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당신에게,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당신에게,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1권]

지은이 자몽
발행일 2025년 7월 23일

펴낸곳 (주)테라핀
홈페이지 http://www.copinnovel.com
전자우편 easycontents@terapinstudios.co.kr
등록번호 제 25100-2019-000007호

ⓒ 자몽,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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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3,300원
ISBN 979-11-7461-118-5 [05810]
당신에게,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Chapter 1.
리아스가 살던 비나에서 퀴르바사까지, 합승 마차로 70일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남동쪽 변방에 자리한 작은 마을인 비나에서, 모르아니아 제국 북서쪽의 항구 도시 퀴르바사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종종 숲에서 나온 마수나 야생 동물이 습격하는 일도 적지 않은 편이라 호위가 필요했지만 합승 마차의 호위를 맡으려는 사람들이 적었다. 덕분에 이미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길이 늦어지는 게 태반이었다. 거기다 한겨울이라 겨울에는 예사로 길이 얼어 있는 퀴르바사 영지 경계를 넘은 뒤로 속도를 내지 못해 더 늦어졌다.
모직 코트를 여미면서 리아스는 객차 안에서 영지의 주도인 퀴르바사와 라인더르스 후작의 성인 바날성을 눈에 담았다. 마수는 물론이고 외부의 공격에 대비해 높게 쌓은 성벽 위로, 성이 보란 듯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퀴르바사의 주 성인 바날성이 보이자 리아스는 긴장하며 목에 건 로켓을 어루만졌다.
여행길 내내 자신이 라인더르스 후작과 결혼하기 위해 퀴르바사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긴장을 억누르는 리아스의 곁에서 여행객이안전을 비는 기도문을 읊조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라인더르스 후작이 마수가 되는 저주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제국 끝은 물론이고 나라 바깥에도 퍼져 있었다.
모든 것은 3년 전 라인더르스 후작이 황녀와 약혼한 직후에 일어났다. 오래도록 황녀에게 연심을 품었던 마법사가 질투심에 이성을 잃고 황녀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금지된 흑마법에 손을 뻗었다. 황녀를 데리고 몸을 숨긴 마법사는 어느 작은 섬으로 도망쳐 자신이 만들어 낸 마수를 풀어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약혼자였던 라인더르스 후작이 퀴르바사의 푸른 불꽃 기사단을 이끌고 황녀를 구해 내기까지 일 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순간, 마법사는 죽어 가면서도 모든 힘을 쥐어짜 라인더르스 후작에게 저주를 걸었다. 라인더르스 후작에게 마수의 눈과 피가 깃들기를, 그리고 오로지 진실한 사랑의 키스로만 풀 수 있다는 고전적인 주문이 얽힌 저주였다.
벼락이 되어 내리꽂힌 저주에 맞아 잠시 정신을 잃었던 라인더르스 후작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정말로 그의 몸에 저주가 깃든 뒤였다. 갈라진 동공과 샛노란 눈, 얼음장처럼 차가운 피부를 가진 채 깨어난 라인더르스는 구출한 황녀와 수도로 돌아왔지만 온전히 환영받지는 못했다. 귀족부터 거리의 아이들까지 샛노란 라인더르스 후작의 눈에 대해 수군거리며 그의 피마저도 저주로 인해 검게 변했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구설수와 상관없이 황제의 고명딸과 라인더르스 후작의 결혼식은 예정대로 준비되었다. 결혼 소식에 거리에는 동화처럼 라인더르스 후작의 저주가 예식의 끝에 나누는 키스로 풀릴 거라는 달콤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하나 결혼식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엉망으로 끝났다. 해쓱한 얼굴로 나타난 황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웨딩 아일 중간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몬드와 수정으로 장식한 웨딩드레스 차림의 황녀가 무섭다며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들불처럼 제국 사방으로 퍼졌다.
‘라인더르스 후작이 저주를 받아서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짐승의 날고기를 먹는다.’
‘짐승처럼 송곳니가 자라고 몸에 비늘이 돋았다.’
비나까지 흘러들어 온 허황된 소문들을 떠올리던 리아스는 마차가 멈추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병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마부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이윽고 여행객들이 탄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병사가 문을 열자 차갑다 못해 칼날처럼 느껴지는 바람이 마차 안으로 몰아쳤다.
“검문을 하겠습니다.”
추위에 목을 움츠리면서 리아스는 주머니에서 여행 허가서를 꺼내 들었다. 병사가 순서대로 이름과 출신지, 여행의 목적을 기입하고 출발지의 검문소에서 받은 도장이 있는 여행 허가서를 확인했다. 리아스가 건넨 허가서를 확인하던 병사가 작게 놀라더니 리아스와 허가서를 번갈아 살폈다.
“비나에서 오신 리아스 아버그 님 되십니까?”
병사의 물음에 리아스의 눈이 약간 동그랗게 커졌다.
“네, 그런데요…….”
“도착하실 거란 말씀은 들었습니다. 마중을 나오기로 했으니, 내리셔서 잠시 기다리시죠.”
리아스와 병사가 나누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마중을 나온다고요?”
“예, 대기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병사의 말에 리아스는 코트를 여미며 좌석 아래에 넣어 두었던 가방을 챙겨 들었다.
“다른 짐이 더 있으십니까?”
“뒤 칸에 실려 있어요.”
대답하며 리아스는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병사의 도움을 받아 여행용 트렁크를 꺼내자 리아스가 타고 왔던 합승 마차가 검문소를 통과해 멀어졌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에 손을 말아 쥐면서 리아스는 병사가 안내하는 대로 대기소로 자리를 옮겼다.
* * *
돌로 쌓아 올린 대기소의 벽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쪽에 짐을 두고 리아스는 방 곳곳에 냉기를 죽여 보려 가져다 놓은 듯한 화로들 중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숯을 넣어 둔 화로로 손을 뻗어 온기를 쬐면서 한 시간에 가까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누군가 노크를 해 인기척을 내는 것에 불쑥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러는 동시에 자신은 미리 마중 나오는 사람도 없고, 나아가 기다리는 동안 차 한 잔도 대접받지 못할 만큼 달갑지 않은 사람인가 싶어 입안이 쓰기도 했다.
“네.”
리아스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문이 열리면서 일곱이나 되는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둘은 검문소에서 리아스를 알아보았던 병사였고, 한 사람은 하인쯤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수수하긴 하지만 저렴하지는 않은, 양모로 만든 긴 기장의 코트를 입은 하인의 뒤로 검정색 케이프가 달린 코트를 입은 이들이 눈에 띄었다. 하인은 물론이고 병사들과 비교해도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진 데다 코트에 청금석 장식의 브로치를 단 이들을 리아스는 알아보았다. 라인더르스 후작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북서의 영토와 바다를 수호하는 푸른 불꽃 기사단의 사람들이었다.
“마중을 나왔습니다.”
네 사람이나 되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두고 있던 리아스는 하인의 말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짐은 이쪽의 것이 전부입니까?”
“네, 그래요.”
말끝에 리아스가 엷은 미소를 띠자, 하인이 짐 두 개를 혼자서 챙겨 들었다.
“모시겠습니다.”
출발하자는 하인의 말에 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소를 나섰다. 잠시나마 온기로 녹였던 몸이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곧장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바다에서 곧장 불어오는 찬 바람의 혹독함에 대해 책에서 읽어 보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리아스는 어깨를 떨면서, 하인을 따라 바깥으로 나섰다.
검정색의 작은 마차에 하인이 짐을 싣는 동안 마부가 리아스에게 객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하면서 리아스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기사들이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말에 올라타는 것이 마차의 창을 통해 보였다. 추위 때문인지 기사들의 말 네 필 모두가 목과 등을 덮은 성장을 한 게 눈에 띄었다. 거기에서 눈을 돌리며 리아스는 마차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마중을 나온 사람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았지만 그들에게서 퀴르바사의 추위처럼 냉랭함이 느껴졌다. 쓸쓸함인지 아니면 아득함인지, 그도 아니면 불안함인지 모를 무언가를 느끼면서 리아스는 목에 걸린 로켓을 어루만졌다.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로켓을 만지는 버릇은 아주 오래된 버릇이었다. 습관적으로 로켓을 어루만지면서 리아스는 고작 반년 전 세상을 떠난 조모를 떠올렸다. 가까운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일 년의 애도 기간을 갖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 기간 중에 약혼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결혼은 미루는 게 통상적이었음에도, 리아스는 애도 기간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비나를 떠나 퀴르바사에 와 있었다.
순식간에 깊은 슬픔이 썰물처럼 밀려와 가슴을 스치는 게 느껴졌다. 사생아인 자신을 그나마 사람대접받게 보호하고 사랑을 나눠 주던 조모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슬픔이었다.
“괜찮아요…….”
리아스는 자그마하게 속삭이면서 로켓의 표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 * *
비로소 길고 긴 여행길 끝에 바날성 앞에 선 리아스는 쥐색의 벽과 파란색의 뾰족한 지붕들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역사서에 문장으로만 남아 버린 어느 작은 왕국에 대해 떠올리면서 리아스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야트막한 계단을 올라 현관의 홀로 들어가자 정면에 대리석을 깎아 만든 날개 달린 말 조각상이 서 있었고, 그 주위를 두르듯 계단이 배치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고상하면서도 위용 있는 성의 홀을 구경하던 리아스의 눈에 인영이 눈에 띈 것은 그다음 순간이었다. 높은 계단 난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가 퀴르바사의 영주인 라인더르스 후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리아스는 현관에, 그는 3층 난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모습이 보이기는 해도 이목구비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똑바르게 서서 리아스를 내려다보는 라인더르스 후작을 마중을 나온 몇 명의 사용인들이 알아채고 몸을 구부려 예의를 갖췄다. 몸짓은 공손했지만 동시에 어딘지 조금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뒤늦게 그들을 따라 고개를 가볍게 숙이면서 리아스는 사용인들이 그의 저주를 의식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짤막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자 난간에 서 있던 그가 몇 사람을 데리고 복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사라지자 한편으론 마음이 놓이면서 동시에, 후작의 저주가 단순히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아닌 현실로 느껴졌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짐을 든 사람의 말에 정신을 가다듬으며 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단 위로 발을 디뎠다.
황경을 비롯해 남부의 성들처럼 색유리를 이용한 모자이크 장식이 된 큰 창이 아닌, 작은 창들을 눈에 담았다. 불현듯 해가 충분히 드는지 궁금해하는 동시에 리아스는 태피스트리 장식들을 살펴보았다. 복잡한 문양으로 짠 것들과 어떤 이야기를 묘사해 둔 듯한 태피스트리를 지나자 짐을 든 하인이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하인이 잠시 짐을 내려놓고 문을 열어 주자 리아스는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벽난로와 침대, 그리고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안락의자와 티 테이블이 있는 소박한 공간이 리아스의 눈앞에 드러났다.
“사람을 부르시려거든 설렁줄을 당기십시오.”
하인의 목소리에 리아스가 돌아보자, 가방과 트렁크를 문 안쪽에 넣어 둔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곧장 방을 떠났다. 닫힌 문을 보며 희미하게 멀어지는 인기척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리아스는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갔다.
붉게 날름거리는 불길을 보며 나무가 타는 냄새를 잠시 맡은 뒤 리아스는 자신이 머물게 된 방을 차분하게 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난로 옆에 묶어 둔 장작부터 불투명한 유리를 끼운 작은 창과 바닥에 깔린 털 깔개, 그리고 밤사이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천으로 만든 캐노피가 달린 침대까지 살피니 더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어쩐지, 사무치게 외로웠다.
* * *
성에 도착한 뒤 일주일의 절반가량은 일찍 성을 떠나는 말발굽 소리나 마차 소리에 깨어났다. 일어나 단장을 하고 식사를 한 뒤에는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답답함에 정원으로 나서 보기는 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금세 되돌아왔고, 기껏해야 방 앞의 복도를 거닐면서 창으로 보이는 낯선 겨울 풍경을 내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결혼식을 채 하루도 남기지 않은 때에 라인더르스 후작이 자신을 찾았지만 리아스는 서운하다거나 억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라인더르스도, 자신도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고, 나아가 두 사람의 결합은 희망이나 기쁨처럼 따듯하고 눈부신 감정과는 먼 일이었다. 리아스는 간단하게 머리를 정리하는 것으로 단장을 마치고 라인더르스 후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집무실로 향했다.
융단이 깔린 복도를 하인의 뒤를 따라 걸어가자 한눈에도 기사들처럼 보이는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리아스는 침착하게 발걸음을 옮겨 그들의 앞에 다가섰다. 자신을 마중 나왔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전부 낯선 사람들에게 리아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리아스가 예의를 갖추자 그들도 간신히 무례하지 않은 선을 지키듯 가벼운 묵례를 되돌려주었다.
“후작 각하, 아버그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인이 문에 대고 말하자 대답이 돌아오는 대신 문이 열리며 또 다른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 검은색 정장에 흰 장갑을 낀 차림으로 그가 성의 집사임을 알아본 리아스에게 길을 열어 주듯 물러섰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부드러운 훈기와 함께 두통을 가라앉히는 데 쓰곤 하는 박하 기름 향기가 났지만 리아스는 다른 곳에 신경을 빼앗겼다. 집무실 한가운데 자리한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에 앉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을 받으며 리아스는 그를 마주 보는 자리에 놓인 의자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던 샛노란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마저도 리아스의 시선을 오래 잡아 두진 못했다. 남자, 그러니까 라인더르스 후작은 놀랍도록 잘생긴 사람이었다.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긴 듯한 머리카락은 거의 백색에 가까운 금발이었고 그 아래로 자리한 반듯한 이마와 콧대, 그리고 깊은 눈매와 약간 얇은 윗입술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그가 황녀와 약혼할 거란 소식이 퍼졌을 때 모두가 입을 한데 모아 잘생겼다더라며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소문처럼 무척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리아스는 자신이 느낀 게 무엇인지 가늠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할 것 같은 샛노란 그의 눈을 마주 응시하다가 뒤늦게 리아스는 자신이 느낀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언뜻 본다면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처럼 날카롭게 경계하는 눈이었지만 그 너머에 얇은 막으로 가려 놓은 듯한 슬픔과 체념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 리아스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첫인상을 어떻게 정의해야 좋을지 몰랐다. 슬픔과 체념이 느껴졌지만 그의 태도에선 비굴함 없이, 분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결혼은 황실이 주선한 결혼이지.”
라인더르스 후작의 목소리에 리아스는 혼자서 바쁘게 오가던 생각을 멈췄다. 눈썹을 약간 찌푸린 탓에 미간에 주름이 생긴 라인더르스가 리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그 남작에게 신부대도 지불했고, 내일 결혼식엔 황실에서 보낸 증인도 참석한다.”
리아스는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그의 어조에 실린 모욕감을 느꼈다.
“우리 중 어느 쪽이든 이혼을 청한다면 그것은 곧 황실에 대한 모독이 된다.”
라인더르스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리아스는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혼을 청한다면 황실에서 부적합한 사람을 맺어 준 거라 주장하는 꼴이니까요.”
마찬가지로 리아스가 무덤덤한 어조로 말하자 라인더르스가 아주 낮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날성은 아주 넓어.”
“…….”
“원한다면 서로 평생 얼굴 마주칠 일 없이 살 수 있을 만큼.”
말 끝에 시선을 돌리는 후작을 보면서 리아스는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또렷하게 이해했다. 의무적으로 식을 올리고 함께 하룻밤을 보낸 뒤에 서로가 없는 사람처럼 지내자는 라인더르스의 말에 리아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후작가에 누가 되지 않게, 조용히 지내겠습니다.”
의미를 이해했다는 리아스의 대답에 라인더르스가 잠시 눈을 들었다. 리아스가 아주 잠깐 그의 노란 눈을 마주 보자, 그가 또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그제야 리아스는 그가 누군가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느끼면서 이제라도 눈을 피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리아스에게 라인더르스 후작이 말했다.
“…가 봐도 좋아.”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하면서 리아스는 자리에서 돌아섰다. 닫힌 집무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집사와 하인, 그리고 기사들이 똑같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랬듯, 리아스는 기사들에게 말없이 묵례를 하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 * *
결혼식은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바날성 내에 있는 예배당에서 단출하게 치러졌다. 정말 꼭 필요한 것과 사람만을 갖춰 거의 약식이나 다름없는 결혼식이었지만 리아스는 개의치 않았다. 신성회에서 나온 사제가 주관하는 예식을 치르면서 리아스는 라인더르스 후작의 어머니이자, 후작가 대부인의 얼굴도 처음 보았다. 예식을 주관하는 사제가 장엄한 어조로 성혼을 알리고 아무런 장식 없는 얇은 금반지를 예물로 나누는 것으로 식을 마쳤다. 크기가 커서 자칫 손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반지를 느끼면서 리아스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라인더르스 후작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인사하는 것을 들었다.
“후작 각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한시름 놓으셨을 것입니다.”
반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리아스는 황제라는 단어에 축하 인사를 건네는 이를 바라보았다. 비단으로 만든 옷에 담비 털을 덧댄 외투를 입은 사람에게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내색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한 태도로 리아스는 라인더르스 후작이 그에게 빈말로 감사를 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통의 결혼식이 그러하듯 오후에 피로연을 겸하는 만찬이 이어졌다. 결혼식에서 그랬듯, 순응하는 태도로 리아스는 자리를 지켰다. 지난하고 긴 피로연 만찬이 끝날 무렵에 라인더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고 눈치를 주었다. 리아스는 이번에도 조용하게 그가 하자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치르기로 한 침실까지 황실에서 증인으로 보냈다는 솔버그 백작이 따라왔다. 리아스는 솔버그 백작과 대부인, 그리고 기사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인더르스 후작과 함께 부부를 위한 침실로 들어갔다.
침실은 커다란 벽난로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냉기가 새어 들어올 만한 곳엔 화로를 둔 안락한 공간이었다. 커다란 침대에는 리아스의 방에 있는 것과 같이 두꺼운 캐노피가 달려 있었지만 레이스 장식을 덧대어 둔 게 눈에 띄었다.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난롯가로 가 앉는 후작을 보면서 리아스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어 있는 다른 안락의자에 가 앉기도, 그렇다고 곧장 침대로 가기도 곤란한 느낌이 들었다. 멀뚱하게 제자리에 서 있다가 리아스는 별수가 없어 침대에 가 걸터앉았다.
적막함 속에 앉은 채로 리아스는 안락의자에 앉은 라인더르스 후작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길을 미동도 없이 바라보는 그를 보다가 리아스는 벽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잠시간 그러고 있으려니 괘종시계가 정각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무겁게 들리는 종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리아스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기척에 벽난로의 불을 응시하던 라인더르스 후작이 리아스를 돌아보았다.
“저는 먼저 자리에 눕겠습니다.”
리아스는 방 한쪽에 마련된 드레싱 스크린 뒤로 돌아 들어가 프록코트를 벗고 미리 준비된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옷을 한쪽에 정리해 놓고 침대로 돌아가자 여전히 불 앞에 앉아 있는 라인더르스 후작의 모습이 보였다.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 잠시 그를 살핀 리아스는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 안으로 몸을 넣으면서 캐노피를 그대로 둬야 하는지, 아니면 내려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캐노피를 묶어 놓은 끈을 풀었다. 두꺼운 천이 내려오자 불빛이 한층 가려지며 침대 안이 어둑해졌다.
캐노피를 천장에 고정해 놓은 부분을 올려다보고 있자 불현듯 자신이 누구와도 한 침대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식됐다. 타인, 그것도 남자이지만 법률적으로는 결혼한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잠들 거란 사실에 거북함도 아니고 어색함도 아닌 감정이 느껴졌다. 희미하게 명치 어느 부근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리아스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라인더르스 후작은 여전히 침대 밖, 벽난로 쪽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의 기척을 쫓듯 리아스는 안쪽에서 잠시 숨을 죽인 채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 그리고 먼 복도를 누군가 오가는 작은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다가 느릿느릿하게 수마에 휩쓸렸다.
* * *
비나의 여름은 건조하지만 몹시 더운 편이었다.
리아스는 조모가 아버그 가문에 시집왔던 해에 나무 아래 만들었다는 그네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서관에서 가져온 소네트를 읽으며 흔들리는 벤치에 몸을 기댄 채로 한낮의 더위를 피하던 중이었다.
“천것이 또 나와 앉아 있네.”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리아스는 책에서 눈을 들어 말을 붙인 이를 쳐다보았다. 리아스처럼 잘 익은 포도줏빛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눈은 연두색이 아닌, 깊은 바다처럼 파란 소년이었다.
“도련님.”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리아스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리아스의 아버지인 아버그 남작의 장자인 니클라스는 항상 얼굴에 나쁜 심보가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늘 따라다니는 유모와 하인 한 사람을 등 뒤에 단 그가 리아스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들었다. 리아스는 성마르게 책을 이리저리 살피는 니클라스의 행동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니클라스가 책을 쥔 채 리아스의 머리에 손을 휘둘렀다. 그는 리아스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서슴없고 이유 없는 폭력을 저지르곤 했다.
“사생아 새끼, 똑똑한 척 뻐긴다니까.”
니클라스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리아스는 그나마 책이 얇은 소네트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뭘 하고 있는 게냐?”
저편에서 들리는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니클라스가 펄쩍 놀라더니 서둘러 책을 등 뒤로 감췄다.
“할머님…….”
더운 날을 의식한 듯 취람색의 옷을 걸친 조모의 시선에 그가 리아스를 힐끔 살펴보았다.
“네 어머니가 너를 찾고 있을 게다.”
조모가 말하자, 니클라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등 뒤로 감췄던 책을 내밀었다. 조모의 손에 소네트를 넘긴 니클라스가 유모와 하녀를 끌고 저택 쪽으로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또 그냥 맞아 주었니?”
“…….”
“미련한 것.”
마뜩잖은 듯한 어조였지만 리아스는 고개를 들고 그냥 조모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조모의 목소리 속에 담긴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리아스는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