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프롤로그
1장. 엘리아 바스티안
2장. 헬라족 여인의 행방
3장. 피의 표식
프롤로그
“콜록콜록!”
병실에서 산소 호흡기로 생을 연명한 채, 홀로 누워 있던 지아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곧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죽음.
인간은 죽음에 대해 생각했을 때 어떤 막연한 공포나 말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투병 생활 동안 여러 번 죽음의 문턱까지 오갔던 지아에게 죽음이란 이 끔찍한 고통을 끝낼 최종 종착지와도 같았다.
지아는 어린 시절부터 종종 심장이 콕콕 찔리는 듯한 통증을 느껴 왔었다. 여러 번의 숱한 예고를 무시한 채, 본격적인 불행이 시작된 건 중학교 3학년 체육 시간 때였다. 갑자기 가슴에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그녀는 곧장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됐다.
「선천성 심장 판막증」
심장에 있는 판막에 이상이 생겨 일어나는 병이다.
물론 조기에 발견해서 빠르게 치료했다면 지아의 기대 수명은 아마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 오랫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고, 도박과 술독에 빠져 살던 아빠는 지아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 이후 할머니가 지아를 거둬들이고 지금까지도 그녀의 병시중을 도맡아 왔다.
하나뿐인 손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길 바라는 할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지아의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갑자기 숨쉬기가 힘드네…….’
그때였다. 숨이 멎을 듯한 극심한 고통이 심장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윽!”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컥! 허억…….”
그녀의 의식이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삐이이이?
그 순간, 심전도계 비프음이 경고음으로 바뀌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의사와 간호사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병실 밖을 나가 급히 누군가를 불렀다.
“유지아 보호자님!”
간호사의 부름에 급하게 병실로 뛰어온 지아의 할머니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지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담당 의사가 조심스럽게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할머니의 얼굴이 일순간 하얗게 질렸다.
“안 돼…… 지아야.”
할머니가 지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눈물이 할머니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아야, 할머니가 미안해. 이제 더 이상 아프지 말고 그곳에서 편히 쉬련. 흑흑!”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지만, 지아는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지아는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응답했다.
‘할머니,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랑해요…….’
그때, 지아의 몸이 한차례 격렬하게 떨리더니 의식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환자 감시 장치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요동치던 그래프가 서서히 평평해졌다.
삐?
창백하게 변한 지아의 손이 할머니의 손에서 스르륵 풀려났다.
그렇게 지아의 심장은 끝내 제 할 일을 마치고 멈춰 섰다.
1장. 엘리아 바스티안
쿵!
“윽!”
어디엔가 부딪힌 듯 왼쪽 머리 부근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매일 눈을 뜨면 보이던 하얀 병실 천장이 아닌 낡은 목조로 만들어진 천장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5평 남짓의 좁은 방 안이었다.
허름한 담요와 베개, 술병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 대여섯 개가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베개 옆에 높인 나무 상자에 머리를 박은 게 분명했다.
이상하게도 몸이 가뿐했다. 매일 느꼈던 심장 통증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호흡 곤란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아주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숨 쉬는 게 왜 이렇게 편하지?’
편하게 숨 쉬는 것조차 어렵던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숨을 내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차디찬 공기가 속을 가득 채우며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확실히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순간 이상함을 직감한 그녀는 천장에 걸린 낡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
눈앞엔 환자복이 아닌 색이 바랜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시 거울에 손을 뻗었다.
밝은 갈색 톤의 머리와 연한 녹색빛이 감도는 눈동자, 꽃을 머금은 듯한 작은 입술. 그리고 새하얀 피부.
얼굴에는 생기 넘치는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창백했던 피부는 건강한 빛을 띠었고, 눈에는 힘이 넘쳤다.
“뭐지, 이거 꿈인가?”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새하얀 볼을 톡톡 건드려 보고,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허벅지 깊숙이 전해지는 통증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듯했다
순간 목에 걸려 있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반달 모양의 작은 장식이 달려 있는 금빛 목걸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때 불현듯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소설 속에 빙의된 건 아니겠지……?’
오랜 투병 생활을 겪는 동안 유일한 낙이 바로 소설을 보는 것이었다. 매일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소설 속 세상에서만큼은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일은 정말로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지아는 다시 한번 거울 속의 자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내가 정말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건가?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지? 그리고 나는 누구지?’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막 넘기려던 찰나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쾅쾅!
“?”
문밖에서 중년 부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 지금 시간이 몇 시야! 해가 벌써 중천에 떴는데 어서 일 시작하지 못해?!”
‘누구지?’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달칵!
붉은 파마머리에 매서운 인상을 가진 50대 중반 여성이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게으름뱅이야! 오늘 할 일이 산더미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어? 당장 나와!”
아줌마의 무례함에 당혹감이 들었지만, ‘엘리아’란 여인의 이름 외에 아직 파악한 정보가 없기에 가까스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고 했어요.”
“어휴! 속 터져!”
아줌마는 가슴을 주먹으로 연신 내리치더니 등을 홱 돌리며 사라졌다.
* * *
그로부터 세 달 후.
이 몸의 주인은 ‘엘리아 바스티안’이라는 이름으로 20대 중반의 여자로 추정된다.
이곳은 루마르크 주점으로 엘리아는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소설 속에 빙의된 거였다니…….’
문제는 어떤 소설 속에 빙의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것.
그간 정보를 수집해 본 결과,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에 나오는 그 어떤 주인공이나 서브 여주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은 여느 소설 속에서 쉽게 등장하는 도입부 스토리에 근접해 보였다.
‘누구의 스토리였을까?’
머릿속에 여러 개의 소설 제목이 떠올랐지만, 그것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에게 주어진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엘리아 바스티안’이라는 이름의 새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래, 이번 생은 가고 싶었던 여행도 가 보고, 하고 싶었던 것도 하면서 재밌게 살아 보자!’
희망찬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잔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 지금 멍때릴 시간이 어딨어? 빨리 일해!”
아침마다 달달 볶아 대는 심술궂은 부인의 정체는 루마르크 주점의 주인장 ‘말리코 갈리아스’라는 과부였다.
주인장을 제외하면 고용인이라고는 주방장과 달랑 그녀뿐이었는데 혼자서 청소, 서빙, 설거지, 잡일까지 도맡아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녀는 건강한 신체가 허락한 노동에 심취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해 본 건 처음이라서 얼마 동안은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무언가 잘못됨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 7시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하루 17시간을 넘게 일한다는 것.
주방장이 아파서 하루 못 나온 날이 있었는데 그때 쉬어 본 게 휴일의 전부였다. 얼마나 일이 고되면 병실에서 매일 24시간 갇혀 있을 때가 그리울 정도였다.
이렇게 극한의 노동 강도와 초과 업무를 견디며 버는 월 급여는 고작 100루카스. 말리코 부인은 숙식비도 받아 내는 고약한 인간이기에 그 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세 달간 일하며 제법 일머리도 생기고 잡다한 일도 배울 수 있었다. 심지어 얼마나 강철 체력인지 열악한 근무 환경에도 단 한 번도 아파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또다시 말리코 부인이 엘리아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 손님들이 앉았던 테이블 좀 치워 놔.”
테이블 위에는 먹고 남은 음식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술병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오전 내내 창고 정리를 하느라 잠시 숨 좀 돌리려고 했던 참이었다.
말리코 부인은 엘리아가 잠시라도 쉬는 꼴을 보지 못했다.
‘악덕 주인 같으니라고! 진짜 못 해 먹겠네.’
엘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그릇과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병들을 나무 상자 안에 담아 이동하려고 할 때였다.
미끌?
쨍그랑!
엘리아가 바닥에 흥건한 액체에 발을 헛디뎌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철퍽!
그 순간, 나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술병들이 앞다투어 깨지며 바닥에 파편을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말리코 부인이 사나운 얼굴로 호통을 쳤다.
“야! 너 미쳤어? 일 제대로 안 할래? 손님 오기 전에 당장 치워!”
“죄송해요. 빨리 치울게요.”
깨진 술병들을 상자에 담고 있는데 말리코 부인이 또 말을 걸었다.
“내일부터 마을 축제가 시작될 거야! 손님들이 몰리는 아주 중요한 시기지. 그러니까 내일부터 주방 보조도 같이 맡아 줘야겠어.”
어이가 없었다.
“그럼 식당 업무는 누가 해요?”
“그건 원래 하던 일이니까 당연히 네가 해야겠지?”
이러다 과로사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건 무리예요.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 산더미인데 직원을 더 뽑아 주세요.”
엘리아의 말에 발끈한 말리코 부인이 목청을 크게 높였다.
“그건 내가 판단해! 주인이 시키면 닥치고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