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회의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캠프 중간에 둥글게 모였다.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제대로 소통도 안 될 텐데. 어떡하려고 하나 봤더니 숲에서 나뭇가지를 주워 와 바닥에 글씨를 쓰며 대화를 이어 갔다.
긴 회의 끝, 회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 근처에 악마들의 본거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이 숲에 들어온 순간부터 소리가 사라졌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이 숲을 벗어날 수 없었다.
숲에는 식량으로 삼을 나무 열매나 식수가 풍부했다. 선발대는 계속 이곳에 머물며 숲을 수색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강유진은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강경한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람들은 2인 1조로 쪼개어 다시 한번 숲을 샅샅이 뒤져 보기로 했다.
‘강우가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짝을 나눌 차례가 되자 지우는 당연하다는 듯 강우에게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에 강우의 옆에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저, 저기…….’
‘?’
‘저랑 같은 조 하지 않으실래요?’
제대로 입 모양을 읽지는 못했지만 딱 그런 분위기였다. 심지어 강우를 올려다보며 볼을 발갛게 달구는 게 꼭 사랑에 빠진 수줍은 소녀의 얼굴이었다.
만약 그녀가 붙잡은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우도 즐겁게 소녀의 짝사랑을 응원해 주었을 테지만.
‘강우는 안 돼! 절대 안 돼!’
슬며시 강우의 옷깃을 붙잡는 꼴을 보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아무리 어린 과거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강우는 강우였다. 그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강우야! 강우야!’
지우는 열심히 강우를 외치며 두 사람에게 빠르게 뛰어갔다.
혹시나 강우가 오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겁이 나서, 열심히 뛰어 강우의 반대쪽 팔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탁.
강우가 저를 잡고 있는 오나라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곤 붙잡혔던 옷깃을 탁탁 털어 정리하는데, 그게 벌레를 쫓듯 무심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쾌한 듯 보였다.
뛰어가던 지우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아, 잊고 있었다.’
원래 강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사나운 길고양이.
지우가 마음을 활짝 열고 부딪쳐서 겨우겨우 가까워진 까칠한 남자.
친해지기 전까진 그런 강우 때문에 조금 서운한 적도 있었는데 막상 이런 순간이 오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강우는 자연스럽게 지우의 손을 붙잡았다. 그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하며, 지우는 흘끔 오나라를 쳐다보았다.
민망한 듯 손목을 문지르는 그녀와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오나라는 금방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강우는 지우와 함께 숲의 북쪽을 수색하기로 했다.
분명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포르르 날아다녔지만, 소리는커녕 이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계속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 같아.’
어떻게 선발대는 며칠씩이나 이 소름 끼치는 고요함을 견딘 걸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 답답한 걸 넘어 뇌까지 잘못되는 것 같았다.
‘잉어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요~♪ 붕어를 잡으러 계곡에 갈까요~♬’
노래를 불러도 제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은 되었다.
난 소풍을 온 거다. 강우랑 같이 나들이를 온 거다. 그냥 귀에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이어폰을 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울렁거리던 속이 금방 진정되었다.
강우도 지금쯤 나처럼 힘들어하진 않을까.
걱정이 된 지우는 새롭게 알게 된 꿀팁을 전해 주기 위해서 강우의 손등을 두드려 신호를 건넸다.
그런데 뭐라고 입을 뻐끔거리기도 전이었다.
타다닥!
갑자기 강우가 지우의 팔을 잡아끌며 미친 듯이 뛰었다.
‘뭐야? 왜? 왜?’
영문도 모르고 강우를 따라 뛰던 지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검은 그림자처럼 온몸이 새까만 괴물들이 자신들을 향해 맹렬히 쫓아오는 걸 발견했다.
‘흐아아아아아아악!’
지우가 내지른 비명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괴물들은 검은 연기처럼 허공에서 나타났고, 피처럼 붉은 눈을 번뜩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온몸은 기괴하게 관절이 뒤틀어진 채, 앞으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뻗고 두 사람을 쫓아왔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사방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왔다. 처음엔 싸우려고 했지만 벌떼처럼 새까맣게 달려드는 놈들 때문에 그만 의지가 꺾여 버렸다.
거기다 피부를 뒤덮은 수포가 얼마나 징그럽게 생겼는지 약간이라도 스쳤다간 바로 피부병에 걸릴 것만 같았다.
한참 숲속 어딘가를 가로질러 뛰었지만 다른 조를 만나지도 못했고 숨을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여긴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없나? 계단 아래로 도망치면 앤트맨들이 도와줄 텐데.’
정신없이 쫓기던 지우는 문득 지하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전 새롭게 활성화되었던 시스템을 생각해 냈다.
‘맞다, 마이룸! 마이룸 입장!’
그러자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외의 타인은 마이룸에 입장할 수 없습니다.]
‘마, 맞다! 마이룸은 전용 공간이지?’
이 위험한 곳에 강우만 남겨 둘 수는 없었다. 이걸 어떡하지, 정말 여기서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차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강우를 파트너로 등록하시겠습니까?]
‘파, 파트너?’
파트너는 파티에서 조금 더 심화된 기능으로 다른 플레이어와 1대 1로만 맺을 수 있는 사교 시스템이었다.
한번 등록하고 나면 캐릭터를 삭제할 때까지 절대 해제할 수 없는 극악의 시스템이라 〈그랜드라이즈〉에서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기능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지우 또한 단 한 번도 이용해 본 적이 없는 시스템이었지만…….
‘지금 물불 따질 때냐? 파트너 지정! 파트너와 함께 마이룸 이동!’
“정말, 정말 내 마이룸이잖아……?”
감격 그 자체였다. 입을 틀어막은 지우가 별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따뜻한 톤의 나무 바닥과 벽지,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벽난로.
커다란 통창 너머로 보이는 수영장과 새싹이 푸릇한 정원.
푹신한 침대가 놓인 침실과 각종 스크롤과 서적을 모아 놓은 서재, 값비싼 보물들을 수집해 둔 창고까지.
모든 것들이 기억 속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으흐흐, 이 보물들을 가져다가 팔 수만 있다면 난 억만장자가 될 텐데.’
지우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화를 보며 음습한 미소를 지었다.
마이룸은 지우가 심혈을 들여 가꿔 온 공간이었다.
벽난로 위에는 지우가 게임 속에서 모아 온 다양한 트로피와 장식품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랜드라이즈 제3회 마이룸 인테리어 콘테스트 최우수상〉
“그랜드라이즈가 아까 말한 그 게임이야?”
강우가 트로피를 유심히 살피며 겉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시간이 없어서 강우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진 못했다.
그저 지우가 예전에 플레이한 게임이 지금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딱 그 하나만 말해 주었을 뿐이었다.
부실한 설명이라 강우가 제대로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 또한 지금 이 상황이 떨떠름할 뿐이니까.
그러나 강우는 진지하게 지우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의견까지 내놓았다.
“시스템이 각성자의 과거 행적과 연관된 능력을 부여한다는 논문을 읽은 적 있어.”
이를테면 몸을 많이 쓰는 운동선수는 다른 일반인보다 딜러 계열로 각성할 확률이 높고 병원에서 일하던 의료인은 힐러로 각성할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는 식이었다.
“아무튼 그 〈그랜드라이즈〉라는 게임이 보통 게임은 아닌가 보네. 지구로 돌아가면 제작사에 대해서 파 볼 가치가 있겠어.”
강우는 열의를 불태우며 집안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지우는 그런 강우를 지켜보며 내심 안도했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로 강우는 말수도 줄어들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짚이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어쩌면 강우도 이곳에 살고 있을 가족들이 보고 싶은 걸지도 몰라.’
지우는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우도 저항군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강우도 이곳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을까.
강우의 부모님은 강우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구에선 두 번 다시 부모님을 볼 수 없겠지만 이곳에서는 도플갱어라는 존재로 멀리서라도 만나 볼 기회가 있다.
‘만약 나라면… 진짜 엄마 아빠가 아니더라도 꼭 다시 만나 보고 싶을 것 같아.’
엄밀하게 따지면 다른 존재라고 해도, 그래도 늘 기억 속에 그리던 부모님을 볼 수 있으니까.
강우에게 이번 임무가 끝나고 돌아가면 부모님을 수소문해 보자고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지우는 바깥의 정원까지 나간 강우를 찾으러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어? 이게 뭐지?’
거실 바닥에 아까는 눈치채지 못했던 이상한 자국이 보였다.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앙증맞은 물갈퀴 자국이.
이 정도 물갈퀴 사이즈라면, 그리고 마이룸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존재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이건 동식이?”
지우는 바로 발자국을 추적했다.
흙으로 남겨진 자국은 현관을 넘어 집 바깥으로 이어져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자 수영장 앞에 서 있는 강우와 일렬로 자리한 선베드가 보였다.
“강우야, 혹시 여기 동식이 봤…….”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강우가 한 손으로 동식이의 목덜미를 잡고 허공으로 달랑 들어 올렸다.
붙잡힌 동식이가 날갯죽지를 흔들며 이리저리 난동을 부렸다.
─ 당장 이거 놔락! 이 끔찍하게 못된 인간악!
“어머, 강우야! 동식아!”
달려간 지우가 동식이를 받아 품속에 껴안았다.
─ 주이이인! 지금 봤냑? 이 간악한 인간이 또 나를 수영장에 집어 던지려고 했닥!
“정말이야, 강우?”
강우는 얼굴빛 한번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동식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가리켰다.
“아니, 그럴 리가. 깃털이 너무 꼬질꼬질해서 직접 씻겨 주려고 한 것뿐이야.”
─ 거짓말이닥!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닥! 주인도 저놈이 이 동식 님을 이렇게 대롱대롱 드는 거 봤지 않냑!
“원래 야생 동물은 그렇게 목덜미를 잡고 옮기는 거잖아. 난 위생상 그렇게 잡았을 뿐이야.”
─ 감히 이 고귀한 몸을 야생 동물과 비교하다니익! 이거 놔락, 오늘 저놈과 결판을 봐야겠닥!
노란 부리에서 얼음 결정이 파사삭 튀겼다. 생떼를 부리는 모습이 한 대 콩 쥐어박고 싶기도 하다가, 또 오동통 살이 오른 아기 동식이의 볼이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동식아,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소환 스킬을 써도 나타나지도 않고.”
한국에 도착한 이후로 여러 번 펫 소환 스킬을 사용했지만, 그때마다 ‘펫이 응답하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만 뜰 뿐이었다.
그래서 동식이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너 팔자 좋다? 응? 우리는 고생하고 있는데 여기서 혼자 먹고 놀고 있고 말이야.”
유리잔에 담긴 오렌지주스.
긴 비치 타월과 새까만 선글라스.
거기에 동물 사진이 잔뜩 나오는 컬러 잡지까지.
보아하니 선베드에 누워 하루 종일 빈둥대고 있었을 게 뻔했다.
그동안 동식이가 굶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걔가 얼음을 다스리는 귀한 아델리 종족이라는데 어디 잡혀서 고생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걱정했는데. 지난 시간이 억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식이는 부리를 파르르 떨며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