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7장. 저택에 찾아온 손님
8장. 어둠의 숭배자들
9장. 붉게 물든 사랑
7장. 저택에 찾아온 손님
다음 날 저녁.
에반은 책상에 앉아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페트로 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이 열리고 페트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에반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님, 혈색이 정말 많이 좋아지셨군요.”
에반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다시 통증이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녹스란 자는 알아봤어?”
페트로가 대답했다.
“사실 그자는 저도 익히 들어왔던 치유 마법의 대가입니다. 유명한 분이라 공작님께서 아시는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그 외에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에반은 제국에서 있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내 몸은 거의 죽은 상태였어. 그런데 그자가 준 묘약을 먹고 깨어났지. 그게 가능해?”
페트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녹스의 치유 마법은 탁월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묘약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녹스가 영생의 비밀을 얻기 위해 수십 년간 연금술에 매달렸지만, 제가 아는 한 아직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그렇군…….”
“더구나 악마의 저주를 푸는 마법이라니요? 특히 악시우스의 저주는 그 어떤 마법사도 풀 수 없는 저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반은 잠시 침묵했다.
저주가 풀리길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녹스의 묘약에 특별한 회복 효과가 있을지 기대했던 터였다.
페트로는 에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군요. 마치 예전의 공작님을 보는 듯합니다. 공작님이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거고. 어쩌면 녹스의 묘약에 특별한 회복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페트로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때 공작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때는 엘리아가…….”
무심코 꺼낸 이름에 에반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설마 그 헬라족 여인이요?”
페트로가 무언가 깨달은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 여인이 공작님을 살렸을 거라는 생각을!”
에반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페트로는 확신에 찬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공작님, 엘리아가 피를 내줬을 가능성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빨리 마음을 얻으실 줄이야!”
페트로의 말에 에반은 강하게 부정했다.
“엘리아가 갑자기 내게 피를 내줬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공작님이 깨어나지 않으니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피를 내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수명을 연장하기만 하면 공작님은 저주에 풀려나시는 겁니다!”
에반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라니까.”
“물론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요. 고대 문서에 따르면, 헬라족의 피는 최소 주 1회는 꾸준히 마셔야 효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500세가 될 때까지 엘리아의 피를 계속 흡혈하십시오.”
“잠시만, 페트로!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가 엘리아의 피를 마셨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에반이 말끝을 흐리자, 페트로는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에반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솔직히 고백했다.
“……아직 엘리아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페트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럴 리가요. 세상에 공작님의 외모를 보고 반하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공작님의 상태는 헬라족 여인의 피를 마신 것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페트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의 상태가 헬라족의 피가 작용한 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페트로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 여인을 다시 한번 실험해 보는 건 어떨까요?”
“나보고 다시 흡혈해 보라고?”
에반은 헬라족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마법사의 힘으로 새겨 넣은 ‘아가파오의 각인’이 떠올랐다.
지난번 엘리아에게 흡혈을 시도하려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아가파오의 각인 때문에 입술이 데였던 기억이었다. 불에 덴 것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마력이었다.
“물론 아가파오의 각인이 걸리긴 하지만, 지금은 그 효력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음…….”
에반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생사가 걸린 문제였지만, 이상하게도 헬라족 피의 효력보다 엘리아의 마음이 더 궁금해졌다.
에반은 악시우스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엘리아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페트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작님, 지금은 괜찮더라도 언제 통증이 재발할지 모릅니다.”
“알고 있어.”
라파엘 사건 이후 한동안 컨디션이 회복되었지만, 저주가 풀리지 않는 한 시한부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공작님, 악시우스의 저주에서 벗어나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놈을 반드시 처단해 주십시오.”
페트로의 말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에반은 자신이 이대로 죽는다면, 악시우스가 더욱 악의 세력을 확장시켜 세상을 끔찍한 파멸로 몰아갈 것이 분명했다.
악시우스의 악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남아, 놈과 맞설 만한 힘을 얻어야 했다.
* * *
보름달이 영롱한 밤.
페트로가 돌아간 후, 에반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벤치에 앉아 있는 엘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아, 거기서 뭐 해?”
엘리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공작님,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잠시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오늘따라 바람이 선선하네요.”
달빛에 비친 그녀의 청초한 모습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언제부턴가 엘리아를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엘리아에게 느껴지는 묘한 감정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엘리아는 에반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의아한 듯 물었다.
“혹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
“그럼요. 이리로 오세요!”
에반은 그녀 옆에 가만히 앉았다.
“오늘 셰리나 영애와 작별 인사는 잘 했어?”
“네, 아가씨가 공작님을 뵙지 못하고 가서 아쉬워하셨어요.”
“그동안 영애를 상대하느라 수고했어, 엘리아.”
“아니에요, 아가씨가 편하게 대해 주시고 제 말동무가 되어 주셔서 즐거웠거든요.”
에반이 당황해 하는 엘리아의 얼굴을 보고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아까 검은 사제복을 입은 손님은 누구세요? 예전에도 오셨던 기억이 나요.”
페트로는 범상치 않은 아우라에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풍겨 그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구마사제야. 그의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었지.”
“우와, 구마사제요? 악령을 퇴치하는 직업이잖아요! 영화에서 본 적이 있어요!”
에반은 엘리아가 던진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영화?”
이런, 이 세계에는 없는 단어지!
“아, 생각해 보니 꿈에서 본 것 같아요. 하하!”
다행히 에반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작은 호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엘리아의 목덜미에서 살랑거렸다. 그녀는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고, 순간 가녀린 목이 훤히 드러났다.
“제국에서 내가 깨어나지 않았던 날, 기억해?”
“기억하죠, 그때 공작님이 영영 깨어나지 않으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걱정 많이 했어?”
“네, 많이 했어요.”
이 짧은 대답에 에반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숨을 고르며 그는 다시 물었다.
“혹시 그때 녹스가 준 묘약 말고, 나에게 뭔가 더 먹인 게 있어?”
엘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에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그때, 네 피를?”
꼭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그때였다.
“에반!”
갑자기 어디선가 낯선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와 에반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긴 은발에 매혹적인 미모를 지닌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짐 가방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엘프를 떠올리게 할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큰 키와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녀는 가슴선이 드러나는 상의에 짧은 재킷을 걸쳐 입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누구지?’
여인은 에반에게 성큼 다가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 안고는 뺨에 입 맞췄다. 그 과감한 행동에 엘리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에반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아 천천히 밀어냈다.
“장난은 여전하군, 카벨라.”
그녀는 에반의 뺨에 묻은 붉은 립스틱을 엄지로 닦아 내며 싱긋 웃었다.
“장난이라니 섭섭한걸, 그동안 잘 지냈어?”
엘리아는 영문을 모른 채 당황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아릿한 감정이 일었다.
‘설마 공작님에게 숨겨 둔 여자가 있었던 걸까……?’
에반은 놀란 표정의 엘리아를 보며 서둘러 해명했다.
“엘리아, 오해하지 마. 내 친구 ‘카벨라’야. 인사해.”
친구라고? 엘리아는 의아한 마음으로 카벨라를 바라보았다.
카벨라도 고개를 돌려 엘리아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에반을 바라보던 사랑스러운 눈빛이 엘리아를 향하자 싸늘하게 변한 것은 기분 탓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녀는 엘리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난 카벨라야, 그런데 넌 누구지? 행색을 보니 여기 하녀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엘리아 바스티안’입니다. 칼리디움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습니다.”
카벨라는 ‘하녀’라는 말에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 여기서 머물 예정이니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