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4장. 악연의 고리
5장. 살만다라의 꿈
6장. 미로 정원 살인 사건
4장. 악연의 고리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다. 엘리아는 피곤했지만 눈이 번쩍 뜨였다.
정오가 되자 작전의 주요 멤버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아르크스가 먼저 소식을 전했다.
“오늘 오전에 타파야 마을에 실종자가 한 명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참석자들이 술렁였다. 아르크스는 이어서 주의를 당부했다.
“오르헤이 영지에는 통금 조치가 없으니, 마을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 주십시오.”
타파하 마을이 속한 오르헤이 영지도 통금을 시행하려 했지만, 영지법상 하루 전에는 통금을 공지해야 했고, 아직 타파하 마을에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아 실행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조용히 있던 한 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피해자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타파하 마을을 수색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지 염려됩니다.”
그의 말은 에반의 목격자 진술에 대한 신뢰를 의심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는 이어서 덧붙였다.
“공작님의 제보를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목격자 진술의 정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라파엘이 아틀란스 영지에서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지만, 타파하 마을에서는 잠잠했기에 그 의문은 충분히 제기될 만했다.
‘분명 유령이 라파엘을 목격했다고 했는데…… 만약 그 유령이 거짓말을 한 거라면?’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엘리아의 손에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때 에반이 입을 열었다.
“라파엘은 분명 타파하 마을에 있을 겁니다.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사실 라파엘이 제 아버지입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아르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라파엘이 공작님의 아버님이란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제 아버지는 수백 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고, 라파엘은 그 육체를 훔쳐 갔습니다. 악마는 잠재된 인간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고향인 타파하 마을로 간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악마가 인간의 기억을 볼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르크스가 혀를 내둘렀다.
악마는 때때로 인간의 꿈을 통해 기억을 엿보고, 그 속에 숨겨진 욕망을 자극해 인간을 타락시키기도 했다.
“그동안 마음이 편치 않으셨겠군요. 공작님.”
“이젠 괜찮습니다. 오래전의 일이니까요. 게다가 라파엘은 제 아버지의 몸을 뺏은 가짜일 뿐입니다.”
에반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크스는 시계를 확인한 뒤,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공작님, 저는 먼저 타파하 마을로 이동하겠습니다. 오늘 미끼로 나설 분들에게 방어 결계 마법을 걸 예정입니다. 우선 엘리아부터 결계를 치겠습니다.”
아르크스가 엘리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녀의 신체 주변에 영롱한 빛과 함께 얇은 막이 생겨났다.
엘리아는 처음 느껴 보는 신비로운 기운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5분쯤 지나자 아르크스가 손을 내리며 결계를 마무리했다. 그러자 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결계가 완성됐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라파엘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거야.”
“고맙습니다.”
“공작님께서는 엘리아와 함께 준비된 마차를 타고 집결지로 이동해 주십시오. 마차가 안전하게 인도할 겁니다. 그럼 조심히 오십시오.”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크스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 뒤, 그의 기사들과 함께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달그닥 달그닥.
마차를 타고 황궁을 벗어난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다. 에반이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엘리아에게 내밀었다.
검집에 사파이어와 루비가 촘촘히 박혀 있는 작은 단도였다.
“옷 속에 숨겨 둬. 만약 라파엘이 너에게 가까이 다가온다면, 이 단도로 바로 내려쳐. 잠시 놈을 마비시킬 수 있을 거야.”
“알겠어요.”
엘리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단도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결계가 쳐져 있는데도 위험할 수 있나요?”
“방심하긴 일러. 라파엘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엄청난 마력에 의해 결계가 깨질 수도 있거든.”
엘리아는 단도를 만지작거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칼은 주로 요리할 때 사용했지, 누군가에게 흉기로 휘두를 줄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럼, 할 수 있어.”
“고마워요”
“그 칼로 라파엘을 깊숙이 찔러. 그리고 무조건 도망쳐. 이 칼엔 마력이 깃들어 있어서 라파엘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거야.”
엘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 볼게요!”
에반이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만약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엘리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요?”
에반은 고개를 돌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뭔데요? 하려던 말이 있었잖아요.”
하지만 에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난 엘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에반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단장님을 빨리 나한테 데려오라고.”
“걱정 마세요! 저 달리기 진짜 빠르거든요.”
“그래? 믿어 볼게.”
“믿어도 된다니까요.”
에반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깨워 줘.”
“네, 공작님.”
따스한 오후 햇볕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엘리아도 노곤해진 나머지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끼익?
마차가 멈추는 소리에 잠에서 깬 엘리아가 눈을 비비며 유리창 밖을 내다봤다.
“공작님, 일어나세요. 도착한 것 같아요.”
엘리아의 목소리에 에반이 천천히 눈을 떴다.
덜컹.
마차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은 하인을 따라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르크스와 은빛 기사단,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아르크스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공작님, 오시는 길에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덕분에 편히 왔습니다.”
“이곳은 황궁에서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켈린 함무르크’ 백작님의 별장입니다. 이번 작전 본거지로 사용하도록 특별히 저택을 내어 주셨습니다.”
빌리만 3세가 켈린 함무르크 백작에게 타파하 마을의 거대한 별장을 작전 본거지로 내어 줄 것을 요청했으니, 사실상 황제의 명령이었다. 백작은 군말 없이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미끼가 되어 줄 분들 모두에게 결계를 쳐 두었고, 라파엘을 유인하기 위해 목 부위에 소량의 동물의 피를 묻히도록 했습니다.”
엘리아의 불안이 커지는 순간이었다. 에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라파엘이 이미 엘리아의 체취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 동물 피는 묻히지 않는 게 좋겠군요. 엘리아도 그걸 꺼릴 테고요.”
아르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묻히는 건데 너무 신경 쓰시는 것 아닙니까?”
“엘리아의 체취만으로 충분히 라파엘을 유도할 수 있는 건데, 굳이 동물 피는 묻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르크스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쨌든 오늘 공작님과 제가 한 팀이 되어 엘리아 양을 보호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때 메인 홀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메인 홀에 모여 주세요!”
아르크스가 엘리아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엘리아,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어.”
“네.”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르크스가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에반이 다가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내가 항상 네 뒤에 있을 테니까.”
엘리아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따 뵐게요.”
엘리아는 건장한 성인 남녀 30명과 함께 메인 홀로 이동했다. 남자들은 모두 평민 복장을 한 기사들이었고, 여자들은 포상금을 받고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홀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한 기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 모두 집중하세요! 30분 후에 저택을 떠나 마을 광장으로 모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녁 9시에는 나눠 드린 지도를 보고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긴장감이 서서히 밀려왔다. 작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 *
에반이 소파에 앉아 종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결국 표식을 풀지도 못한 채 작전이 시작되었군.’
현관 앞의 괘종시계가 어느새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르크스가 다가와 조용히 입을 뗐다.
“공작님, 작전 수행 1시간 전입니다. 이제 저희와 함께 마을 광장으로 가시지요.”
“벌써 시간이 다 됐군요. 갑시다.”
에반이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그를 덮쳤다.
띵?
“윽……!”
에반은 머리를 감싸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공작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일단 소파에 다시 앉으세요.”
아르크스가 에반을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움직이시기 어려워 보입니다. 상태가 나아지시면 그때 나와 주십시오. 엘리아는 제가 철저히 지킬 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요.”
‘하필 이럴 때 발작이…….’
에반이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더 큰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으윽……!”
“이 상태로는 무리십니다. 잠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엘리아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곧 뒤따라갈 테니 엘리아를 부탁하오.”
“걱정 마십시오. 공작님.”
아르크스는 가볍게 인사한 후, 기사단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갔다.
에반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침이 어느덧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다행히 두통이 조금 가라앉은 듯했다.
그의 머릿속에 표식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영혼, 여인, 돌려주다?’
에반은 다시 종이를 펼치고 표식들을 집중해서 바라봤다. 마치 답이 바로 앞에 있을 것 같은데, 쉽게 잡히지 않아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