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 차
23. 티 내도 되나
24. 소문의 그녀
25. 일촉즉발
26. 촌극
27. 뜻밖의 맞선
28. 노선을 정해야 할 순간
29. 같이 퇴근할까
30. 아이스크림
31. 시궁창으로
32. 결혼을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33. 아내다운 위로
34. 소동의 배후
35. 키스해도 됩니까?
36. 커플링
37. 취한 정혼자
38. 과소평가
39. 안 될까?
40. 우아한 남자
41. 상처 많은 아이
42. 사직서
43. 병원놀이
44. 두 번째 결혼식
45. 첫날밤
46. 부부 금실
23. 티 내도 되나
-그런데 왜 춥게 나와 있어요?
“네? 그걸 어떻게…….”
목소리 사이에 바람 소리라도 새어든 걸까. 그럴 리 없다. 서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살피던 끝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옥상 정원 한편 흡연 구역에서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승건의 모습이 보였다.
-그게 중요한가.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의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 뒤 담배를 꺾었다. 우아하게 구겨진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은 남자가 한 걸음씩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그나저나 주말 연습 효과가 좋았나 봅니다.
다가오는 동안 끊기지 않은 전화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 생경했다.
마침내 사정거리에 도달했을 때에야 승건은 휴대 전화를 내렸다.
“아무래도 실전의 힘인가.”
“…….”
그의 말을 빌리자면 ‘실전’이었던, 지난 주말 밤의 키스를 떠올리자 뺨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 조금은 더 티 내도 되나.”
“네?”
“이도경 대리한테 우리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면서요.”
“그렇긴 한데…….”
서우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굴리다 말을 이었다.
“입이 가벼운 분 같진 않아요.”
“그래요?”
“네.”
“정서우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나보다 그 사람에 대해 잘 알 테니까.”
승건은 의외의 순간에 신뢰를 보인다. 그의 인정과 믿음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도경 대리가 아니라도 이미 소문은 돌 만큼 돌았을 겁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엔 충분하지.”
“다음 단계라면…….”
“일방적인 구애에 지친 정서우가 최승건을 받아들인 걸로. 심플하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쓸쓸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승건이 다시 입술을 뗐다.
“오늘 퇴근하고 뭐 합니까?”
“아무것도요.”
“그럼 나한테 시간 좀 내죠.”
“네, 알겠습니다.”
서우는 고민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승건은 들릴 듯 말 듯 하게 중얼거렸다.
“고분고분하긴.”
만족스러운 것인지 못마땅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시간 맞춰 김 비서한테 픽업하라고 할게요. 나는 오후에 외근이 있어서. 약속 장소에서 바로 봅시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와 보면 알겠지?”
“…….”
얌전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하려는 듯 승건이 짓궂게 대꾸했다.
서우는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잔잔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김 비서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매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 일인걸요.”
내리기 직전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김 비서는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소지품을 챙겨 문고리를 당기려 할 때였다. 김 비서가 몸을 돌려 그녀를 불렀다.
“정서우 대리님.”
“네?”
“오늘 원 없이 쇼핑하세요. 본부장님 지갑은 아주 두둑하니까요.”
상사를 골려 먹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는 걸까. 김 비서의 응원에 서우는 옅은 미소로 화답하고 차 문을 열었다.
그녀는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퍼스널 쇼핑룸으로 이동했다.
소파에 앉아 카탈로그를 건성으로 넘겨 보던 승건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먼저 도착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서우는 그의 곁에 다가서며 물었다.
“기다리셨어요?”
“나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앉아요.”
그는 카탈로그를 내려놓으며 제 옆자리를 턱짓했다.
“혼자서는 도통 뭘 제대로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
장난스러운 타박이었지만 서우는 어쩐지 기가 죽었다. 그런 방면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을 터였다.
소파 앞 작은 테이블 위로 간단한 다과가 준비됐다. 스튜디오 같은 공간에 선별된 물건들이 보기 좋게 진열된다. 다리 아프게 걸어 다니지 않고도 쇼핑을 할 수 있다니. 서우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 옷부터 시작할까요?”
대기하고 있던 퍼스널 쇼퍼가 밝은 얼굴로 제안했다.
매니저는 서우에게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제안했다.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은 구매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마저도 그녀가 망설이고 있을 때면, 승건이 결정을 대신했다.
“그것도 준비해 주시죠.”
“네, 고객님.”
“저런 스타일은 잘 안 입게 될 것 같은데…….”
어깨가 드러나 다소 과감한 스타일의 원피스였다. 서우가 난처한 기색으로 속삭이자 승건은 매니저가 내준 커피로 목을 축이곤 여상하게 반박했다.
“결혼하고 나서 어떤 자리가 생길 줄 알고. 공적인 자리에서 입을 드레스도 몇 벌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집에 둘 곳도 없고요.”
“물건은 당장 쓸 수 있는 몇 가지만 챙겨요. 나머지는 신혼집에 가져다 둘 테니.”
“…….”
신혼집이라는 말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될 터였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매니저가 수완 좋게 틈을 놓치지 않고 제안했다.
“결혼 준비하시나 봐요. 예비 신부님 드실 만한 가방도 몇 점 준비했는데, 보시겠어요?”
“그래요.”
옷이 사라진 자리에 이번에는 명품 브랜드 가방들이 진열된다.
“취향인 걸로 골라 봐요.”
“저는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고르기 어려우면 전부 사서 한 번씩 들어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고를게요.”
결국 서우는 가방을 유심히 살펴보다 회사에 가지고 다닐 만한 적당한 크기의 숄더백을 골랐다.
“아까 고른 원피스에 어울릴 만한 가방도 정 매니저가 골라서 같이 포장해 줘요. 이 사람이 워낙 검소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본부장님.”
옷부터 시작해 신발, 가방, 액세서리까지 쉴 새 없이 고르느라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를 썼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쇼핑을 마치고 그는 서우를 고층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입맛이 없어요?”
멍한 얼굴로 애피타이저를 깨작거리던 서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조금 지쳤나 봐요.”
“쇼핑에는 영 취미가 없는 모양이네. 드레스룸은 정 매니저에게 적당히 정서우 씨에게 어울리는 것들로 채워 놓으라고 할게요.”
“오늘 산 것도 충분히 많은걸요.”
“막상 살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정서우 씨가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최승건의 여자에 걸맞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신경을 써야 할 터였다. 그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한 서우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수고했는데 와인 한잔이라도 할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술에 취하면 선을 넘게 될 것 같아서?”
서우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승건이 전부터 ‘선’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제가 선을 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던 건…….”
서우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해명했다.
“본부장님이 편해지면 자칫 제가 일을 그르칠까 봐 우려된다는 뜻이었어요.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어서요. 그 말이 신경 쓰이셨다면 죄송합니다.”
“아.”
그러자 승건은 무언가 깨달은 듯한 얼굴이 된다. 그는 짧게 허탈한 웃음을 뱉어 냈다.
“정서우 씨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네?”
“내가 오해하는 것 같으면 지적하거나 따져 물을 일이지, 이렇게 사과해 버리면 어떡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