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품에 안다 (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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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품에 안다 (합본)





1권
너를 품에 안다 (합본)
1



묵직한 어둠이 조용히 뒷걸음질을 치는 시각.

애니는 깊은 침묵에 잠겨 있는 윈슬리 공작의 침실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공작님, 얼른 일어나세요.”

창가의 커튼을 걷어내자 한 줄기 아침 햇살이 곱게 빗금을 그으며 눈부신 자락을 쏟아냈다.

“오늘은 유난히 하늘이 파랗더라고요.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시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실 거예요. 정원에 꽃이 정말 예쁘게 피었거든요.”

부지런히 창문을 여는 애니의 손길에는 새로운 아침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새벽에 가져온 싱싱한 채소로 수프를 끓였어요. 맛보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요? 먹기 힘드시더라도 끝까지 다 드셔야 해요.”

종알종알 참새처럼 늘어놓는 애니의 잔소리는 오로지 공작을 위한 것이었다.

부쩍 건강이 나빠진 공작은 찡그리고 있거나 우울하게 보내는 날이 많았다. 의사는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건강한 식사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애니는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늦추고 싶었다.

“많이 힘드신가? 오늘따라 유난히 못 일어나시네.”

마지막 커튼까지 야무지게 매듭을 지은 애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곤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를 흔들어 깨워야 할 모양이었다.

“공작님, 눈 좀 떠보세요.”

“…….”

종종거리며 침대로 다가서던 애니는 문득 묘한 위화감에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공작님…?”

“…….”

어쩌면 침실 문을 처음 열어젖힌 순간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공작님….”

그의 모습이 평소와 미묘하게 달랐다.

매일 밤 공작의 잠자리를 살피고 그가 잠들 때까지 마지막을 지키는 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가 어떤 모습으로 잠이 드는지 어떤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는지 그녀가 모를 수 없었다.

공작의 심부름 때문에 딱 하루, 어젯밤을 지키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리지에게 공작님을 부탁하며 그렇게 신신당부했었는데.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누워있는 공작의 얼굴이 너무 낯설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가만히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공작님… 안 돼요… 흑흑.”

향년 62세. 선황의 맏아들이자, 현 황제의 하나뿐인 형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학자, 문학가,정치가, 사상가.

윈슬리 듀프레드가 눈을 감았다.

그는 비로소 죽음을 얻었다. 그토록 원하던 평안을 이루었다.

그럼… 나는…. 이제… 난.

또 혼자가 되었다.


***


똑똑, 똑똑.

두 번씩 두 번.

잠시 후 문틈 사이로 파랗게 질린 리지가 나타났다. 애니는 거칠게 그녀를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로 문이 소리도 없이 잠겼다.

“삯마차 값은 안주머니에 있고 간단한 요깃거리는 여기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넣었어.”

손에 잡히는 대로 쑤셔 넣은 터라 가방이 울퉁불퉁했다.

“옷 따뜻하게 입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면 한밤중이나 되어야 할 텐데 추위가 만만치 않을 거야.”

애니는 리지에게 따뜻한 로브를 찾아 입히며 단단하게 끈을 묶었다. 늘 덤벙거리는 리지였기에 자꾸만 걱정이 앞섰다.

마지막으로 선반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동전 하나까지 모조리 쓸어 담아 가방에 넣었다. 급히 준비한 것이라 부족한 것이 많을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며칠간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너는? 넌 어떻게 해? 우리가 한패였다는 게 들키면 너도 죽은 목숨이야.”

잠자코 상황을 잘 견딘다 싶던 리지가 다짜고짜 애니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붙잡힌 자리가 벌써 발갛게 변하는 것을 보니 내일쯤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범인이라고 광고라도 하고 싶니? 갑자기 두 사람이나 저택에서 사라진다고?”

리지의 불안한 투정에 애니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너만 남겨 두고 내가 어떻게 도망가.”

“나는 남아서 네가 없어진 자리를 수습해야 해.”

“그러다 들키면 어떻게 해? 넌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교수형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 없는 리지의 말에 애니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걸 잘 아는 애가 공작님의 저녁 식사에 약을 타? 공작님이 너와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지 잊었니?”

그제야 리지가 흠칫 몸을 떨며 그녀의 팔을 놓았다. 하얗게 핏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니 리지 역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카인이 준 건 그냥 수면제였어. 어차피 공작님은 밤에 잠들기 어려워하시니까, 내가 약을 챙겨 드려도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했단 말이야.”

리지는 어이없게도 진심으로 억울한 얼굴이었다.

“공작님이 깊이 잠드시면 카인이 집무실에 들어가서 아주 잠깐만 서류를 살펴본다고 했어. 우리 부족과 관련된 서류가 공작님 손에 들어온 것 같다고, 그것만 처리하면 된다고 했는데…. 제발 애니, 나 절대 나쁜 마음은 없었어.”

알고 있다. 리지는 다른 꿍꿍이를 품을 만큼 영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중요한 일이라면 나와 의논했어야지. 나에게 물어봤어야지!”

벼락같은 애니의 분노에 리지의 어깨가 조그맣게 움츠러들었다. 더 따끔하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지금 저택은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정신없이 어수선했다. 이 틈에 리지를 탈출시켜야 했다.

“이렇게 너랑 실랑이할 시간 없어. 다치니까 좀 물러나 있으렴.”

애니는 침대를 밀치고 바닥에 깔린 나무 널판을 떼어냈다. 좁은 틈 사이로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드나들까 싶은 크기였다.

“비밀 통로 기억하고 있지?”

애니의 물음에도 리지는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눈가가 발갛게 변하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