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국의 혼란.
고위 마법을 배우다.
마법을 훔치다.
서로 이용하려 하다.
다 불게 되어 있어.
흉수를 알게 되다.
유인.
다리 위의 공방전.
비밀통로에서 싸우다.
혼란의 수도 헵스.
성전(聖戰)이 선언되다.
키리언 왕공의 반격.
버림을 받다.
뮤턴 공작.
여파를 보다.
뒤에서 움직이는 자.
만지게 되다.
맹세를 지키기로 하다.
굳히다.
누구를 위해.
제국의 혼란.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지만, 심각하군요.”

레온은 기억 속의 필로드 성을 떠 올렸지만, 기억 속의 필로드 성은 없었다.

불에 타 필로드 성이 무너진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남아 있었다.

거대했던 성벽은 검게 그을린 채 여기저기 허물어져 있었고, 한때 위용을 자랑하던 성루와 망루 탑은 앙상한 뼈대만 겨우 남아 있었다.

이제는 그런 불타버린 것들이 흉물스럽게 서 있는 폐성일 뿐이었다.

“헌데, 이런걸 보고 책임감을 느끼라고 저를 데리고 오신 겁니까?”

“으응? 전혀 그런 의미로 레온을 지명한 게 아닙니다.”

판정관이었을 때는 두 파티의 성과를 판정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말을 짧고 건조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연배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서로 존대를 해주고 있었다.

레온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결국, 자신이 이스트 가문을 위해 8층으로 내려 가 골렘들을 쓰러트렸고, 그러면서 화염 마왕이라고 하는 마물이 나와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마물이 부활했고, 그 결과 이렇게 필로드 성이 폐허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불편한 것이었다.

“가장 마음이 불편해야 할 사람은 저입니다. 화염 마왕을 제국의 수도인 헵스로 가게 해야 한다고 결정한 사람이 저이니깐요.”

“하지만, 애초에 제가 깨우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그렇게 치면 전설 속의 인물인 토스토 마법사의 잘못입니다. 화염 마왕이라는 그 마물을 그렇게 미궁 아래에 봉인하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애초 마계와 마물을 만들어 낸 태초 신의 잘못이군요.”

이튼은 레온의 부담감을 줄여 주고자 토스토 마법사는 물론이고 태초 신까지 잘못 되었다고 이야길 했다.

“결국, 우연과 필연이 겹쳐진 겁니다. 화이트 가문이 그 미궁을 발견하고 미궁을 개척해 나간 것도 잘못이고 누구든 다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가문의 복수를 지금 화염 마왕이 해주고 있습니다. 필로드 성같이 피해를 당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그런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복수를 한다고 해도 죽는 이들과 무너지는 성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길 보세요.”

이튼이 가리킨 곳은 무너진 성벽 아래였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판자집 같은 얼기설기 엮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검댕이 묻어있었고, 옷에도 검댕이 묻어 광산의 광부들이 생각나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도 작은 손으로 돌멩이를 나르고 있었고, 노인들도 지팡이를 짚고서 뭔가를 옮겨가며 일을 하고 있었다.

“불에 타고 무너진 곳에서는 재건의 희망이 있는 겁니다. 화이트 가문도 그랬습니다. 나라를 잃고 떠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궁을 발견하여 정착하여 복수를 다짐하며 지금의 화이트 가문을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불타고 무너져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필란체 제국은 우리들로 인해 무너질 것이고 그 자리에 다른 나라가 들어 설 겁니다. 그러면 가문의 염원이 이루어 지는 것일 테지요.”

“….”

레온은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성의 잔해들 사이로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이 보였다.

분명 슬픈 죽음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잔해 속에서 초록의 풀은 돋아나고 있었다.

“왕국과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 세워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걸 좀더 빨리 앞당길 뿐이라는 겁니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을 누르던 것이 조금은 가벼워 지는 군요.”

“신들도 이렇게 불에 타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나서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데, 우리가 그런 책임으로 가슴 무거워 할 필요는 없죠.”

“그런거 같습니다. 신도 책임지지 않는데, 제가 질 필요는 없죠.”

이튼은 한결 밝아진 표정을 짓는 레온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가장 기사다운 모습이라 레온을 지명한 것인데, 마물이 미궁 밖으로 나온 이후 그 책임으로 이리 마음이 몰려 있었을 줄은 몰랐다.

뮤턴 공작의 깃발 아래 들어 가 말을 잘 따르는 척 하며 방해하고 최종적으로는 뮤턴 공작을 죽여야 했다.

그런 일에 마음이 아픈 레온은 필요가 없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살육과 참상을 보아야 했기에 억지로라도 말로 마음의 짐을 덜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을 달래주길 잘한 거 같다는 생각을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다시금 했다.

멀쩡한 성과 마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염 마왕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마물이 지나간 곳에는 불타고 남은 재와 겨우 살아 남은 소수의 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남부 화이트 가문에서 보내온 기사와 마법사로군.”

행정관은 자신들이 보낸 증표를 들고 온 기사와 마법사를 힐끗 쳐다봤다.

배너를 가지지 못한 기사와 아직 어려 보이는 마법사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공용 천막을 지정해 줬다.

용병단을 모아 꾸린 뮤턴 공작의 군대는 5천여 명의 군세였는데, 남부에서 모여든 이들이 3천 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남부 유력가에 요청한 기사와 마법사 외에도 화염 마왕에게 피해 입은 이들과 용병들을 계속 받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가 머무는 숙영지가 계속 만들어 졌고, 기사와 마법사들을 위한 천막도 따로 설치가 되어 공동생활을 했다.

기사들이야 훈련을 위한 공동생활이 흔했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이렇게 공동 천막에서 생활 하는 것이 대부분 처음이었고, 그러다 보니 마법사들 간에 매일 트러블이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