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검성 0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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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검성
08
말하는토템
역천검성 08권
차례
제36장. 검선, 선정. - 2
제37장. 머리 찾기.
제38장. 청악. - 1
역천검성 08권
제36장. 검선, 선정. - 2
“그러니 검선이라는 별호는 내게 주어져서는 안 되는 걸세.”
그의 말에 나는 짧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제의 대련에서는 어째서 전력을 다하신 겁니까? 별호를 받고 싶지 않았다면…….”
“실수였다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천검이 무안함을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자네가 제대로 검을 마주칠 수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네. 우리의 사이에는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있으니까. 그래서 주변에서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힘을 조절할 생각이었는데, 자네의 실력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지 뭔가. 그래서 조금 실수를 범했다네.”
실수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상황이 펼쳐져서, 조금 시험해보겠다는 생각을 잊어버렸다네. 오랜만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기에, 무심코 전력으로 검을 펼쳐버렸어.”
“그렇다면 처음부터 검선의 별호를 제게 주실 생각으로 대련장에 오른 겁니까?”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천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나 같은 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워. 나처럼 열정이 사그라든 이는 그 무게를 질 수 없다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현천검은 그런 나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그저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네. 검선의 별호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능동적으로 무언갈 할 정도의 그릇은 되지 못한다네. 하지만 검선의 별호를 받는 이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래서는 안 되지 않나.”
현천검의 까만 눈이 나의 심부를 찔러왔다.
“자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맹주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둘 다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네.”
“어떤 것입니까?”
“그 자리에 내가 끼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네.”
“……지금 하신 말씀은, 이 대련을 포기한다고 하신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나의 말에 현천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만 원한다면. 지금 당장 이 대련을 끝내줄 수 있네.”
“정말로 이렇게 끝내셔도 되겠습니까?”
“……그렇네.”
그 말을 뱉어내는 순간, 그의 얼굴은 그가 뱉어낸 말과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아쉬움과 회한. 눈에 잡힐 정도로 명확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지만, 그는 억지로 웃으며 그 감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차피 더 이상 대련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을 걸세. 자네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 검선의 별호를 받기에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자네의 검은 내게 닿을 수는 없네. 그러니 계속 대련을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반복이 될 뿐이네.”
그의 말에 잠깐 고민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대련을 끝내는 것은 당연히 큰 이득이 될 것이 분명했다. 대련이 빨리 끝나면 끝날수록 더 빠르게 맹주를 뒤쫓아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대련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이유로 이 대련을 끝내고자 하시는 것 아닙니까?”
“…….”
“서로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 실력을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 나는 자네와 충분히 검을 나눴다고 생각하네.”
입으로는 그런 말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아직.
그의 눈 속에는 제대로 합을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반. 그리고 나머지 반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던, 다시 피어오르는 검에 대한 열정이 반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되묻는 말에 대답 없이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에게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를 겨누고 있던 백월을 내렸다.
그 모습이 대련을 끝내겠다는 선언으로 보였는지 현천검도 검을 집어넣기 위한 동작을 취했다. 검집으로 돌아가며 모습을 감추는 흑건과는 달리, 그의 입은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정…….”
“아쉽지 않으십니까?”
정검을 불러 기권을 선언하기 전에, 날카롭게 찌르는 나의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던 것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 대신, 현천검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내게 그 질문의 의미를 물어왔다.
“무엇이 말인가?”
“아직, 저는 보여드리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것이 많으실 텐데요.”
현천검은 대답 없이 말이 튀어나오는 나의 입을 바라볼 뿐이었다.
“화경에 오른 고수가 서로의 실력을 마주할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언제 다시 제대로 검을 펼칠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습니다.”
내 말에 현천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서로 지금을 후회하지 않도록.”
나는 백월을 검집으로 돌려내고 그 아래에 있는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말아쥐었다. 검집에서 천천히 뽑혀 나오는 붉은색의 검신. 그리고 그 검신에 새겨진 적일이라는 이름.
무당산에서는 손에 쥐고 자세를 잡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나의 일부와도 같이 자연스러웠다.
“서로 숨기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천천히 뽑혀 나오는 적일을 향해 있던 현천검의 시선이 나의 말에 다시 올라왔다. 시선이 마주한 순간, 현천검의 눈 속에 들어있는 망설임이 읽어졌다.
“내가 전력을 다하면 자네는 여기서 체면을 구길 걸세.”
현천검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 자리에 앉아 있는 다섯을 향했다.
“자네가 수장으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의 앞이지 않나.”
그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에만 집중하시지요.”
“허, 그래도 되겠나? 내가 전력을 다하면 자네는 검선의 자리를 얻을 수 없을 건데도?”
“오히려 전력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신다면 패배하실 테니까요.”
현천검이 시선을 앉아 있던 다섯에게 시선을 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게 패배한다면 어떤 말이 나돌겠습니까?”
도발 같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하지만 흔들리고 있던 현천검에게는 충분한 기폭제였다. 입으로는 대련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대련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이유를 찾고 있는 그였으니까.
검집에 반쯤 가려진 흑건. 그 검파를 쥔 현천검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력을 감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춘다면 어제 대련의 연장선이 될 뿐이니까요.”
“그렇게 하겠네. 대신, 자네가 패배하는 그 순간이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기권을 외칠 걸세. 검선의 이름을 가질 생각은 없으니.”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그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 빠르게 대련을 진행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게.”
그가 망설임을 끝내고 허락의 말을 뱉어낸 그 순간. 나의 오른발이 땅바닥을 밟아내며 신형을 전방으로 쏘아 보냈다.
이 대련에서 모든 것을 보여줄 생각은 없지만, 숨기고 있던 것의 일정 부분은 꺼낼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정파의 온순한 검과는 달리 거칠며 난잡하고, 꽤 오래 꺼내지 않아 녹슨 부분이 있겠지만. 너무나도 몸에 익었기에 펼쳐내는 데 문제는 없었다.
“후.”
단 한 번의 호흡에 단전에서부터 끌려 올라오는 내기. 전신의 기혈을 채워내 몸에 활기를 불어넣고, 검에는 강기를 그려냈다.
서로의 거리는 어제와 같이 세 발짝. 공격하기 위해서는 조금 먼 거리지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두 발. 왼발이 땅바닥을 밟아내는 순간, 길었던 간격이 줄어들면서 현천검의 몸에 공격이 닿을 거리를 만들어냈다.
서로의 간격이 겹치는 그 순간을 현천검도 놓치지 않았다.
뛰어 들어오는 나를 향해 흑건이 빠르게 움직였지만, 첫수를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꺼내어들 검은 선공을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검이었으니.
빠르게 움직인 몸을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가면서 오른손은 최대한 등 뒤로 당겼다. 그리고, 가장 빠른 직선을 그리며 그의 얼굴을 향해 왼손을 뻗어냈다.
“음.”
이미 휘둘러지고 있는 흑건은 늦지 않고 나의 왼팔을 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천검은 흑건을 끝까지 휘두를 수 없었다.
나를 상하게 만들기 싫다는 생각 때문도 있겠지만, 왼손을 베어내는 데 시간이 걸려 뒤로 당겨진 내 오른손의 검이 찔러 들어온다면.
변수가 생기겠지. 어쩌면 왼팔을 베어낸 것과 같은 손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지금껏 안전한 수를 계속해서 던져왔던 그의 성격을 파악해 던진 수에, 현천검은 지금껏 해왔던 것과 같이 뒤로 물러서 주었다.
꽤 큰 도박이었지만, 얻어낸 것은 많았다.
그가 전력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성향은 변하지 않아 어제와 같이 안정적으로 대련을 운영한다는 것. 서로 손해를 입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자신이 조금의 손해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안정적인 결과를 내는 선택지를 고른다는 것. 빠른 속도의 교전에도 익숙하다는 것.
“후.”
다시 한 호흡. 멈출 필요는 없었다. 한 번이라도 멈추어 현천검이 대련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그가 쌓아온 세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주변에서 흔들리고 있는 기운들. 그것들이 흑건에 쌓여 올려진다면 이겨낼 방법이 없었으니까.
뻗어냈던 왼손을 회수하면서 오른발을 뻗어내 간격을 맞추고, 뒤로 당겼던 검을 전력으로 찔러냈다.
현천검은 쇄도하는 칼에 흑건을 맞찌르려 했다. 알만했다. 경력이 담긴 검봉이 서로 맞물린다면, 내 전진은 멈출 수밖에 없을 터. 변수를배제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겠지.
그러니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입을 열고 호흡을 들이마신 후, 숨을 뱉어내지 않고 억지로 숨을 멈추었다.
숨을 멈춘 동시에, 단전에서부터 몸의 끝에까지 펴져 있는 기혈을 조정하여 움직이는 내기를 억지로 멈췄다.
흐르던 내공이 순간적으로 끊어지자, 둔기로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입에서는 제어할 수 없는 신음이 튀어 나갔다.
“윽.”
아득해지며 흐려지려는 의식을 이를 악물어 다잡은 후, 그 짧은 순간에 앞으로 나아가던 검을 회수했다.
원래라면 기혈이 움직이는 것과 완전하게 반대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몸의 근육을 포함해서 내기의 방향까지 역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기에. 너무나도 큰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검을 회수하려는 그 순간, 몸을 흐르던 기운을 멈추어 놓았기에. 억지로 기운의 흐름을 틀어내지 않아, 내상은 최소화되었다.
몸의 전반적인 기혈과 근육에 손상은 피할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이는 데 문제는 없었다.
손상이 반복된다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겠지만,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을 테니 지금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다가오는 흑건의 아래로, 몸을 깊숙하게 숙이면서 검 끝을 치켜올렸다.
절대로 예상할 수 없는 검과 몸의 움직임에 현천검의 검이 잠깐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그의 몸에 밴 많은 경험이 그의 검을 움직였다.
숙이는 나를 향해서, 가장 간단하게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검을 떨어뜨리는 것. 검면이 하늘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검이 찔러지고 있었기에 아래로 내려친다고 살상력이 있지는 않겠지만 검강이 쌓여있는 검은 그 자체로 둔기에 필적하는 무기였으니.
예상하지 못한 전진을 막아내기 위해서, 흑건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내가 했던 것처럼 기운을 멈추고 방향을 돌린 것은 아니었기에, 현천검이 조정하고 있던 기운들이 흔들리고 그의 검에 피어난 검강도 그 흐름을 멈춘 상태라 속도가 빠를 수 없었다.
몸을 조금 틀면 흑건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피해서는 안 되었다. 전진하는 방향을 틀어내면 느려질 테니까. 피하지 않고 몸을 더 빠르게 밀어 넣어야 했다.
어차피, 이 한수로 끝내야 했다. 그러니 검을 잡는 데 사용하지 않은 왼 어깨는 내어주겠다. 대신, 나는 그의 목을 취할 것이다.
고통을 예상하면서 현천검의 목을 향해 검을 뻗어내는 그 순간. 흑건은 나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다 멈췄다. 나도 그의 움직임에 맞춰, 적일을 끝까지 찔러지지 않고 그의 목 앞에서 멈췄다.
장내를 정리하는 한 번의 호흡. 그리고 자신이 읽어내지 못한 상황을 읽어내기 위한 두 번째 호흡.
모든 상황을 읽었음에도 풀리지 않은 것이 있었는지, 현천검은 입을 열어내 내게 물어왔다.
“어떻게 그렇게 움직인 것인가? 온몸을 강화하고 검강까지 뽑아 들었으니, 흐름을 거슬러 움직이려면 큰 내상을 입어야 할 텐데.”
* * *
“의지를 세워 기혈을 흐르는 기운을 강제로 멈추었습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움직임에 대한 질문. 답하지 않아도 충분했지만, 답을 감추지 않았다.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할 수 없을 테니까.
“미쳤군. 미쳤어.”
현천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미친 짓을. 자칫 잘못한다면 흐르던 기운이 기혈을 공격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지 않았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무당에서 만들어내었던 검을 보여준다면 이렇게 곡예에 가까운 위험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이 자리에서 펼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앉아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면면이 보였다.
나를 걱정하는 듯 바라보는 셋. 면사에 가려져서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하나. 그리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반짝거리는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하나. 승냥이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 상황에서 만들어낸 검의 뼈대를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도 멍청한 행동이었다.
거기다 저기 앉아 있는 경정에게 이런 위태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생각도 있었다. 지금 상황이 맹주의 귀에 들어간다면 내가 전장으로 나가는 것을 절대로 막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