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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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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출발한 에이버리 일행은 이틀 후 어둑한 밤이 되어서 수도 칼링바에 있는 체스터 저택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쉰 데다 최대한 천천히 왔기에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를 이틀에 걸쳐 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칼링바까지 함께 온 지나의 손길과 미아의 보조로 에이버리가 점점 화려하게 변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색 에이 라인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에이버리의 목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흑진주 목걸이가 걸렸다. 지나는 목걸이와 세트인 커다란 흑진주 귀걸이를 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옷이 화려해서 악세사리는 조금 단정한 거로 하겠습니다.”
“머리도 올려서 간단히 장식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팔찌는 따로 가져온게 있어.”
에이버리가 뒤에 있던 미아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다가와 팔찌를 건넸다.
“못 보던 거네요?”
검은색 보석이 박힌 은팔찌를 받아 든 지나는, 에이버리의 하얀 팔목에 조심스럽게 걸었다. 
“아, 얼마 전에 받은 거라.”
에이버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던 지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대공 전하께서 안목이 있으시네요. 오늘 옷이랑 잘 어울립니다.”
블레이크를 칭찬하는 지나의 말에, 에이버리는 대답없이 미소 지을 뿐이었다.
똑똑.
“대공비 전하!”
침묵을 깨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기대하지 않았던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라일리? 여긴 어쩐 일이야?”
“대공비 전하께서 수도에 오셨단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죠.”
“영지 일은 마무리가 된 거야? 수도에 와 있을 줄은 몰랐네.”
“아, 그게…… 잠시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라일리가 조금 심각해진 표정으로 시녀들을 흘긋거렸다.
“미안한데, 다들 잠시 나가 있어 줄래?”
미아와 지나를 포함한 시녀 전원이 방에서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라일리의 입이 열렸다.
“로딜핀 후작이 접근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빠른데.’라고 중얼거리는 에이버리를 보며 라일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라니요. 저번에 선물로 나눠 준 사이더 덕에 수도는 난리 났습니다. 크게 유행하고 있어서, 납품을 맞추는 것도 힘들 정도입니다.”
“반응이 그렇게 빠르게 왔다고?”
사이더, 사과로 만든 술은 에르텔에서는 아주 흔한 술이었다. 재료를 구하기 쉬운 데다 짧은 숙성 기간 덕에 금방 만들 수 있었으니까. 가문마다 만드는 방식도 다 달랐는데, 당연히 왕궁식 제조법도 있었다. 가끔 재미로 주방 일을 돕던 에이버리나 해나는 그 방식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해나는 알고 있는 방식으로 사이더를 만들어 바덴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겼었다. 물론 얼마 뒤 이어지는 와인 판매 혁명 탓에 유행은 금방 사그라들지만.
‘이게 잘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
그러나 유행하는 속도가 에이버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가격이 비싼 와인에 비하면 저렴하지만, 와인을 먹는 기분을 낼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평민들이 주로 가는 술집에서도 팔리고 있습니다.”
“굉장하네.”
“아무래도 두 분 전하의 결혼식에 귀족들을 초대한 덕인 것 같습니다. 그때 선물로 사이더를 나눠 주면서 전국적으로 홍보한 셈이니까요.”
신이 난 듯 라일리는 말을 이었다.
“사이더 맛이 훌륭한 게 한몫하긴 했습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을 로딜핀 후작에게 넘겨야 하는데. 게다가 이렇게나 잘 팔리는걸요.”
“이 인기가 금방 사그라질 거야.”
저도 모르게 확신하듯 말해 버린 에이버리 덕에 라일리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지금이야 신선한 맛과 저렴함에 끌리겠지만, 결국 다양한 향과 맛을 내는 와인으로 취향이 돌아갈 거라 생각해.”
그럴듯한 이유를 말하고 나니, 그제야 라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때 이야기했던 대로 잘 진행해 줘. 쉽진 않을 거야.”
“네. 그러면 그렇게 진행해 보겠습니다. 오늘 황후 폐하의 살롱에 초대받으셨죠?”
“혹시 라일리도 초대받은 건가?”
“네. 나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에요. 제가 황후 폐하의 살롱에 초대받다니.”
라일리는 인생 처음 받아 본 황후의 초대장을 꺼내며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 그랬었나?”
에이버리의 질문에 라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다른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치르고 사교계를 누비는 동안, 저는 용병으로서 돌아다니다가 백작위를 물려받았으니까요.”
그건 순전히 라일리 본인의 선택이었다. 치마보다는 바지가, 부채보다는 칼이 더 좋았던 그녀였으니. 그 선택에 여전히 후회는 없었지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건 있었다.
“로딜핀 후작의 입김이 세긴 센가 봐요. 덕분에 좋은 경험해 보겠네요.”
빙긋 웃는 라일리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
“황후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의 화려한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폐하.”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꾸민 황후가 다정스레 황제를 부르며 다가왔다.
“카르멘, 오늘도 그대는 무척이나 아름답네.”
목덜미가 깊게 파여 가슴이 도드라지는 황금빛 롱 슬립 드레스는 그녀의 금안처럼 눈이 부실 만큼 빛났다. 황제, 사무엘의 찬사에 붉은 입꼬리를 요염하게 올린 카르멘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의 사랑 사무엘. 당신도 늘 그렇듯 멋져요.”
황제의 다리 위에 살짝 걸터앉은 카르멘이 그의 귓가에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쇄골 부근을 손가락으로 훑던 사무엘이 욕정 가득해진 얼굴로 물었다.
“우리 황후께서 한 30분 정도 여유가 있으시려나?”
“제 시간은 전부 폐하의 겁니다.”
입꼬리를 살랑이는 카르멘의 대답에 황제는 거친 숨을 쉬며 그녀를 책상 위로 눕혔다.
“그래서 체스터 대공비가 혼자 칼링바에 왔다지?”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카르멘은 황제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폐하 덕분에요.”
“아직 신혼인 블레이크를 마물 숲으로 보낸 것 때문에 말이 많았어.”
블레이크 체스터는 황족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슨 명령이든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고위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었으니까. 황제에게 더없이 유리한 신의 조약이 있다지만 그 역시 그 조약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 그에게 토벌을 명령한 건, 순전히 황후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가, 에이버리 혼자 이곳에 오길 원했으니까.
“이번엔 그대가 원하는 걸 얻어야 할 텐데.”
무심하게 던진 그의 말에 카르멘이 붉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늘 고마워요.”
애써 웃어 보인 그녀는 옷매무새를 만지던 걸 마무리하고선, 다시 화려해진 모습으로 그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곧 티타임이 시작할 테니. 폐하께서도 오늘 하루 잘 보내시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낸 황후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대가 원하는 것?’
구깃.
드레스 자락을 힘주어 잡은 황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앞에 보이는 꽃병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꽃병이 깨졌다.
“내 아들이 아니라, 우리 아들인데…….”
늘 아픈 손가락인 황태자를 떠올리던 황후의 눈가가 점점 촉촉해져 갔다.
황제가 처음부터 저렇게 무관심했던 건 아니었다. 황태자가 어렸을 때에는 그도 걱정하며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었다. 그럼에도 병세가 차도가 보일 생각을 안 하자 황제는 지쳐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황태자에게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보이면 ‘살아는 있나 보네.’ 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전히 황후인 카르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불법으로 운영하는 사창가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래서 카르멘은 그에게 늘 아쉬운 소리를 하며 제 아들을 지켜 왔다.
“적어도 사무엘은 나를 사랑해.”
그리고 황후에게는 자신의 아들이 제 인생의 전부였다. 그러니 황제가 그녀를 사랑하는 한, 황태자는 안전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결연한 표정의 황후가 눈에 고였던 눈물을 닦아 냈다.
오늘 에르텔의 왕녀에게 성력이 있다는 걸 확인한다면, 무슨 짓을 써서라도 그녀를 시켜 황태자를 낫게 만들 생각이었다. 납치해 감옥에 가두든, 로딜핀 후작령에 몰래 만들어 둔 노예 거래소에 숨기든 말이다.
“내가 너를 위해 못 할 게 뭐가 있겠니?”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황후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
“아까 실랑이 좀 했다고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걸까요?”
에이버리와 함께 시종의 뒤를 따르던 라일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 곧 온실 문이 나올 거야.”
에이버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속삭이자, 곧 그녀의 말대로 문이 보였다.
저번에 왔던 황후의 자랑, 장미 정원. 그곳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담소를 나누던 귀부인들의 시선이 라일리에게 꽂혔다.
“체스터 대공비, 그리고…… 이노베 백작.”
황후가 화사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반기자, 시종들이 각각의 자리로 에이버리와 라일리를 안내했다. 저번에 봤던 사람들에, 동일한 자리 배치. 황후의 바로 오른쪽에는 에이버리가,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로딜핀 후작 부인이 앉았다. 저번에는 없었던 한 사람, 라일리는 후작 부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 배치가 파격적인데.’
로딜핀 후작이 사이더 판매 루트와 공정 비법을 얻으려고 안달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로딜핀 후작 부인과는 다르게 다른 귀족 부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서 유일하게 기사복을 입은 데다 칼까지 차고 있었으니까. 저 칼 탓에 입구에서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럼에도 칼을 차고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분명 후작의 입김 때문이었으리라.
“다들 이렇게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비어 있던 테이블 위로 다과와 티가 깔리자, 황후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한 사람 한 사람 응시했다.
“내가 대공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축하를 해 주고자 불렀어.”
‘축하할 거였음 블레이크도 함께 불렀겠지.’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황후의 거짓말에 에이버리는 속마음을 숨긴 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공교롭게도 대공이 마물 토벌을 하느라, 우리 대공비만 와야 했지만. 섭섭해서 어째?”
“바덴의 칼날인 블레이크가 제국을 위해 사명을 다하러 갔는데, 제가 어찌 섭섭해할 수 있나요?”
입에 발린 위로엔 생색이 답이었다.
“물론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아직 바라봐도 보고 싶은 신혼인지라…….”
은근한 남 탓과 애정 과시는 덤이었다.
스콘에 곁들여진 라즈베리 잼처럼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말하는 에이버리를 많은 귀부인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소곤거렸다. 그리고 남의 연애가 가장 재밌는 라일리는 마치 자기 일처럼 얼굴을 붉혔다.
“이노베 백작은 아직 혼처가 없던가?”
라일리에게 시선을 돌린 황후가 묻자, 흠칫 놀란 그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 네. 전 없습니다.”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지?”
“스물넷입니다.”
라일리의 대답에 소란스럽던 실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바덴의 기준으로는 이미 결혼하고 애가 하나나 둘은 있어야 할 나이였으니. 그런데도 정해진 혼처마저 없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다는 거였다.
“아아…….”
황후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말끝을 흐리자, 침묵만이 흘렀다.
“아, 그렇지. 로딜핀 부인이 좋은 혼처를 찾아 주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