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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머리 바이킹이 되었다 4권
미래소년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1
1장
라그나는 나를 아느냐는 둥 쓸데없는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다.
그를 몰랐다면 하투실리 대왕이 이렇게 몸소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다만 자신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올 수 있었던 자신감의 근원이 궁금할 뿐이었다.
무력에 자신이 있나? 아니면 대왕으로서의 기개를 보여 주는 것인가.
라그나는 자신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하투실리 대왕이 세상을 불태울 검은 불길과 맞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눈동자에 두려움은 없었지만, 검은 불꽃에 영혼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그는 신도 아니었고, 반신도 아니었으며 그저 평범한 사람이 뼈를 깎아내는 역경과 고난을 통해 인간으로서 지고의 자리인 대왕에까지 오른 위대한 남자일 뿐이었다.
이에 라그나는 솔직한 감상을 내뱉었다.
“하투실리 대왕이여. 그대가 헤라클레스라 하여, 알키데스라 불리는 자보다 낫다.”
라그나의 말에도 대꾸 없이 침묵을 고수하던 하투실리 대왕이 별안간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도시의 묵직한 침묵 속에서 홀로 울려 퍼지는 대왕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어딘가 장엄하게까지 들리는 듯하였다.
“라그나료크여! 신들의 죽음이여! 오로지 인간만을 위하는 유일한 이여! 그대의 인정을 받았으니 이 하투실리도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도다!”
그렇게 외치더니 흐뭇한 미소를 그대로 머금고 라그나에게 말했다.
“어떠한가, 인간의 왕이 만든 도시의 모습은.”
“멋지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다스리는 도시도 아직 이보다는 못할 정도야. 그런데…….”
칭찬을 늘어놓던 라그나가 말을 늘이자, 하투실리 대왕의 얼굴이 궁금함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도시 사람들의 분변 처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도시에서 분변 냄새가 나질 않으니 정말 궁금하군.”
세상 진지한 얼굴로 사람 똥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들의 죽음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던 하투실리 대왕의 얼굴에서 다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사람 똥냄새의 지독함에는 저 무시무시한 신들의 죽음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구려! 암! 그 마음 내가 잘 알지! 잘 알고말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똥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니 말이야! 나와 함께 내 궁전으로 가시오! 이 인간들의 왕이 신들의 죽음도 겁에 질리게 한 사람 똥냄새를 어찌 무찔렀는지 소상히 밝히겠으니!”
하투실리 대왕의 너스레에 결국 라그나의 입에서도 커다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화가 났을 때처럼 천둥이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웃음소리는 하투샤의 전역에 넓게 퍼져 나가는 듯하였다.
* * *
라그나와 일레인 공주 일행은 하투실리 대왕의 초대를 받아 거처를 옮겼다.
라그나는 하투실리 대왕이 준비한 인력 가마를 타고, 대왕이 탄 가마와 동등한 위치에서 이동했다.
이것만 하더라도 하투실리 대왕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가 있었다.
양옆으로 도열한 병사들 사이로 꽃가루를 든 아리따운 무희들이 나와 대왕과 라그나가 행차하는 길에 연신 꽃가루를 뿌려 댔다.
인력 가마의 가마꾼들은 모두 키가 크고 힘이 좋은 근육질의 장사여서, 네 사람이서도 가마를 포함한 라그나의 무게를 너끈히 실어 날랐다.
가마는 사람이 지고 나르는 것 같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편안했다.
그들의 걸음이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특이했기 때문이었다.
라그나가 가마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그들의 손을 보니, 고된 단련의 흔적이 보였다.
이 가마꾼들은 단순히 하투실리 대왕의 노예들이 아니라 그를 지키는 호위의 역할도 같이 하는 것이라 짐작됐다.
왕궁악단이 대왕의 행차에 걸맞은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고, 통제되던 도시의 시민들이 뛰쳐나와 대왕의 이름을 연호했다.
하투실리 타바르나 만세!
내성벽에 다다르자 성문 기둥에 새겨져 있는 정교한 스핑크스 석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리따운 여인의 얼굴과 젖가슴, 암사자의 몸을 지닌 스핑크스는 정교하게 색칠이 되어 있었고, 목에 차고 있는 목걸이와 왕관은 금박을 씌웠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원래 이집트에 상징 아니었나?
원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라그나가 스핑크스를 유심히 바라보자, 이를 눈치챈 하투실리 대왕이 라그나에게 말했다.
“고대의 신들이 인간들을 다스릴 때 천상에서 죄를 지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 내려보내던 사자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라고 하더군.”
“당신이 직접 조각한 것이 아닌가?”
“안타깝지만 내가 아닐세. 우리 선조들이 이곳에 터를 잡을 때부터 이 내성 터에는 이미 성벽과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지. 우리는 그것을 보수하여 도시로 발전시킨 것이고.”
“그렇군.”
일행은 이제 왕의 문이라 불리는 내성문을 지나 내성도시로 진입했다.
과연, 하투실리 왕의 말대로 내성도시의 건축물들은 외성도시의 건축물들과 차이점이 있었다.
구운 벽돌에 회반죽을 발라 쌓은 외성도시의 건축물들하고는 다르게, 커다란 자연석 바위를 네모반듯하게 잘라서 건물들을 만들어 놓았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암석 절단 기술은 시대에 맞지 않는 오버테크놀러지였다.
건축물들의 크기도 큼직큼직하고, 건물에 붙어 있는 문의 크기도 무척이나 커다랬다.
때문이 도시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도시의 모습과 비교되어 마치 난쟁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실상은 그 반대로, 사람에 비해 건물을 비롯한 구조물들이 규격에 맞지 않게 커다란 것일 뿐이었다.
라그나는 이와 비슷한 구조물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할슈다르에 지어진 디칼리온의 지구라트와 같은 형식이었다.
할슈다르에서는 지구라트를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었는데,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이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어쩌면 할슈다르보다 더 많은 거인과 반거인들이 살아가던 도시였는지도 몰랐다.
과연, 도시의 중심에는 할슈다르와 같은 양식의 지구라트가 세워져 있었는데, 하투실리 대왕은 이를 자신의 궁전으로 삼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라그나와 하투실리 대왕을 태운 가마는 그대로 지구라트의 앞까지 갔고, 계단의 높이가 높아 지구라트를 오를 때에는 가마에서 내려야만 했다.
키가 큰 라그나와 하투실리 대왕은 계단을 편안하게 오를 수 있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다리를 높이 들어야 간신히 오를 수 있는 정도의 계단이었다.
지구라트 안으로 들어가니 신전과도 같은 내부의 중앙에는 단상과 커다란 옥좌가 놓여 있었고, 길게 깔린 카펫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놓인 커다란 원형 테이블 여럿이 놓여 있었다.
음식이 차려진 원형 테이블의 주변으로는 음식을 먹다가 쉴 수 있도록 침대와, 소파, 의자가 부족하지 않게 놓여 있었다.
“이미 내가 올 줄 알고 있었군.”
라그나가 말하자 하투실리 대왕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것뿐이오.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대가 손님으로 온 것이라면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할 수는 없으니 미리 준비하라 일러둔 것이지.”
그 말에 문득 라그나는 궁금했다.
만약 자신이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하투실리 대왕은 어떻게 행동했을 것인가.
그때, 궁녀들이 라그나에게 다가와 그의 옷을 벗기고 몸에 향기 나는 기름을 발랐다.
까악-!
라그나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트베이르만 쫓겨나듯 땅으로 내려왔을 뿐이었다.
갑자기 다가온 아리따운 궁녀들이 라그나가 입고 있던 키톤을 벗기자, 일레인 공주는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라그나의 몸에 꼼꼼하게 기름을 바른 궁녀들은 그에게 하투실리 대왕이 입은 것과 같은 비단옷을 입혔다.
마지막으로는 황금으로 된 관을 씌우고, 황금 목걸이와 팔찌를 채웠다.
라그나가 그저 멀뚱히 서 있어도 저들끼리 의자를 갖다 놓고 올라서서 관을 씌우고 목걸이를 채우는 등 알아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라그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였는데, 대놓고 빤히 쳐다보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 행동을 보았을 때 천한 신분은 아닌 것 같았다.
“판투의 여식들이오.”
판투는 하투샤의 귀족들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의회 자체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내 시녀들의 치장이 끝나고 비단옷과 황금 장신구로 치장한 라그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상에서 내려온 신 그 자체였다.
기름을 바른 피부는 마치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새하얀 대리석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하투실리 대왕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살면서 그대처럼 아름다운 존재를 본 기억이 있나 싶을 정도군.”
현대인이 듣기에는 성 정체성이 궁금해지는 발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지고의 아름다움을 목격한 것에서 흘러나온 순수한 감탄사였다.
라그나는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를 위해 이 도시에서 최고의 것들로만 차려 놓았으니, 부디 사양치 말고 마음껏 드시오.”
연회장에는 어느새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그들이 바로 이곳 하투샤의 귀족들인 판투들이었다.
판투들은 하투실리 대왕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는데, 라그나가 눈에는 그 모습이 사자를 동경하는 늑대 무리처럼 보였다.
귀족들은 라그나에게도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지만, 그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인간 같지 않은 위엄에 감히 함부로 다가오지도 못하였다.
그저 일레인 공주의 그녀의 기병들만 라그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닐 뿐이었다.
하투실리 대왕이 괜스레 귀족들을 소개한다 어쩐다 하면서 귀찮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그나는 테이블에 차려진 진미들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까악-!
일레인 공주 일행만 괜히 긴장하여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가운데, 까마귀 트베이르만 신나서 와인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 모습에 하투실리 대왕도 관심을 드러냈다.
“이렇게 큰 까마귀가 있나? 게다가 술을 물처럼 마시니, 영물이로군.”
“트베이르라고 하지.”
어느 정도 배를 채우고 나자, 하투실리 왕이 먼저 슬쩍 운을 뗐다.
“그래, 신들의 죽음이여. 나를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면 나의 도시를 방문한 연유를 물어도 되겠는가? 분변처리 방식이 궁금하여 갈리아에서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하투실리 대왕이 농을 섞어 말하자, 라그나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지.”
그리 대답하고는 라그나가 시선을 내려 일레인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일레인 공주는 순간, 흠칫 몸을 떨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하투실리 대왕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흐음, 그대는?”
“하투실리 대왕이여, 저는 일리온이라 하는 왕국의 공주, 일레인이라 하옵니다.”
“일리온이라, 분명 들은 기억이 있는 왕국이군. 그곳의 지배자가 분명 프라이모스라는 자가 아니었던가?”
“맞습니다, 대왕이여.”
하투실리 대왕의 호랑이 같은 눈에 이채가 어렸다.
“분명 내 부인 중에 그대와 같은 출신의 여인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투실리 대왕이 부인을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모여 있던 여인들 사이에서 일레인과 도저히 자매처럼 보이지 않는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라우리타 그대였나. 이렇게 보니 기억이 나는군.”
화려한 귀금속으로 온몸을 장식한 여인은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꾸몄는데, 얼굴이 아름다운 것과는 별개로 표독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그러고 보면, 분명히 2년 전쯤인가? 일리온의 정당한 계승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여 군사를 요청했었지.”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라우리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이를 인정했다.
한편 일레인은 뻔뻔한 라우리타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말았다.
2년 전쯤 돌연 하투샤가 미케네 연합에 참가한 배후가 그녀의 언니였었다니.
“어,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파리스 형부를 죽이고 결국에는 엘레나 언니까지 죽게 만든 원수들과 손을 잡고 일리온을 공격할 수 있단 말이야!”
일레인의 외침에 라우리타는 살포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존귀한 분들 앞에서 천박하게 목소리를 높이지 말거라.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저 나의 권리를 되찾고 싶었을 뿐.”
일레인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했다.
“언니가 가진 권리라는 게 도대체 뭔데?”
“당연히 유산상속의 권리지. 프라이모스의 딸로서 나도 그가 이룬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는 것 아니겠니?”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어!”
“오늘내일하시는 건 사실이잖니?”
“아무리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