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찬란한 홍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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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 10장
이토록 찬란한 홍연
1장



수호는 드넓은 광장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광장은 인적이 없어 사람이 드문드문 보일 정도로 한산했다.
그래서인지 넓은 광장이 굉장히 스산하면서도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문득 외로운 자신의 상황과 스산한 광장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수호는 광장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전에 와본 적이 있었는지를 얼른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게 확실했다.
한참을 생각해도 어딘지 알 수가 없자 수호는 생각하기를 포기하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면 뭔가 알아낼 만한 단서를 찾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때, 광장 끄트머리에 자리한 계단 맨 위쪽에 자릴 잡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지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살피는 노인이 수호의 눈에 들어왔다.
일단 너무나도 낯선 노인의 차림새가 수호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은 차림새였다.
수호의 눈엔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
노인의 이상한 차림새도 그렇거니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 때문에 그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같은 시대 사람 맞아? 저 허옇고 기다란 수염도 그렇고 요즘 사람 같지 않은 차림새도 그렇고 뿜어내는 아우라도 그렇고 뭔가 영 이상한데?’

수호는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노인 쪽을 향해 계단을 올라가다 중간 계단 참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을 느낀 듯 노인의 고개도 자연스레 수호 쪽으로 움직였다.
마치 서로에게 이끌리듯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노인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전율했다.

‘뭐지?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시는 거야.’

노인의 코앞까지 다가간 수호는 일부러 노인을 빤히 바라보며 생김새와 차림새를 다시 한번 꼼꼼하게 살폈다.
앉아 있는 상태여서 키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리 작은 키는 아닌 듯싶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190CM인 자신보다는 크진 않을 거라 확신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체구가 나이답지 않게 꽤 건장하다는 걸 한눈에 딱 알 수 있었다.
건장한 체구는 절대 옷으로는 가릴 수 없으니까.
희끗희끗한 수염은 가슴팍을 덮을 정도로 길었고, 어깨 아래에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은 하나로 질끈 묶은 채였다.
얼굴은 시술이라도 받은 것처럼 반들반들하고 아주 희었다.
노인은 쉬이 범접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수호는 눈꺼풀이 떨리고 눈이 시려 눈물이 날 것 같은데도 힘을 잔뜩 주고 끝끝내 노인의 눈빛을 버텨내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내 노인은 졌다는 듯 수호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째 길을 잃은 듯 보이오만.”

“아마도 그런 듯합니다.”

“그런 듯하다는 건 무슨 말이오?”

“아, 처음 와 본 곳이라서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제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혹시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아는 거라도 아니 기억나는 거라도 있을까 해 광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렇게 어르신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 보이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것이라오. 왜 그런 말이 있잖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

“……네?”

노인은 느리게 자신의 긴 수염을 손으로 쓸고는 또다시 웃었다.
그러고는 수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악수를 청하는 모양이었다.
수호는 얼른 손을 내밀어 노인의 손을 맞잡았다.
제 손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큰 손이었지만, 기분 좋을 정도의 따스함만 전해질 뿐 위화감은 전혀 없었다.

“허허허. 아무튼 반갑소이다.”

“아, 네.”

하지만, 노인의 모습과 더불어 마치 동굴 음처럼 주변을 잔잔하게 울리는 웃음소리조차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영 이해가 안 되겠지만, 모든 일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오.”

“그게 무슨……?”

“흠……. 나중에 때가 되면 다 알게 된다는 말이오. 그나저나 그렇게 무작정 헤매고 다닌다고 해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는 게 아니라오. 여기는 그대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니 말이오.”

“전혀 다른 세상이라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언뜻 이해하지 못한 수호는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계속해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호의 연이은 물음에도 노인은 답해줄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 아까서부터 그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는 건 이미 알 거요.”

“아, 네.”

노인은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내 수호를 당황하게 했다.

“쯧쯧쯧. 저런 딱한…….”

노인은 수호를 보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왜 자꾸 저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건지 모르겠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분인데 뭔가 나에 대해 아주 잘 아는 것 같은 느낌이야. 정말 이상해. 꼭 뭐에 홀린 것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수호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사람을 꿰뚫어 볼 듯한 노인의 예리한 눈빛에 가슴팍 안에 있는 식도까지 찌르르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유의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자, 일단 눈을 감으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내 말에 바짝 집중해야 하오. 왜냐하면, 내 그대에게 그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홍연을 아주 잠깐 보여줄까 해서요.”

노인은 얼른 궁둥이를 옆으로 슬쩍 옮겨 가부좌를 틀고는 앞의 자투리 공간을 두툼한 손으로 툭툭 쳤다.

“……네?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홍연이요?”

수호는 노인의 말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노인의 말을 믿기가 어려워 한참을 망설였다.

“예끼 이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아주 머릿속이 바쁘시군. 왜 내 모습을 보니 영 꺼려져서 그러는 거요? 쯧쯧,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시오? 더구나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원. 뭐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노인은 흥을 잃은 사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는 수호에 대해 읊었다.
수호에겐 노인의 무미건조한 표정보다도 신경을 긁는 듯한 뾰족한 목소리가 더 거슬렸다.

“어, 어떻게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어허, 그것 보시오. 내가 무슨 얘기를 해줄 줄 알고. 자고로 사람은 말이오. 눈에 보이는 외면보다는 눈에 안 보이는 내면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하오. 그래야 내 사람들을 품을 수 있지 않겠소. 아니 그렇소?”

노인이 자신을 향해 혼내듯 호통을 치자 수호는 움찔했다.
일면식도 없는 자신에 관해 이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낯선 곳인 데다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이 다짜고짜 앉으라고 하시니 잠시 망설였던 것뿐입니다. 죄송합니다.”

형형한 눈빛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기는 노인을 보자 수호는 더 실랑이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더구나 상대방은 자신에 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마냥 버틴다고 득 될 건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수호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당연하오. 그댄 날 모르니……. 자, 내 얘길 들어 손해날 건 없으니 일단 앉아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