많아졌네요.”
“아……. 그게 대공께서 보내신 겁니까?”
루이스 경이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블레이크, 그런 얘기는 안 했잖아요?”
“그래도 이번 선물들은 다 에이버리가 준비했잖아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공께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왕녀님께서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감사 인사는 됐어. 그때 왕관을 보내준 값을 치른 거니까.”
“왕녀님 것이니 보내 드린 거지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루이스 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자, 블레이크도 고개를 까딱였다.
“아, 그리고 이따 오후부터 거행될 장례식에 자리를 마련해 뒀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장례식이 끝나면 바로 가실 생각인 거죠?”
그의 질문에 에이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벌려놓은 일들이 있으니 빠르게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밀러에게 맡기고 온 일도 조금 맘에 걸렸고.
“아니, 조금 더 있다가 갈까 하는데. 난 에르텔에 좀 더 있다 가고 싶어요, 에이버리.”
블레이크의 말에 에이버리가 놀란 듯 그를 바라봤다.
“에이버리가 아까 말하던 그 동네도 돌아다녀 보고 싶고, 마을도 구경하고 싶은데. 안 될까요?”
“어…… 그러면 조금만 더 있다 가는 거로 해요.”
에이버리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거로 알겠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잠시 둘이 이야기를 나눴으면 싶은데요, 왕녀님.”
“그럼 나는 그동안 기사단을 보고 올게요, 에이버리.”
식사를 마치자마자 방을 나선 블레이크는 배정된 시종을 따라 기사단으로 향했다. 둘만 남은 식당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정확한 주어도 없는 질문에 잠시 씁쓸히 웃던 에이버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바덴으로 가고 나서 일이 꽤 많았어요, 루이스 경. 그리고 어쩌다 보니 나도 그 사람도 서로를 같은 감정으로 보게 되었고요.”
“왕녀님,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냐 묻고 싶은 거죠? 왜 그런 결정을 했냐 묻고 싶을 거고요.”
꾹.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분명 그 눈웃음으로 순진한 왕녀님을 홀렸으리라. 얼굴만 반지르르한 체스터 대공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은 그였다.
여자가 많다고 소문이 파다한 대공이다. 게다가 왕녀님 전에 4명의 부인까지 있었고. 
루이스는 에이버리를 미아와 함께 키우다 보니 어느새 마치 딸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화가 났다. 물론 대놓고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미아가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나는 우리 두 사람이 한 결정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루이스 경도 걱정하지 않았으면 해요.”
곧고 푸른 눈동자, 그리고 이미 모든 걸 결정한 듯 단호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대공을 향한 분노는 어느새 사라지고, 왕녀님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만 남았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길을 가고 있고 끝이 어떨지 잘 알고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동안 마음만은 흘러가는 대로 두기로 한 겁니다.”
“……후에 왕녀님께서 아프실까 봐 그럽니다.”
“분명 이별이 오면 아프겠죠. 그걸 각오할 만큼, 내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합니다.”
에이버리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게 왕녀님을 더 아프게 할 텐데…….’
쌍방은 아니었지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 루이스였다. 그 때문에 이 나이까지 혼자 지낸 그는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두 사람의 끝이 자신처럼 외롭지 않길 바랄 뿐.
***
체스터 기사단을 보고 돌아온 블레이크와 에이버리는 자리를 옮겨 장례식이 진행될 대관 2층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장례식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지만, 출입을 막아 놓은 덕에 아무도 없는 2층. 그곳에 두 사람을 위한 편안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1층을 내려다보던 에이버리가 자리에 앉아 말없이 두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부디 제 아버지의 기나긴 여정을 함께해 주시고…….”
들릴 듯 말듯 조용히 기도문을 읊는 에이버리를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그녀처럼 두 손을 모으고선 정면을 바라봤다.
그의 빛나는 녹안에 신상(神像)이 보이자, 그가 낮고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비록 나는 그날 이후로 신을 믿지 않습니다만, 에이버리를 내게 보내준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에이버리를 흘깃 바라봤다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당신이 진짜로 존재하신다면, 우리 두 사람의 복수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에이버리가 다치지 않아야 합니다.’
눈을 감은 그는 온 마음 담아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부디…… 에이버리가 기도하는 모든 게 이뤄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우웅.
갑자기 온 몸에 퍼지는 따뜻한 기운에 블레이크가 눈을 서서히 떴다. 신상(神像) 주변으로 푸른빛이 보였다. 
‘뭐지?’
블레이크는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어느새 그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웅성웅성.
홀을 울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기도를 끝낸 에이버리가 앞에 있는 커튼을 반쯤 내렸다. 이렇게 해놓으면 단상에 사람이 올라가도, 아래에서는 2층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을 테니.
긴장한 탓인지 떨리는 에이버리의 손을 꾹 잡은 블레이크가 정자세로 아래를 바라봤다.
에이버리의 아버지, 에르텔 왕이었던 게일 유클라의 장례는 블레이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다.
생전에 왕이 좋아했던 산뜻한 왈츠 음악이 식 내내 흘렀다. 슬픔을 애써 숨긴 측근들이 그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모두를 추억에 잠기게 했다. 
“전하께서 저와 첫 대련을 하시곤 말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네는 마치 글씨를 쓰는 나 같군’이라고요. 다들 전하의 글씨체를 기억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