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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2장. 빙의자야, 헛된 꿈을 꾸었구나.
3장. 돌과 악역은 구른다.
4장. 구른 돌은 매끈해지고, 악역은?
2장. 빙의자야, 헛된 꿈을 꾸었구나.
“……나간다고? 왜?”
순간 에단의 목소리가 변한 듯 들렸다. 야, 끝까지 들어. 내가 설마 무덤을 파놓고 말을 끝내겠니?
“그야, 결혼해야 하니까.”
에단은 조용해졌다. 아마 당황한 것 같았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 순진한(?) 에단 크로포트. 크로포트를 떠나는 방법이 어디 도주뿐인 줄 아느냐.
물론 난 도주할 거지만.
“결혼해서 누군가의 부인이 되면 더는 여기서 지낼 수 없잖아.”
“……그렇지만, 엘리. 넌 혼인하고 나면 왕성에 가게 될 텐데.”
왕성도 여기만큼 안전할 거라는 말인가. 나는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그래도 거긴 오라버니가 없잖아.”
“…….”
“……대신 전하께서 계시긴 하겠지만, 난 전하보다 오라버니가 날 더 아끼고 사랑한다고 생각해.”
나 점점 무슨 소리 하는 거지? 미리 준비한 답이라고 해서 꼭 조리 있게 술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그래도 어쨌든, 뜻은 전해졌겠지.
침묵하는 에단을 살피면서 답을 정리하는 말을 꺼냈다.
“아무튼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니까…… 나도 여차할 때 내 한 몸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어.”
“넌 무사할 거야, 엘리. 왕성에 가서도.”
“응.”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간단히 응수하고 입을 다물자 대화가 끝났다.
음…… 이제 슬슬 다시 일어나서 훈련해야 하나?
그런데 그때, 연병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소란을 따라 무의식중에 시선을 돌리자, 에단이 손 그늘을 치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소란이 발생한 장소를 자세히 응시했다.
‘킬리드?’
킬리드가 연병장에 나타났구나. 그리고…… 그게 다인 것 같은데?
왜 소란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킬리드는 원래 연병장에 자주 출현했다.
에단과 검술 수업을 시작한 뒤로도 몇 번 마주쳤었지. 킬리드는 기초체력 훈련으로 죽어 가는 나를 한 번씩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곤 했다.
……어쩌면 구경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하긴, 신기했겠지. 뒤집기부터 익히는 모습이.
그나저나 정말 왜 소란스러워진 거지?
연병장 한쪽에 서 있는 킬리드는 눈에 띄었다. 그러나 쟤는 항상 눈에 띈다.
킬리드를 자세히 살폈지만 평소와 다른 점을 찾지 못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을 때, 에단의 말소리가 들렸다.
“대련하는구나.”
“……대련?”
“킬리드가 저 검을 드는 건 대련할 때뿐이거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킬리드가 손에 쥔 검에 시선을 주었다.
……정말이네. 이제야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았다. 늘 날이 볕을 반사하는 검을 다루던 킬리드는 지금 웬일로 투박한 나무 검을 들고 있었다.
“킬리드가 대련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닌데…….”
그런 것 같다. 나는 소란을 일으키는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제 보니 깜짝 이벤트를 만난 시민이 따로 없다.
“가까이 가서 볼래?”
문득 떨어진 제안에 에단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단은 여상한 얼굴로 설명했다.
“좋은 구경일 거야. 안목을 키울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문장을 말하는 목소리가 왜 점점 작아집니까, 티처 에단?
말하고 나니 헛소리인 것 같습니까? 하긴, 동의한다. 겨우 느리게 몸을 뒤집고 있는 사람이 남이 쌩쌩 나는 걸 구경해서 뭘 얻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궁금하긴 하다. 확실히 ‘좋은 구경’은 될 것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내 에단과 나란히 장소를 옮겼다. 어디쯤에서 대련을 구경할까 하는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병장에는 이미 구경꾼이 모인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와 에단이 자리에 접근하자 앉아 있던 기사들이 너도나도 시선을 주었다.
“에단 도련님! 아가씨까지…….”
“두 분도 대련을 지켜보시려고요?”
“하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죠.”
“여기 앉으십시오, 아가씨.”
한 기사가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에 손수건을 깔고 비켜 주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손수건 위에 앉았다.
그러고 나자 옆자리에 있던 기사가 내게 주전부리가 담긴 바구니를 쓱 내밀었다.
“드시겠습니까?”
“…….”
나는 말없이 설탕 과자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달다.
근데 기사라면 간식으로 단백질을 즐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른 기사가 내 쪽으로 육포가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이것도 드십시오.”
“…….”
묵묵히 육포 조각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엄청 본격적이네.’
일단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거기다 간식거리까지…….
그런데 간식거리는 대체 언제 준비한 거지? 사실 이 이벤트, 깜짝 이벤트가 아니라 정기 이벤트인가?
그런 생각을 막 떠올렸을 때, 전방에서 함성이 들렸다.
‘이제 시작하나 보네.’
입에 든 육포를 씹으면서 정면을 응시했다. 어느 기사가 킬리드와 적당히 거리를 띄우고 마주 서 있었다.
“루델! 힘내라!”
“네 노력을 보여 줘!”
“이번에는 옷자락 한 번 스쳐 보자!”
“그냥 뭐라도 해 보자!”
“할 수 있다!”
……응원인가?
루델이라는 기사와 사이가 안 좋은 기사들이 마침 자리에 모여있는 걸까.
그때, 주변 함성을 무시하고 꿋꿋이 킬리드만 응시하던 루델이 입을 열었다.
“지도 부탁드립니다.”
“그래.”
단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델은 킬리드에게 달려들었다. 루델이 머리 위로 높게 든 검이 빛을 반사했다. 잠깐, 진짜 검이잖아?
장비 차이에 당황한 틈에 킬리드가 루델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야압!”
루델의 검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킬리드를 노렸다.
날이 벼려진 검이 킬리드의 몸으로 서슴없이 돌진할 때마다 내가 다 심장이 조여들었는데, 정작 킬리드는 행동이든 표정이든 침착했다.
“옆구리가 비었다.”
“억!”
“여긴 균형이 안 맞고.”
“큭!”
킬리드는 루델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목검으로 이따금 루델의 몸 이곳저곳을 툭툭 쳤다.
물론 내가 보기에나 ‘툭툭’인 듯, 루델은 몸 한 군데를 얻어맞을 때마다 휘청거리거나 비명을 뱉었다.
대련은 내 예상보다 길어졌다. 루델은 잔뜩 지친 기색으로 어느 순간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댔다.
“……그만하겠습니다.”
“고생했다.”
나는 이내 비틀비틀 대련 무대에서 사라지는 루델의 뒷모습을 좇았다. 
응원인지 야유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날렸던 이들이 친밀하게 루델을 맞아 주는 모습이 보였다. 응원이었구나.
“생각하셨던 거랑 좀 다르죠?”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익숙한 건 아닌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내게 설탕 과자를 줬던 기사의 얼굴이 보였다. 아, 너구나.
“……미안한데, 경 이름이 뭔가요?”
슈가 스낵 경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슈가스 넥입니다.”
음?
“대련 말입니다. 기대하셨던 것보다는 재미없으시죠?”
“왜요?”
슈가스 넥이 내 감상을 그렇게 짐작한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다. 슈가스는 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답했다.
“제가 처음에 그랬거든요.”
“…….”
“좀 더 화려한 대련을 기대했었습니다. 슈슈슉 하고 챙! 하는.”
……아하, 무슨 말인지 대략 알겠다.
“근데 그런 장면은 앞으로도 안 나올 겁니다.”
“킬리드가 대련 상대의 검을 단숨에 날려 버리는 그런 장면이요?”
“아, 예. 바로 그겁니다.”
“이해했어요. 대련보다는 수업 같긴 하네요.”
확실히 내가 예전에 다른 소설에서 봤던 ‘대련’은 다음 같은 방식이었지.
대련 상대가 강자에게 달려든다. ‘챙!’ 강자가 1초 만에 상대의 검을 날려 버린다. 이내 강자가 말한다. ‘다음.’
‘그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만 이 대련도 꽤 재미있는데? 나는 사람이 걷는 사람을 가르치는 모습. 흥미진진하다.
그때 조금 전처럼 또 함성이 들렸다.
정면을 보기 전에 추측했다. 두 번째 대련 상대가 결정됐구나.
“슈가스 넥 경.”
“네?”
“바구니 어디 있어요?”
“아, 여기 있습니다.”
바삭한 설탕 과자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두 번째 대련을 구경했다.
두 번째 대련도 첫 번째 대련과 비슷했다.
그나마 다른 점을 찾자면, 두 번째 대련 상대가 첫 번째 대련 상대보다 오래 버텼다는 것 정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두 번째 대련 상대-닉이라는 기사였다-가 물러나고, 바로 세 번째 대련 상대가 그 자리를 채워 킬리드와 마주 보고 섰다.
“비스트! 옷자락 스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 제일 오래 버텨!”
“근성을 보여 줘!”
비스트? 사람 이름이 짐승이라고?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비스트라는 기사의 이름이 왜 비스트인지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