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천검성 0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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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검성
06
말하는토템
역천검성 06권
차례
제28장. 인정과 이해. - 2
제29장. 밀린 과제.
제30장. 약속.
제31장. 남궁.
제32장. 진창 속, 각자의 길. - 1
역천검성 06권
제28장. 인정과 이해. - 2
마교와 전투해야 했기에 곤륜의 도는 변화했다. 굳건한 성벽과 같이, 단단하고도 압도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래야만 마기와 겨루었을 때 이겨낼 수 있었다. 일반적인 기운은 마기에 잠식당했으니까.
그래서 곤륜의 도는 자신과 세계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자신의 소우주를 통해 세계를 인식했다. 그렇게 세계의 인식을 자신의 소우주로 하기에, 타인의 기운과 자신의 기운을 확실하게 구분해 냈다. 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러 가지 것을 마구잡이로 익히면,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본질을 잃는 그 순간, 무인들은 자신을 잃고 주화입마에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무공에 입문했을 때부터 쌓아 올린 확고한 소우주 때문에 곤륜의 무인은 어떠한 색으로 물들이더라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곤륜의 무인은 마기에 침식당하더라도, 오랜 후유증을 앓지 않았다. 내가 쌓아낸 것이 아닌 다른 기운은 철저하게 배제했으니까. 그렇기에 마교와 대등하게 싸우며 청해를 오랜 기간 지켜낼 수 있었다.
내가 타 문파의 무공을 익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소우주 때문이었다. 확실한 소우주가 존재했기에 어떠한 것을 섞어내더라도 나의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네는 그 검이 비었다고 여겼고, 나는 왜 그렇게 느끼지 못한 것일까.”
이야기는 스승님이 만든 검으로 넘어왔다. 나는 다시 머릿속을 뒤졌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처음 본 순간 느꼈습니다. 무언가 비어있다는 것을요.”
“검성은 완성한 검이라고 했다고 하지 않았나?”
“스승님께서는 완성한 검이라고 하셨지만, 아무리 보아도 스승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거짓 같습니다.”
“검성이 거짓을 말할 위인은 아닌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비어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비어있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음.”
고민하는 혜검을 내버려 두고, 처음 이 검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 오랜 과거가 아닌데도, 전생의 기억과 섞여서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
나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기에 비어있다고 느낀 것일까.
눈앞에 처음 이 검을 보았던 상황을 그려냈다. 내게 처음으로 검을 보여주시던 스승님. 스승님은 웃고 계셨다. 순간 그리움이 밀려왔지만, 상념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돌려서. 스승님이 검을 펼치는 그 순간을 보아야 했다.
스승님께서 적일을 뽑아내자 조여들 듯, 주변에 있는 기운이 모두 정렬되었다. 그리고 정렬된 기운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자잘하게 층을 만들었다.
오른손에 든 적일이 가볍고도 날카롭게 정면을 찔러내는 그 순간. 검이 기운으로 만들어진 층과 마주하며 여러 진동이 공간을 울려냈다.
검의 목표로 잡았던 나무는 너무 강한 진동 때문인지, 검이 닿기도 전에 부서졌다.
스승님은 뒷머리를 긁으며 내게 말했다.
“조금 더 약하게 펼쳤어야 했는데, 꽤 굵은 나무인데도 이리 쉽게 쓰러질 줄이야.”
그 말을 하고 나를 향해 돌아보는 스승님.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에서 익숙한 말이 튀어나왔다.
“뭐라고 이름을 붙이셨습니까?”
“태허에 태청을 더하니, 하늘과 바다가 보이는구나.”
“스승님. 이 아둔한 제자는 공부가 모자라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디 상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다 만들기는 하였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조금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의뭉스런 물음에 스승님은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기억할 때는 보지 못했던 광경이 짧게 펼쳐졌다.
“그렇게 보이느냐?”
“예? 예. 제 눈에는 그리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눈 속에 내가 비쳤다.
“내가 완성하지 못하였다면, 네가 이어받아 완성하거라.”
“예? 스승님께서 다 만들지 못한 걸 제가 어찌.”
“비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느냐?”
추억에 잠기는 것은 좋지만 여기까지. 회상을 끊어냈다. 스승님께서 검에 대해 말해주신 것은 전부 보았으니까.
말씀해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태허와 태청. 곤륜에서는 그것을 하늘과 바다로 인식한다. 그러니 스승님께서 이 검에 담아낸 것은 하늘과 바다. 하지만 무상이라 하지는 않으셨다.
검으로 그려낸 것은 배경이고, 형태가 있어야 하니. 그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있어야 했다.
“왜 다른 이가 아닌 제게만 보여준 것일까요. 스승님께서 만드신 검이니 곤륜의 서고에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양의신공을 검룡에게만 주려고 했던 것과 비슷한 것 아니겠나. 무당에서 양의신공을 제대로 익혀낼 수 있는 아이는 검룡밖에 없었을 것이니까.”
“그 말씀은.”
“그 검은 자네를 위해서 만들고, 자네에게만 남긴 검이라는 것이 아니겠나.”
그 말에 머릿속으로 튀는 불꽃이 있었다. 스승님께서 내게 남긴 검. 나만이 익힐 수 있는 검. 그리고 하나의 형태로 이루어진 검.
전생에서 이와 비슷한 검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무공들의 정보를 뒤적거렸다. 지금 찾아내야 할 것은 하나였다.
제왕검.
남궁가에서 대대로 가주에게만 내려져 오는 검법. 제왕검과 스승님께서 남겨주신 검은 닮아 있었다. 분명, 하나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지만 변형은 무궁무진했다.
스승님이 내게 주신 검도 그런 것이었다. 검의 형태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내가 그려 나갈 수 있는 검을 주셨다.
“이 검은. 하나의 형태일 뿐이었습니다.”
나의 깨달음. 혜검은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저만이 익힐 수 있는 검이었습니다. 주변을 장악하고, 상대에 맞춰 층을 조절하는 것은 기감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하니까요.”
“그렇겠지. 기감이 뛰어나다고 해도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 층을 느낄 수는 없을 테니.”
“다른 어떤 무인도 불가능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눈으로 보고 있으니 가능합니다.”
“그 눈 때문에. 자네의 눈은 언제나 확실하게 상대방의 기운도, 주변의 기운도 완벽하게 읽어낼 수 있으니까. 적이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으니까.”
“예. 그렇습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습니다. 놓치고 있던 것에 가깝겠지요. ……저만이, 익힐 수 있다는 것을요.”
흥분한 나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리고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여백을 제가 스스로 채워낼 수 있도록. 스승님께서는 비워두신 거였습니다.”
지금은 현경에 오르지 못해 펼쳐 낼 수 없어 주변의 기운을 끌어모아 층으로만 만들어놓았지만, 현경에 닿아 내가 만들어온 소우주로 주변을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펼쳐낸 기운은 그저, 층이 아니라 내가 지배하는 공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내가 휘두르는 검은 어떠한 모습을 그려내야 할까.
“검이 다 채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음 설계부터 비어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구나.”
“예.”
스승님은 내게 이 검에 담긴 것을 강요하고 싶어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숨겨놓으셨겠지. 하지만 내가 이것을 찾아낸다면, 그 자신께서 깨달은 것은 내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그 속에 채워놓고 하나의 검 형태로 만들어내셨다.
내가 이 검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 검에 담겨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로 뭉쳐져 있는 것을 분해한다면 오랫동안 곱씹어내야 할 정도로.
어디서부터 검을 분해해서 해석해야 할까. 생각을 이어 나가던 나를 현실로 끌어내린 것은 혜검의 목소리였다.
“검성이 검을 비워놓은 이유를 알겠다.”
“예?”
“네 눈으로. 보고 익혀온 것으로 그 빈 곳을 채우라는 것 아니겠느냐? 자신의 깨달음으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네가 평생 쌓아온 것을 쌓아 올려 하나의 탑을 세우기를 원했을 것이다.”
아.
그 말에.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 머리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내 눈으로 보고 익혀온 것들. 그것은 스승님이 만든 것과는 달랐다.
내가 순수하게 창작해서 만든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깨달음을 기워낸 것.
그런 것으로 스승님께서 만들어 놓은 검의 여백을 채워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내 망설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검이 목소리가 나의 말을 막아섰다.
“그 검을 보아라. 어떠한 것과도 잘 어울린다는 곤륜의 무공과 같이, 그 검도 어떠한 무공과 잘 어울린다. 푸른 하늘처럼. 또는 푸른 바다처럼. 그 속에 품을 수 있는 것도, 그 위에 띄워낼 수 있는 것도. 너무나도 많지 않으냐.”
“그것은 그렇지만.”
“검성은. 네 스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곤륜만의 깨달음을 가지고 끝까지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랬을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검을 이미 마음속에 품어, 현경에 오른 검수가 자신의 검과 어울리지 않는 무공을 만들었겠느냐?”
“…….”
말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나. 혜검의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네 스승은 너보다 너를 너무나도 깊게 이해하고 있었나보구나.”
그 말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자기 생각과 다른 검을 만들면서까지. 내게,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도와주고자 하신 스승님.
내 생각이 흘러, 스승님의 마지막에 닿았다.
차가운 흰 연무장의 바닥에 누워계셨을 때도. 곤륜이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끝까지 나를 위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내가 복수하길 원하지 않으셨다. 정말로 내가 검을 놓고 떠나길 원하셨을 것이다. 그런 분이셨으니까.
내가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과도 같은 따뜻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주신 분이셨으니까.
그리고 너무나도 뛰어나셨기에, 어쩌면 알고 계셨을지도 몰랐다. 나의 눈이 특별하기 때문에, 내가 복수를 위한 길을 걸으면 내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사문과 스승님의 복수를 위해 걸었던 복수를 위한 길. 하지만 그 길은 스승님께서 보여주었던 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기에 적일을 쥐었어야 했다. 이미 너무나도 달라졌기에 적일을 쥐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었다.
나는 내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를 상징하는, 스승님이 마지막으로 넘겨주셨던 적일을 쥐고 있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번 삶에는 스승님께서 보았던 그 길을. 내가 전생에서 걸었던 그 길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그 길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이번에는 내가 아는 가장 완벽한 사람을 닮고자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가 걸어왔던 길을 잊을 수는 없었다. 후회로 가득하고, 실패했던 길이지만. 그렇다고 전생에서 내가 걸어왔던 모든 것을 잊어낼 수는 없었다. 그 길도 내가 걸었던, 누군가의 목숨으로 연명했던, 길이었으니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과 생각 속에서, 부족했던 계기를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전생에서 내가 익혔던 것을 뒤로하고, 스승님이 남겨주신 것과 함께 새롭게 내가 쌓아갈 검이, 길이 보였다.
스승님께서 남겨준 검 때문에 찾아낸 길. 방향을 찾았으니, 더는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내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혜검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깨달은 것이 있는가?”
“예.”
“나 때문이 아닐세. 나는 그저, 자네의 등을 한 번 밀어주었을 뿐이지. 이미, 자네의 스승이 자네를 위해 안배해 놓은 것을 찾아낸 것은 자네일세.”
“그래도 방금까지 있던 대화가 없었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거듭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혜검은 머쓱한 듯, 손을 내저었다.
“고개를 들게.”
“예.”
내가 고개를 들자, 혜검은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물어왔다.
“그런데 자네는 결국 그 검을 어떻게 만들고 싶은 것인가? 그 검이 비어있는 것은 알았으니 채워 넣어야 하지 않나.”
“제 색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워 넣겠습니다.”
“이미 한 손으로는 검을 펼치고 있지 않나? 자네의 색깔로 채워 넣으려면, 큰 틀을 고쳐내야 할 건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양의를 배운 것이 이렇게 사용될지는 몰랐지만, 그 배움 때문에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채워 낼 것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알려줄 수 있겠나?”
혜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검을 만들면 가장 먼저 소림의 불성 어르신께 보여주겠다고 약조를 해버린 터라. 거기다 아직 머릿속으로 형태만 잡아낸 것이라 아직 펼칠 수 없습니다.”
“그렇군. 아쉽군. 아쉬워.”
“소림에서 불성 어르신을 만나고 난 뒤, 두 번째로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