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7장
8장
9장
에필로그
7장
“그럼 내일 보자, 밀리.”
“들어가세요, 앤.”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앤의 뒷모습을 보던 밀리의 시선은 스르르 이동해 데빌레르 가문의 문양이 찍힌 기사들 사이, 홀로 서 있는 근위병을 스쳤다. 새삼 무도회 이전에 보았던 근위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데빌레르가 타운 하우스 앞을 마치 황궁처럼 살벌하고 근엄하게 지키던 그들이 황후의 뒷배로 그곳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견제로 감시당하고 있었다니. 생각할수록 레녹스 2세는 무섭고도 징그러운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저 근위병한테 관심 있어?”
밀리가 근위병에게 한참이나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옆에 있던 게라인트도 무섭고도 징그러운 농담을 던졌다. 밀리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네? 아니요!”
“아닌 거면 관심도 없는 놈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마라. 남자라는 짐승은 대체로 다 멍청해서 주제넘는 착각을 잘하거든.”
“그러는 게라인트 경도 남자 아니에요?”
“대체로 멍청하댔지 다 그렇다곤 안 했어. 난 주제 파악을 잘하는 신사니까.”
게라인트가 낄낄거렸다. 밀리는 그런 그를 흘겨보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에인스워스 가문의 타운 하우스로 향했다.
“후작님이 편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베르디치 후작이 에스델 황녀와 연락이 닿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앤에게 우연히 들은 것이 바로 어제.
게라인트와 밀리는 돌아가자마자 곧장 이 사실을 로엔그린에게 전달했다. 그 자리에서 로엔그린은 현재 저택의 임시 책임자이자 앨버 대공의 대리인으로서 베르디치 후작에게 대공의 근황을 공유해 줄 수 있을지 묻는 서신을 준비했고, 그것을 오늘 막 밀리가 앤을 통해 은밀히 전달한 참이었다.
현재로서는 아도니스의 생사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경로인만큼 후작이 거절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게라인트는 큰 걱정이 되지 않는 듯 시종일관 느긋한 모습이었다.
“너무 걱정 마라. 그래 보여도 글깨나 쓰는 로엔그린 경이 대필했으니까.”
“로엔그린 경…….”
갑자기 불안은 어딜 가고 한숨만이 나왔다. 잘 쓰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일은 맞지만, 대필이라니. 밀리는 한숨과 함께 저택의 정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글빨이 착취된 로엔그린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네야겠다고 생각하며.
* * *
“어디 가십니까.”
막사를 나서려는 아도니스의 앞을 황실 기사가 가로막았다.
“잠깐 바람 좀 쐴 거다.”
짧게 말한 아도니스가 기사를 지나쳐 나가려 했지만 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안전을 위해 특별한 용무가 아닌 이상 외출을 삼가실 수 있게 살피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아도니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전은 핑계일 뿐, 사실상 연금이나 다름없다.
‘늙은이가 아주 작정을 했군.’
이 연금의 시작은 며칠 전, 아도니스가 대기 중인 위치에서 이탈해 몰래 황제 측 연락병을 미행한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방과 후방의 연락 체계가 어딘가 이상하군요.
전후방의 연락 체계는 상호 간의 상황을 모두 공유해서 교환하는 형식이 일반적이나, 이상하게도 레녹스 2세는 아도니스와 에스델이 있는 후방 측에서 일방적으로 상황을 보고하기를 요구했다.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상황 공유는 없었다.
―확인했고 전진 중이라는 뻔한 답만 받았어. 뭘 알려 줄 생각이 없으신가 봐, 나의 아버지는.
연락병끼리도 성배의 영향으로 인한 날씨 핑계를 대며 중간 지점에서만 소식을 나누는지라 정작 황제가 있는 전방까지 가 본 이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황제 쪽이 알려 주지 않는 이상 그들이 어디까지 진군했는지도, 현재 뭘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알려 주지 않으시면 방법은 하나군요. 따라가 보는 수밖에는.
―방해는 하지 않겠지만 돕지도 않을 거야.
―제가 결혼 제안에 답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 한패가 아니어야 나중에 그대 잘못을 내가 수습해 줄 수 있으니까.
―제가 들킬 거라 확신하시는군요.
―보험이지.
에스델의 말이 옳았다. 황제 측 연락병을 미행해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치유의 잔이 몰고 다니는 악천후는 아도니스의 은신을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들켰다.
덕분에 그는 현재 자신의 막사로 돌려보내져 사실상 연금된 상태다. 싸늘한 얼굴로 그는 자신을 가로막은 기사를 노려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명령이다, 비켜.”
“죄송합니다, 저는 황명으로 움직이는 터라 동의 없이 외출하실 경우 전하를 제압해야 합니다.”
난처한 얼굴의 기사는 최대한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며 막사 바깥에 도열한 병사들을 가리켰다.
“저뿐 아니라 병사들 전체가 같은 명을 하달받았기에 여러 사람이 동원되면 일대 다수가 되어 다치실 수 있습니다.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빌어먹을.“
분노에 차 기사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아도니스의 눈빛을 마주했다. 기사의 말이 맞았다. 아도니스의 무예가 출중한 편이라 해도 비무장인 그를 제압하기 위해 수십의 병사들이 달려들면 감당할 수 없었다. 어차피 제압당할 게 뻔하다면 상호 체력적 낭비는 하지 않는 게 백번 나았다.
‘알아낸 걸 전달해야 하는데 황녀를 만나지도 못하고 막사로 바로 끌려오다니.’
우선 겉으로나마 깔끔하게 상황을 수용한 그는 자신의 침대로 가 털썩 걸터앉았다. 대공이 의지를 꺾은 듯하자 그를 막아서던 기사의 얼굴에 안도감이 퍼졌다. 그제야 아도니스는 그의 얼굴이 낯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름이 패트릭이라고 했던가.’
어쩐지 기사들은 대부분 기사단장을 따라 새벽에 황제의 진군에 동행했는데 남아 있는 자가 있다 했더니, 부상으로 며칠 누워 있던 것을 고려해 남겨 둔 모양이었다. 일전에 아도니스가 성배를 이용해 그의 큰 부상을 한 번에 고쳐 주었던 일로 호의가 생겼는지, 입구를 막아서고는 있지만 묘하게 그의 편의를 봐주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사람을 데려오지 못한 이 상황에선 이런 작은 호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아도니스는 부러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패트릭 경이라고 했던가.”
“예! 전하.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군요.”
패트릭은 신이 난 강아지처럼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쏜살같이 아도니스에게 달려왔다. 제대로 먹혔군. 아도니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내가 나가는 게 안 된다면, 다른 사람을 부르거나 물건을 전달할 순 있나?”
“예, 아마 될 겁니다. 다만 황녀 전하께서 확인을 거치실 수 있다는 점은 양해해 주셔야 할 듯합니다.”
아도니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가. 그럼 번거로울 것 없이 황녀 전하께 직접 물어보겠다. 가서 여쭤라.”
“예!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패트릭이 막사를 지키는 병사를 시켜 황녀에게로 보냈다. 황녀는 그와 동맹이나 마찬가지니 분명 올 것이다. 아도니스는 침착하게 분노로 끓어올랐던 기분을 가라앉히며 황녀, 그리고 제도의 로엔그린에게 전달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황제의 연락병을 미행하러 갔다가 파악한 모든 것들을.
* * *
“그럼, 읽어 볼까요?”
“예.”
유젠이 묻고 로엔그린이 답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밀리는 그냥 마른침만 삼켰다.
현재 그녀는 로엔그린과 함께 데빌레르 가문 타운 하우스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저택 출입을 감시하는 황제의 근위병이 한 명으로 줄어든 틈을 타 황후 궁에 인장이 달린 마차와 황후 궁 제복을 요청한 덕에 별도의 검문은 피할 수 있었다.
유젠 데빌레르는 오늘 막 자신의 앞으로 도착한 편지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유즈.
최근에 편지를 많이 못 한 것에 대해 일단 가볍게 사과할게. 날씨가 영 뭐 같아서 잉크가 자꾸 번지는 바람에 쓰느라 애먹었거든. 이해하도록. 치유의 성배라는 게 확실히 대단한 성유물이긴 한가 봐, 날씨도 영향을 받고……. 다행히 현재는 날씨 상태가 좀 나아진 덕분에 편지를 쓸 수 있게 됐어.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나 나나 지독한 평화주의자잖아. 언제나 목표는 원만하게 해결 볼 수 있도록 다 같이 힘내는 거야. 그러니 반란 건도 그렇고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사실 고향에 오래 못 돌아가고 있는 네가 더 걱정이야.
돌아가면 같이 레몬 파이라도 먹자. 여기 식사가 영 별로라 지금은 신 게 당기니까, 엄청 신 걸로.
에스델.]
두 장짜리 편지는 신변잡기적인 내용과 간단한 안부 인사가 대부분이라, 읽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엔그린은 애써 노력했지만 실망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별다른 내용은 없군요. 대공 전하에 대한 내용도요.”
“아뇨, 마냥 그런 것도 아닙니다. 레몬 파이를 먹자고 했으니까요.”
“레몬 파이…… 말씀입니까?”
레몬 파이와 대공의 소식이 무슨 상관이냐며 로엔그린이 묻는 사이, 유젠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촛대에 손을 뻗었다. 촛대 끝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던 밀리는 문득 편지지의 두 번째 장에 유독 여백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레몬 파이라는 게 설마…….’
그리고 밀리의 예상대로 유젠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편지지 두 번째 장의 여백 부분에 촛불을 갖다 대었다. 로엔그린은 깜짝 놀라 유젠을 불렀다.
“후작님, 지금 뭘 하시는……! 엇?”
촛대를 기울이는 유젠의 팔을 급히 붙잡으려던 로엔그린이 순간 멈칫했다. 촛불로 그을린 부분에 숨겨져 있던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군.’
밀리는 여백의 맨 끝까지 빼곡하게 차오르는 비밀 편지를 보며 예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레몬 즙은 본디 무색의 투명한 액체이다. 때문에 이것을 펜에 적셔 글씨를 써 봤자 종이에 즙이 흡수되면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하지만 레몬 즙이 스며든 종이에 열을 가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레몬 즙으로 적신 부분이 더 빠르게 타오르기 때문에 숨겨진 내용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비밀스러운 내용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쉽고 효과적인……」
로엔그린이 놀라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는 동안 유젠은 숨겨진 글자를 모두 띄우고는 다시 테이블 위에 편지를 펼쳐 두었다.
“다시 읽어 보죠.”
[레몬 파이를 야무지게 챙겼을 유즈.
아버지와 페레그린이 잔을 가진 채로 병력의 6할을 이끌고 남하했어. 나와 에인스워스 대공은 현 거점에 대기시켜 두고서.
아버지는 우리와 정보 공유를 하려고 하지 않아. 대공을 견제하면서 나와 고립을 시키려는 것 같아. 이후에 국혼을 성사시키려는 속셈이겠지.
뭐 그런데 대공도 꽤 웃기는 사람인 것 같아. 대기 명령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거점을 이탈해서 아버지의 군대를 쫓았거든. 확인한 바로는 이대로 도빌 강을 건널 예정인 모양이던데.
좀 이상한 점은 그들이 향한 방향이야. 도빌 강을 건너는 길은 몇 달 전 시작된 도로 확장 및 다리 보수 공사 때문에 로르헨 섬을 통하는 길을 제외하면 모두 현재 사용할 수가 없어. 너도 회의에 참석했으니 들었겠지. 그런데 대공의 말로는 아버지가 이끄는 병력이 로르헨 섬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던걸. 아무래도 로르헨 섬 외에 아버지가 남겨 둔 다른 길이 따로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예언에서 말한 수호자는 확실히 아버지 쪽은 아닌 것 같아. 그쪽에서 성배를 가져가고 나니 우리 거점은 기상도 평년과 비슷하게 돌아왔거든. 그런데 대공의 말로는 아버지와 페레그린이 있는 쪽엔 여전히 불가사의한 날씨며 부상 사고 등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걸 확인했다고 하더군.
지금까지 좋은 발견만 전달했으니 나쁜 소식도 하나 전해 보자면, 이걸 알아냈지만 결국 미행을 들켰어. 덕분에 대공은 자기 막사에 연금되어 있는 신세야.
이 내용을 제도에 올라와 있는 대공의 기사 중 로엔그린이라는 자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 아, 내용을 확인했으면 ‘알아서 움직이라’는 말까지 전해 달라고 하니 잘 좀 부탁해.
에티가.
추신. 네 부모님은 아직 찾지 못했어. 좋은 소식을 못 줘서 미안해. 어떻게든 찾아내 볼게.]
“…….”
“…….”
“…….”
에스델의 비밀 편지가 끝나자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의 표정이 모두 복잡미묘해졌다.
‘다들 비슷한 생각이겠지.’
아도니스가 무사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지휘관 대접은커녕 황제에게 저 따위 종마 취급을 받으면서 연락도 황녀를 통해야 하고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니 다분히 치욕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젠은 유젠대로 비밀 편지의 추신에서 자신의 가족과 연락이 안 닿는다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저번에 가족들 연락 닿느냐고 물어봤었나.’
유젠은 로엔그린의 딱딱한 표정을 보며 한층 피곤해진 얼굴로 물었다.
“어쩔 건가요, 갈 건가요?”
“물론입니다.”
“가겠다면 내가 돕겠습니다.”
“저희는 계속 후작 각하께 도움을 받기만 하는데요.”
“그래서 말인데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어떤 부탁이십니까?”
“알다시피 현재 나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여러모로 알아보고 계시지만 직접 움직이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상황이죠. 하여 경이 혹시라도 남부로 가게 된다면, 내 가족들의 소식을 알아 와 줬으면 해요.”
유젠의 말에 로엔그린은 잠시 갈등했다. 생각 같아서는 아도니스가 연금된 곳으로 곧장 달려가 그를 빼내고 그길로 황제를 쫓아 잔까지 훔쳐 북부로 도망치고만 싶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지나지 않아 실행해서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가장 중요한 명제가 있다.
‘도움을 받았는데, 어떻게 기사로서 외면하는가?’
짧은 망설임을 끝낸 로엔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인스워스 가문 기사단 단장으로서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해 선대 데빌레르 내외의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 *
“도련님께서 기사님의 판단에 맡긴다고는 하셨는데 가시는 걸로 바로 정하셨네요.”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밀리가 말하자 로엔그린이 피식 웃었다.
“말이 맡긴다는 거지, 오라고 하신 거나 다름없는 거 너도 알면서 뭘 물어보냐.”
그의 말이 맞았다. 아도니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명령을 내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다 말투도 불친절해서 사용인들은 모두 행간을 읽는 데 이골이 난 상태였다. 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아무래도 황제 폐하가 로르헨 섬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단 얘긴 결국 그곳을 통하면 마주치지 않고 남부로 갈 수 있다고 하시는 거죠?”
“그렇지. 넌 어쩔 테냐, 따라올 거냐? 고생스러울 텐데.”
“새삼스러운 질문을 하시는 것 아니에요? 저, 제도까지도 왔는걸요.”
“아니, 그것과는 다르지. 반란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건 곧 적진에 들어가는 거야.”
“…….”
밀리 본인도 맞지 않는 비유인 것은 알고 있었다. 같은 장거리도 말을 타고 전쟁터를 누비는 것은 평화로운 시대에 마차를 타고 중간중간 여관에서 숙식하며 이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젠과 약속한 이상 로엔그린은 반드시 남부 지방으로 내려가 데빌레르 선대 후작 부부의 행방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밀리는 기사도 아닌지라 비전투원이었고, 자신이 위험한 만큼 동행하는 이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소 불리한 조건을 갖게 된다.
“네가 동행한다면 성배를 확보할 경우에 일이 좀 수월해질 것 같긴 한데……. 뭐 잔의 성질을 죽이는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없다 보니 이번에도 그럴지는 확실하지 않지. 게다가 어린 여자애를 전쟁터까지 끌고 오는 건 정말 원치 않아, 그러니 우린 걱정 말고 너 편한 대로 해라.”
“아, 그게, 저는…….”
어쩐지 망설여졌다. 사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하지만 답변을 미루게 되는 이유는 로엔그린의 말처럼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