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검성 0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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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검성
07
말하는토템
역천검성 07권
차례
제32장. 진창 속, 각자의 길. - 2
제33장. 막간―정리.
제34장. 형산.
제35장. 거래와 타협.
제36장. 검선, 선정. - 1
역천검성 07권
제32장. 진창 속, 각자의 길. - 2
황보정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호위를 향했다. 호위는 그런 그녀를 마주할 수 없었는지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런 호위의 모습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황보정연은 호위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 그녀의 가족들은 전부 황보 세가의 가주 아래에 있으니. 황보 세가의 소가주인 권룡이 협박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호위에게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다. 호위를 단속하고 훈계하는 것은 나중에 하면 된다. 지금은 권룡이 꺼낸 문제를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권룡께서… 어떻게 아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합니까? 왜 그 제안을 받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이지요.”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지요.”
“일검, 그가 제안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권룡의 채근에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꺼냈다.
“자신이 맹주와 대립할 때 힘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일검의 힘이 필요하다고 한들, 어찌 맹주와의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겠―”
“받았어야지요.”
황보정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룡의 입이 열렸다.
그의 말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여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예?”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황보 세가가 영원히 맹주와 함께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가주님께서 그 제안을 받았다면 망설이지도 않으셨을 겁니다.”
권룡의 입에서는 그 자신이 언급조차 꺼려하는 제 아비와 똑 닮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오히려 그녀를 당혹으로 밀어 넣었다.
황보정연이 조금이라도 평정을 찾은 상황이었다면 굳은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을 보았을 터.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땅에 박혀 있었다.
“모용세가는 어차피 오대 세가에 들지도 못하는 곳. 하물며 맹주직이 명예는 드높다 한들, 가주직과는 달리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제한되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황보 세가의 가주와 똑 닮은 권룡의 말에 황보정연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뭐, 어떻게 되었든. 저는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전부 가주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권룡 잠시만 기다려…….”
“그러면, 다음에는 남궁세가가 아닌 황보 세가에서 볼 수도 있겠군요.”
권룡은 말허리를 잘라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곤,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한 것을 확인한 권룡이 입술을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황보정연에게 말했다.
‘남궁현성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면 가장 먼저 당신과 당신 아들을 쳐낼 테니까.’
그 순간, 가만히 권룡의 얼굴을 바라보던 황보정연의 얼굴에 망설임이 생겼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망설임은 여러 번 그 형상을 바꾸어 결국, 하나의 형태를 잡았다.
권룡이 나가기 위해서 문지방을 넘은 순간.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망설임은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들어찬 것은 독기.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미 후계자 선정은 끝났습니다. 곧 정식으로 남궁현성이 소가주직에 오르겠지요.”
잠깐 이어지는 침묵.
그 침묵에서 권룡은 이상한 낌새를 읽어냈다.
“설마.”
“한 가지, 모든 것을 되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만.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꺼내는 순간…….”
권룡은 듣지 않고 문지방을 넘으려 했지만, 황보정연의 입은 권룡이 홀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죽이면 됩니다.”
권룡은 한숨을 내쉬면서 문을 닫았다. 이미 들어버린 이상, 여기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밖으로 흘러나가서는 안 된다.
“……정말로 선을 넘으실 생각입니까? 인륜을 저버리는 겁니다.”
“어머니.”
제 어미를 입에 담은 남궁명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이대로 밀려나게 되면 이 남궁세가에 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 그렇게까지 해서 가주직에 앉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그가 천성이 선한 것인지 혹은 그저 당면한 상황이 두려운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반대를 입에 담으려 했으나, 황보정연의 말에 가로막혔다.
“내 말을 듣거라. 이대로 물러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않으냐.”
“그렇다고 한들, 같은 남궁 성씨를 가진 이를 죽이는 것은…….”
“그러면 너는 가만히 있거라. 모든 것은 내가 할 테니.”
“어머니.”
말리는 자식마저 냉정히 내친 그녀가, 권룡에게 시선을 돌렸다.
권룡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엮이는 순간, 남궁세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황보 세가가 남궁세가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하는 것으로 비칠 테니까요. 그러면 세가끼리의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황보정연의 시선이 돌아가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남궁현성을 지지하는 외당과 상단은 가문의 내부에 사람을 많이 두지 않으니까요. 거기다.”
황보정연이 행동을 취하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결연히 외쳤다.
“가주도 곧 세가를 떠날 겁니다. 그러니, 기회가 생길 겁니다.”
* * *
정문으로도, 후문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기에, 남궁세가의 담을 타고 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남궁세가의 주변은 사람이 넘을 수 없도록 키보다 높은 매끈한 담벼락이 있었지만, 넘어갈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담을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야 했다. 담을 넘었을 때, 경계를 서는 적에게 위치가 발각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넘어간 순간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남궁세가를 점거한 놈들의 목표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내가 남궁세가를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테니까.
남궁세가의 주변을 돌아, 적의 기척이 가장 멀리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 담을 넘어가자, 시야에는 수십 개의 가마솥으로 가득했다. 원래라면 저녁을 짓는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곳이지만,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밖으로 미리 빼놓은 것인가.
이 모습 하나로,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가문 내부에 있는 무예를 익히지 않은 이들을 미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 남궁세가에서 그것이 가능한 것은 내당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는, 황보정연 뿐이었다.
주동자가 확실하게 드러나자 일련의 사건이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그녀가 굳이 오늘, 남궁세가에서 병력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 남궁현성.
그를 최대한 빠르게 찾아야 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담과 담을 타 넘어 움직인 곳은 내가 머물던 곳.
남궁현성은 아마도 내게 가장 먼저 결과를 알려주려고 했을 테니 이곳으로 왔을 터. 이곳에 갇혔다면, 방진을 짜고 적을 막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대한 빨리 도움을 주기 위해 빠르게 담을 넘었지만, 담 너머에는 전투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찾던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내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남겼을 수도 있으니,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부서진 가구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방의 한구석에 남궁현성의 호위가, 상처를 입은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자네.”
“일검 대협. 윽.”
나를 본 순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를 다쳤는지 일어나지 못한 채 땅바닥을 짚고 있었다.
“일어나지 말게, 상처가 덧나.”
나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작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급소를 비켜나가 제대로 치료받기만 한다면 문제가 없을 정도의 상처.
죽이려고 했다면 죽일 수 있었겠지만, 같은 세가의 무인이니 손속에 인정을 둔 것처럼 보였다.
“주동자는 남궁명이오?”
“예.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보정연과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이 일선에 서서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나 되었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가주님께서 떠나고 난 이후에 급습한 것이니까요.”
“남궁현성은?”
상황이 급박하여 존칭을 붙이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내 말에 호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에서 공격받아 급히 피신하신 이후에는 어디로 가셨는지는 모릅니다.”
“적의 병력은?”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로원에 소속된 장로 한 분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경지는.”
“화경, 그 이상입니다.”
일단 머릿속에 그 정보를 집어넣은 채, 가장 중요한 것을 질문했다.
“가주께서는 어디로?”
“황산으로 가셨습니다.”
“황산? 지금 이 시기에 말이오?”
“예.”
알아보아야 할 것은 많았지만, 호위는 초반에 전장에서 이탈했으니 더 자세한 사항을 묻는다고 필요한 정보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빨리 움직여 남궁현성을 찾아야 했다.
“남궁현성이 있을 만한 곳은 어딥니까?”
“공자님께서는 머무시는 곳으로는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곳은 이곳에서 반대편에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주변에서 농성하기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그곳이 어딥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폐관 수련하기 위한 수련동으로 가셨을 겁니다.”
수련동.
대부분의 가문이나 문파에서 가장 내부에 있기도 하고, 수련하는 이들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주변을 단단한 벽으로 막아둔 채, 들어가는 입구도 하나로 만들어지는. 세가나 문파에서 가장 방어적으로 지어진 건물.
남궁세가의 수련동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것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여기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호위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내가 온 방향의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저쪽입니다.”
가야할 방향이 정해졌으니,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킨 뒤 바닥을 박찼다.
* * *
건물 밖으로 나온 순간, 기운이 밖으로 퍼지지 않도록 숨긴 채 길게 떨어지는 담벼락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내가 이곳에 없었다는 정보와 밖으로 나갔다는 문지기들의 정보를 취합했을 테니, 남궁세가의 내부에 들어와서 헤집고 다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방심을 파고들어 급소에 일격을 가할 수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의 시선을 피해, 담을 타고 뛰어다니면서 최대한 직선으로.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호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남궁현성이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최대한 빨리 그에게 도착해야 할 터.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는지, 철이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이 지르는 고성이 점점 선명해졌다.
“밀…….”
“……막아라!”
“어떻…! 뚫……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