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4장
5장
6장
4장
작위 승계식에는 가문의 검이나 반지 같은 가보가 필요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앨버 대공령의 가보로 알려진 목걸이가 아니라 성배를 콕 집어서 가져오란 명을 내릴 정도면 아도니스보단 이쪽이 목적일지도 몰랐다.
“뭐, 말로는 ‘치유의 성배를 되찾았다는 이야길 들었다. 에인스워스 대공가의 보물임과 동시에 건국 신화로 내려오는 귀한 성유물인 만큼 제국의 주인으로서 직접 그 공을 치하해야 마땅하다…….’였지만 이거 그대로 믿는 놈 없지?”
알렉시스가 신랄하게 말하자 자리한 모두가 잠시 소리 내어 웃다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킹스턴 남작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명분이 너무 좋아서 거절하기엔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그걸 영지 밖으로 가지고 나가도 괜찮을까요.”
아도니스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배가 영지 밖으로 나간 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정도라면 사실 조금만 버티면 그만입니다. ……안 돌려줄 수도 있어서, 그게 걱정이죠.”
“그렇다고 달라고 직접 말하기도 어려워. 그간은 우리랑 접점이 없어서 신경 안 쓰고 있었지만 자기 권위에 맞먹거나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바로 누르려고 할 거야.”
“교단에 도움을 요청해 볼까요. 성유물을 다루는 법이나 그밖에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가장 믿을 만한 곳은 그곳뿐일 겁니다.”
생각해 보면 ‘아우로라의 별’이 사실 치유의 성배라는 것도 캐서린과 밀리를 거쳐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출처가 성도다.
다만 그럼에도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레녹스 2세는 즉위하며 대주교도 자기 사람으로 갈아 치웠네. 정과 교를 합치려 했는데 거기까진 역부족이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거지.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을 걸세.”
“하긴, 그래서 현 대주교는 신성력도 떨어지고 신탁이 내려오는 빈도도 한참 떨어진다고들 하죠.”
“그것 때문에 지금 교단 내부는 대주교를 필두로 제도에서 보낸 수도원 출신의 젊은 사제들 위주로 구성된 신흥 세력과 기존부터 교단에 몸을 담았던 구세력이 미묘하게 신경전 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찾아가야 할 건 구세력이겠군요.”
“하지만 대놓고 찾아갔다간 황제에게 미움을 사겠지. 그러면 그쪽 입장도 곤란해져서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할 건데.”
결국 구세력의 도움을 받으려면 좀 더 은밀하고, 이목을 끌지 않는 방법이 필요했다.
“신탁을 이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늙은 사제 사무엘이 한마디를 하자 이목이 집중되었다. 알렉시스는 계속 얘기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은밀하게 구세력 쪽에서 영향력이 큰 사제를 찾아가서 신탁이 내려온 것처럼 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현 대주교는 신성력이 약해 신탁이 내려오는 일이 잘 없고 오히려 구세력의 다른 사제들에게 내려오는 일이 흔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괜찮군. 그럼 신탁의 내용은 어떻게 하면 되겠소?”
“추상적일수록 좋습니다. 건국 신화에 언급된 수호자의 의무와 북부 경계를 지키는 형벌 같은 것을 언급한다면 저희가 나섰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로엔그린이 맡겨 달라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이자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축제까지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신속하고 조용히 진행하자고.”
* * *
성년식이 열리는 5월은 빠르게 다가왔다.
제도의 분위기 파악 및 계승식 준비 등을 위해 아도니스는 조금 이르게 출발하기로 했다.
대공 내외가 함께 따라가려 했으나 후계자와 영주가 모두 영지를 비우지 않는 것은 에인스워스 가문이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지켜 온 규칙이었기에 대공의 기사들과 측근 하인인 빌이 젊은 후계자를 수행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대공저의 하인 몇은 먼저 제도 시내에 위치한 에인스워스 가문의 타운하우스로 떠난 상태였다. 몇 대가 지나는 동안 대대로 관리인의 손길만이 닿았던 그 집을 젊은 대공자가 머무르기 걸맞은 곳으로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출발 바로 전날이 다가왔고, 몇 주 전에 어깨를 주무르던 일로 다소 어색해져 있던 밀리와 아도니스는 웬일로 함께 짐을 싸고 있었다.
거의 다 싸 둔 짐을 점검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당장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일정이었으므로 어색하다는 핑계로 쭈뼛거릴 여유조차 없어 화해(?)에는 아주 제격이었다. 그래 봤자 아도니스가 몇 달 정도 자리를 비울 예정이긴 했지만.
“제도 가서 선물이라도 사다 줘?”
“무슨 선물 사 오실 건데요?”
“아직 생각 안 해 봤는데. 음…… 가서 내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게 있으면 고려해 보지.”
“웬일이시래요.”
“감사하다고 하는 거야, 이럴 때는.”
“받고 나면 할게요.”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게 평소대로였다. 서로가 서로를 건방지다고 여기는 신경전에서 묘한 편안함을 느낀 둘은 다시 짐 체크에 집중했다.
“옷은 이게 다인가요?”
“그래, 어차피 나한테는 겨울옷뿐이니 제도에 가서 맞추는 게 낫겠지.”
앨버에서만 자라 온 아도니스가 가진 옷은 대부분 방한에 초점을 맞춰 투박하고 두터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수도의 의상실에서 계절과 최신 유행에 맞는 옷을 맞춰 올 예정이었다.
덕분에 옷가지는 출발할 때 입을 옷을 제외하면 승계식에서 입을 예복과 자기 전에 입을 침의가 다였다.
“예복은 새로 맞추시지 않고요? 이건 조금 오래된 것 같아 보이는걸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입으셨던 거라서.”
“아 그럼 당연히 입으셔야죠! 어쩐지 고급스럽더라고요.”
젠장.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치는 상상을 하며 밀리는 뻔뻔하게 되지도 않는 수습을 시도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도니스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밀리는 대충 근처에 있는 소식지에 시선이 쏠린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말했다.
“이런. ‘크로스도버 다리 공사, 자재 수급 문제로 또다시 연장. 몇 년째 이어지는 공사로 상단 등 도빌 강 이용객들 불편 심화’. 오, 이런. 남부에서도 축제 참여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 불편해서 어쩐대요.”
“하나도 신경 안 쓰고 있잖아.”
“크흠. 아니 그래도 조금은 신경 쓰고 있다고요. 남부는 몇 년 전 밀 값 폭등이나 항구 이용료 등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알겠으니까 적당히 해. 다 티 나고 수습도 안 돼.”
“넵.”
오래됐다는 말이 무색하게 잘 관리된 검은색 예복에 대한 망언을 수습하는 데 실패한 밀리는 조심스럽게 짐 가방을 닫아걸었다.
옷가지가 적으니 짐은 많지 않았다. 책 몇 권과 호신용 무기, 양피지와 잉크, 펜 정도. 제국에서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가문의 후계자가 가지고 다니기엔 죄다 언제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뿐이었는데,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가져갈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이 들어 있는 고급 목함을 밀리는 빤히 쳐다보았다. 밀리의 시선에 아도니스도 같이 고개를 돌리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거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신경 쓰일 텐데 귀한 건 애초에 안 가져가는 게 낫지.”
밀리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까.”
아도니스가 불안한 듯 고개를 털자 이마와 눈썹을 덮던 검은 곱슬머리가 마구 흩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만 밀리도 거기에 확답을 내려 주진 못했다.
“잘……돼야죠.”
보름 전 타운하우스 정비를 위한 하인들이 먼저 출발할 때 대공성에서 가장 승마술이 뛰어난 기사, 대공의 오른팔 로엔그린도 같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제도가 아닌 성도였다.
가짜 신탁을 위해 사무엘 사제는 교단 내 구세력 핵심 인물 명단과 함께 소개장도 건네주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렸는지 며칠 전에 로엔그린에게서 루치오 주교와 함께 제도로 향할 테니 거기서 합류하자는 내용의 전서구가 도착했다. 구세력 포섭에 성공했으니 성유물을 돌려받는 것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러므로 이 불안은 그것이었다.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이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용기를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두려움 말이다.
몇 번이나 회귀하며 죽음과 안식을 갈구하던 밀리는 그 두려움을 이해했기에 저도 모르게 아도니스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얹어 토닥였다.
멍하니 있던 아도니스는 한 박자 늦게 화들짝 놀라서 손을 뺐다. 밀리 또한 덩달아 놀라 군기가 바짝 든 태도로 벌떡 일어났다.
“……이제 챙길 건 다 챙긴 것 같으니까 나가서 네 할 일 해.”
“네에.”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방을 나서던 밀리가 문득 돌아보며 물었다.
“내일 몇 시에 출발하세요?”
“아침 일찍. 나가 봐.”
아도니스는 밀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알려 주지 않을 작정이군. 밀리는 안도와 서운함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으로 방을 나와 문을 닫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 * *
“!”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기상한 밀리는 세수도 하기 전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막 동이 트기 직전이라 어둑어둑한 와중에 성문 안쪽에 갑옷과 망토를 두른 여러 인영이 눈에 띄었다.
‘빨리 가면 안 늦을 수도 있어!’
재빨리 옷을 꿰어 입은 밀리는 머리를 땋으며 계단을 올라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제 만들어서 용기에 담아 식혀 둔 음식을 싸 들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기상하자마자 창밖으로 내다본 성문 안쪽이었다.
가볍게 격식을 차린 차림의 아도니스가 마차 앞에 서서 사무엘 사제와 양친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잘 챙겼느냐?”
“걱정 마세요.”
아도니스는 약간 우쭐대는 표정으로 품에서 함을 꺼내 보였다. 걸쇠를 풀고 손끝으로 뚜껑을 밀자 살짝 열린 틈새에서 가느다란 금빛 광채가 비어져 나왔다.
여느 황금으로는 흉내조차 어려운, 성배만이 가진 진짜 광채였다.
광채를 보여 준 아도니스가 곧장 함을 닫아 걸쇠를 걸고 고이 품속에 그것을 넣었지만 여전히 대공 내외는 불안한 표정을 거두지 못한 채였다.
아도니스는 무어라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을 고민해 보다 포기했다. 한두 마디 말로는 불안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때마침 수행 기사들의 행렬 점검이 끝났는지, 케이가 말을 몰아 아도니스에게로 다가왔다.
“도련님, 슬슬 출발하시죠.”
그러나 아도니스는 양친에게 인사를 마치고서도 좀처럼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자꾸 성 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꼭 성에 뭔가 놓고 온 것이라도 있는 것만 같았다.
열심히 달려가고 있던 밀리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머리색은 무채색인 이 겨울 성에서 상당히 눈에 띄는 편이었기에, 성 쪽을 쳐다보던 아도니스는 금세 밀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금빛 눈동자가 눈에 띄게 반짝였지만 급히 나오느라 안경을 미처 쓰지 못한 밀리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아도니스의 앞까지 달려가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일찍도 일어났네.”
“평소 기상 시간보다 두 시간은 이른 데도요…….”
숨을 몰아쉬느라 문장을 간신히 맺으며 밀리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소시지랑, 비스킷이랑, 스튜예요. 가는 길에, 드세요.”
천으로 싼 꾸러미는 내용물에 걸맞게 제법 크기가 컸다. 들고 서둘러 뛰어오느라 무리했는지 꾸러미를 내민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빌빌대다 떨어뜨리지 말고 이리 내.”
안경에 가려지지 않은 그녀의 맨 얼굴을 빤히 보던 아도니스는 괜히 심술궂은 기분이 되어 그녀의 손에서 꾸러미를 빼앗듯 낚아챘다. 가죽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손을 스쳤다.
대공은 아도니스의 어깨를 툭 쳤다.
“잘 먹겠다는 말 할 거 아니면 빨리 가라, 이 녀석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 녀석이?”
한바탕 시원한 웃음이 터지고, 아도니스는 빌과 함께 마차 안으로 사라졌다. 성문이 열리고, 말에 오른 케이가 행렬의 선두에 서서 기사들과 함께 먼저 나섰다.
마차 창밖으로 아도니스의 흰 손이 빠져나와 건성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던 밀리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에 먼저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신의 방에서 안경을 챙겨 쓴 그녀가 곧장 향한 곳은 성벽 위였다. 아도니스 일행이 영지 밖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녀는 행렬이 영지의 경계까지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성문 앞에서 그들을 배웅해 주던 대공 내외를 비롯한 사람들도 행렬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성벽 위로 하나둘 따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가 영지의 경계를 나서는 순간, 머리 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런…….”
“……다들 이 정도는 예상했잖나.”
많은 이들이 탄식하기는 했으나, 예전의 날씨가 돌아오는 것까지는 예상 범위였다. 그 때문에 잔을 돌려받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제도행을 준비했으니까.
다만.
“저, 저기 좀 보십시오!”
아도니스 행렬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2열로 행진하던 기사들의 정렬도 모두 무질서하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마차의 바퀴가 빠진 것 같습니다.”
“나 참.”
다행히 탑승자에게는 별일이 없는지, 기우뚱한 상태로 완전히 멈춰 선 마차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린 아도니스와 빌은 마차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는 듯했다.
“도련님은 무사하신 것 같은데…… 어?”
섬뜩한 감탄사와 함께 우르르, 하며 크고 아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멈춰 선 앞쪽 평원의 낮은 산에서 뿌연 먼지구름 같은 것이 피어오르나 싶더니.
“눈사태다!”
“으아아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그마한 설산에 몇 년을 쌓여 왔을 눈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천만다행으로 아도니스 일행을 덮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던 길에 난데없이 쏟아진 눈은 장벽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제도로 가려면 통행이 가능할 정도까지는 눈을 치워야 할 상황이었는데, 제때 빠르게 치우지 않으면 일정에 지정이 생길 수도 있었다.
“눈 치우는 것을 도와줄 사람을 보내야겠군. 마리아, 부탁하네.”
“예, 전하.”
안나그레타와 마리아는 침착하고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해 아도니스를 도울 인력을 보내 주기로 했다.
다만 그들도 좀 전의 눈사태로 적잖이 놀랐는지 차분한 목소리 톤과 다르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그들뿐 아니라 이 광경을 목도한 모두가 다 그랬는지, 여기저기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치우고 다시 출발해도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나면 어떡해.”
“다음엔 땅이 꺼지는 거 아냐?”
“제때 갈 순 있는 건가…….”
“꼭 뭔가가 도련님을 못 나가게 하려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