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CHAPTER 1
하늘이 유독 맑고 푸르렀던 봄.
그날은 고등학교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강당 내에는 설렘과 긴장에 들뜬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떠나보내는 교직원들, 그리고 학생들의 부모님이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강우는 유독 눈에 띄는 존재였다. 대운 그룹의 후계자, 최연소 각성자, 물리계 S급 딜러 등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그도 일단은 학생이었다.
교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앉아 있었지만 유독 새까만 머리카락과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외모는 모든 이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저, 저기……! 졸업 축하해!”
“졸업 축하드려요, 선배님!”
“이거 받아, 강우야. 저 뒤에 있는 남자애가 너 주라더라.”
아직 졸업식이 시작하기도 전이건만, 강우는 산더미처럼 쌓인 꽃다발을 품에 안게 됐다.
‘할아버지는… 아, 저기에.’
학부모 등 외부 방문객들은 강당의 2층에서 졸업식을 참관할 수 있었다.
월등한 시력은 인파 속에 섞여 있는 할아버지와 그의 경호원들을 단숨에 찾아냈다. 사람들이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탓에 단번에 눈에 띄었다.
사랑하는 손자 강우의 고등학교 졸업식에 서 회장도 친히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비록 다른 학생들처럼 졸업식에 부모님이 오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두 분은 하늘에서 함께 축하해 주실 테니까.
할아버지에게 작게 손을 흔든 강우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졸업식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3학년 제자들. 그동안 너희들과 함께해서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조명이 꺼진 강당.
어둠 속에서 방송부에서 제작했다는 졸업 축하 영상이 흘러나왔다. 마음 여린 아이들은 눈물을 보였고 어떤 학생들은 그런 마음을 숨기려고 일부러 장난을 쳐 댔다.
마지막으로 화면에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나올 때였다. 집중해서 축하 영상을 보고 있던 강우는 아주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이게… 뭐지?’
붉은 눈동자가 주변을 기민하게 훑었다. 예민한 감각에 경고 등이 켜졌다.
살기를 알아챈 건 강우뿐이었다.
각성자 테스트 중, 몬스터를 맞닥뜨렸을 때 그것들이 뿜어내던 살기. 공기 중에 그 기운이 넓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불쾌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린 강우는 할아버지를 돌아봤다가,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을 쳐다봤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해.’
이곳에서 곧 살육이 벌어질 거라는 것. 그건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뒤늦게 각성자 출신 경호원이 서 회장에게 귀엣말을 하는 게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인근의 헌터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올 테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일어서서 위험하다 소리쳐 봤자 사람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판단을 내린 강우는 고민 없이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러고는.
드드드드드드득.
제대로 설 수 없을 만큼 강한 지진이 땅을 뒤흔들었다. 강우가 제 기운을 퍼뜨려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지진이었다.
어두운 강당 내부가 비명으로 가득 찼다. 가족들은 각자 제 아이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고, 선생님 몇 분이 입구를 열어젖히며 학생들을 대피시켰다.
“여러분, 운동장 중앙으로! 어서 나오세요!”
“줄 서서 나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2층에 계신 분들도! 애들은 저희가 챙길 테니 걱정 말고 어서 대피하세요!”
사람들은 앞다투어 강당을 빠져나갔다. 북적거리던 강당이 휑하게 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우는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살피다가 마지막쯤에 무리에 섞였다.
투명한 유리문 밖, 저 멀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강당으로 뛰어들 것 같은 서 회장을 주변의 경호원들이 겨우 뜯어말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참.’
김 비서님이 회장으로서의 체면 좀 지켜 달라 그렇게 부탁하시던데. 저래서는 체면이고 뭐고 다 틀려먹었다.
씩 웃은 강우는 강당 밖으로 발을 디뎠다. 계단을 하나둘 내려가던 찰나였다.
“아, 민정 엄마. 이것 좀 놔 봐! 안에 지갑 두고 왔어.”
“좀 이따 괜찮아지면 들어가요!”
“아니, 이 사람이! 그사이에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하려고 그래? 거기 든 게 얼마인데.”
남자는 빨리 다녀오면 된다고 말리는 아내를 떼어 냈다.
“그리고 건물이란 게 그렇게 쉽게 안 무너져. 유난이야, 유난은. 쯧.”
지진이 멈추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눈치를 보다 하나둘, 강당 안의 짐을 챙기러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후우…….”
계단을 내려가던 강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강우는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 쿵. 가벼운 발 구르기 한 번으로 땅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두꺼운 시멘트 바닥이 실험 모형처럼 정교하게 갈라졌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진 땅에서 멀찍이 물러났다.
그제야 만족한 강우도 균열을 건너 운동장으로 가려는 때였다.
기괴한 악몽처럼, 강당이 자리했던 공간을 삼키며 게이트가 소리 없이 열렸다.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달랐다. 평소처럼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 했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올 만한 것이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몬스터.’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스쳤다.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도 있나?’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였지만 강우는 제 직감을 더 믿었다. 당장이라도 공간을 찢고 나올 듯 소름 끼치는 포효가 울렸기에.
인근의 헌터들이 출동하는 데에는 적어도 10분.
여기서 몬스터들이 터져 나온다면 그때까지 이 수많은 사람을 보호하며 혼자 싸울 수 있을까?
한정된 공간이었다면 몰라도 탁 트인 공간은 오히려 강우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터였다.
결정의 순간은 짧았다. 강우는 빠르게 움직여 스스로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강우의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던전의 스타팅 포인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었다.
운동장 근처에 만들어진 게이트였기 때문에 던전의 내부는 학교의 운동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곧바로 넓은 공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검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졸업식 가는데 검을 가지고 가는 미친놈이 어디 있을까.
다행히 들어온 던전은 강우 혼자 정리할 수 있는 C급 난이도의 던전이었다.
좋은 날, 단정한 교복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퍽.
돌멩이 하나를 잡고 신체에 넘쳐흐르는 기운을 불어넣었다. 세게 던지자 주둥이를 벌리고 덤벼들던 몬스터가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졌다.
그다음, 다음 몬스터도 똑같은 최후를 맞았다.
강우는 던전의 몬스터들을 가지고 놀며 여유롭게 전투를 즐겼다.
한 시간쯤 지나자, 던전 내의 몬스터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제 밖으로 돌아가면 지금쯤 저를 걱정하고 있을 할아버지를 달래고, 졸업장 수여식이 다시 이어지면 되겠다고 강우는 생각했다.
던전에 혼자 남은 강우는 곧 열릴 출구를, 그리고 저를 찾아올 구조팀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출구는커녕 어떠한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공터를 가득 메운 몬스터의 사체 위에서 강우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한나절,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을 때. 강우는 인정해야만 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그때부터 강우는 던전을 파헤치고 다니며 출구를 찾았다. 도저히 존재할 리가 없을 만한 곳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성과는 없었다. 살펴볼 만한 곳은 전부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곳은…….
‘하늘.’
맑고 푸르른 하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추론이었지만 지금 어느 하나도 상식적인 것이 없었다. 강우는 공터에 널린 돌멩이를 쥐고 하늘에 집어 던졌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돌멩이는 점처럼 보일 만큼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러곤 한참을 기다려도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강우는 선택해야 했다. 이곳에 남아 기약 없는 구조팀을 기다리거나 혹은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몸을 던지거나.
강우가 택한 것은 후자였다.
‘벌써 4일이나 지났어. 구조대가 올 거라면 진작 왔겠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지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더 버티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그땐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기대를 걸어 볼 만한 건 하늘 위의 공간뿐이었다. 강우는 옆에 있던 가장 높은 키의 나무를 타고 올랐고, 발을 굴러 허공으로 도약했다.
연결된 공간은 혼돈 그 자체였다. 휘몰아치는 에너지 속에서 강우는 의식을 잃고 어디론가 흘러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강우는 얼굴에 닿는 차가운 촉감에 정신을 차렸다.
‘…눈?’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연기와 재를 만나 회색빛으로 변했다.
강우는 파괴된 도시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주변은 폐허와 같았고, 뒤틀린 철골과 파괴된 건물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던전과 연결된 공간을 발견했을 때, 강우는 새로운 출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다시 익숙한 곳으로,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현실적인 상황에 눈만 껌뻑이고 있을 때였다.
크르르르르르.
몬스터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먼 곳에서 시작된 소리는 갈수록 점점 크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주저 없이 맞서 싸울 테지만, 이번엔 본능이 강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사방을 더 둘러볼 여유도 없이 강우는 발길이 닿는 대로 달렸다. 무너진 건물과 달리 구획별로 길게 그어진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만 새까만 구체가 도로 곳곳에 박혀 있었는데, 달리 피할 길이 없었던 강우는 그 구체 위를 밟으며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동안 쫓아오는 몬스터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팔이 4개나 달린, 거대한 몸집의 시커먼 괴물. 보기보다 따라오는 속도가 빨랐고 심지어는 지치지도 않았다.
이대로 도시를 벗어난다고 해도 괴물들은 강우를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차라리 한두 마리였을 때 상대해야 했었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미친 새끼, 뒤질 거면 혼자 뒤지라고!”
어디선가 빠져나온 팔이 강우를 끌어당겼다. 건물 틈 사이에 한 남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강우를 붙잡은 그대로 바닥에 있는 철문을 열었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 지하 계단으로 강우를 밀어 넣고 자신도 따라 들어왔다.
쿵. 쿵. 쿵.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이 시끄럽게 울렸다.
한동안 주변을 맴돌던 괴물들이 먹잇감을 포기하고 사라졌을 때, 환한 랜턴 조명이 강우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너, 이방인이구나.”
낯선 중년의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강우를 구해 준 남자의 이름은 에릭.
에릭은 강우에게 이 세계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려 주었다.
가령, 이 세계가 강우가 살고 있는 ‘지구’와 동일한 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
“쌍둥이 지구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전반적으로는 복제품처럼 똑같은데, 몇몇 부분은 또 다르고 그런 거지. 아마 비행기 타고 나가면 여기 어딘가에 네가 살던 한국도 있을걸?”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캐나다 출신이었다. 갑자기 이계에 떨어진 강우처럼, 그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던전에서 이계로 빨려 들어왔다고 했다.
뜬금없게도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한국도 캐나다도 아닌, 북유럽의 섬 아이슬란드였다.
“여기서 나고 자란 노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한 5년쯤 전에 악마가 침공해서 세상이 멸망했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뭐, 미친 노인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에릭은 강우에게 꽤나 친절했다.
캐나다에 강우 또래의 아들을 두고 있다면서 식량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하루는 섬의 지도를 구해 와서 강우에게 캠프의 위치를 짚어 주기도 했다.
“여기에 생존자들이 모여 사는 캠프가 있어.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여기 한번 가 봐.”
“…에릭, 당신은?”
“나는 됐어.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