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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클로저 4권
치킨살해범 스포츠 장편소설
목차
원 클럽 플레이어 (2)
답답해서 내가 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Base Ball the Han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세이브 조작단장
바른 생활 사나이
야구를 위해 태어난 기계
사나운 방울뱀 (1)
1
원 클럽 플레이어 (2)
메이저리그는 트레이드나 FA 제도 등이 굉장히 활성화된 리그다.
이곳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보장 금액이나 출장 시간이 보장된 팀으로 이적하길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메이저리그에서 선수가 자신이 데뷔한 팀에서 한 번도 이적을 않고 은퇴식을 치르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젠장, 저 아저씨가 다 부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군.”
클럽하우스에 심하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타나 선수들을 걱정시킨 팀의 주전 포수는, 오늘도 자신의 풍부한 감수성을 한껏 폭발시키고 있었다.
은퇴하는 당사자인 훌리오는 담담하게 팬들과 인사를 나눈 후 구단주에게 기념품을 받고 사진을 찍으며 미소 짓고 있는데, 영 엉뚱하게 다른 사람이 눈물 콧물을 다 쥐어 짜내고 있다.
안 그래도 장염 후유증이 심해서 요즘 죽만 드시는 양반이라서, 저러다가 또 탈수증상이 올까 봐 살짝 걱정되는데.
“폴, 훌리오가 부러워요?”
“당연하지. 선수라면 누구나 박수를 받으며 떠나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저렇게 은퇴식에서 팬들에게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보여주면서 말이야.”
“예, 여기 휴지요. 콧물 닦으세요.”
“…….”
사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팬들 앞에서 거창한 은퇴식을 하는 경우를 보기가 생각보다 힘들다.
심지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 중에서도, 훌리오처럼 제대로 된 은퇴식을 해본 사람은 손에 꼽을 수준이다.
물론 저렇게 몸값이 비싼 선수들의 은퇴식이 희귀해진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많은 돈을 받는 선수인 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메이저리거들이 자신들의 은퇴 시기를 잡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훌리오는 올해를 뛰었으면 200만 달러를 더 벌 수 있었어. 만약 프런트가 구단 옵션을 썼다면, 최소한 3년은 더 돈을 벌 수 있었을 거야. 나? 나라면 저렇게 못해.”
“음, 만약 그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는 시기가 온다면요?”
“그럼 일본이나 한국이라도 가야지. 아니면 독립 리그라도 찾아보던가.”
한 시즌에 무려 3,000만 달러를 넘게 받는 사람이 한다는 이야기가 저렇다.
우리는 한 시즌에 적게는 수억, 많게는 수백억 원의 돈을 받고 경기를 뛰는 메이저리거들이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렇게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부와 명예를 더 누리지 않고 깔끔하게 은퇴를 결정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다들 잘 생각해 보라고. 이렇게 재미있는 공놀이를 하면서, 팬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또 없어. 훌리오처럼 반지를 챙겨서 은퇴식을 하는 것도 꽤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부상 때문에 마흔을 넘기기 전에 야구를 그만두는 건 너무 아쉽잖아?”
훌리오는 자신의 부상 때문에 많은 경기를 뛸 수 없다는 이유로 계약이 남았음에도 은퇴를 결정했는데, 사실 이게 보기 힘든 특이한 경우에 속했다.
다른 선수들의 경우엔, 경기에 나가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파도 대부분 계속 버티면서 구단이 주는 연봉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하는 편이니까.
그렇게 독립 리그를 떠돌거나 스플릿 계약이라도 맺으면서 버티고 또 버티며 돈을 벌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은퇴식을 할 시점을 지나 잊힌 선수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뛰면서 돈을 벌 수 있도록, 다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해두라고.”
물론 나는 훌리오처럼, 저렇게 아까운 계약을 남겨두고 부상 때문에 빨리 은퇴하는 일은 없을 거다.
시스템이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부려먹고 있는 한, 빨리 은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몸이나 마찬가지거든.
…아니, 엄밀히 말하면 부려먹히는 게 맞지 않나?
물론 내가 비록 시스템 덕분에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또 많은 돈을 벌게 됐지만, 이건 분명 방치형 게임 캐릭터처럼 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돌부처의 버프가 발동합니다.]
[잡념이 사라지며 사용자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시스템, 감사합니다. 제가 당신 덕분에 꿀을 아주 잘 빨고 있습니다.
“플레이 볼!”
뭐 아무튼, 이제 훌리오의 은퇴 행사가 끝난 후 우리 팀의 기념비적인 이번 시즌 첫 홈경기가 시작됐다.
* * *
오늘 경기는 훌리오가 마스크를 쓰고 자신의 경력에서 마지막이 될 선발 출장을 하는 날이다.
아마 훌리오는 결과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오늘 경기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나와 함께 만들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오늘 결과에 룰렛 보상이 걸려 있으니, 어떻게든 이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아니, 시스템? 이런 식으로 하기예요? 전 진짜로 이번 페널티가 1,000pt인 줄 알았다니까요.”
[죄송합니다. 사용자의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페널티를 받기 전까진 돌발 과제의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하…….”
시스템 텍스트의 숫자를 얼핏 흘려 봤던 나는, 오늘 경기의 패배 페널티가 겨우 1,000포인트인 줄 착각하는 바람에 보자마자 대뜸 수락부터 해버렸다.
한데 경기를 시작하고 나서 다시 확인해 보니까, 이게 페널티가 1,000이 아니라 여기에 0이 하나 더 붙어서 무려 10,000포인트였더라고.
…물론 이건 텍스트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니 어쩔 수가 없다.
“밥 코치님. 저 오늘은 불펜 대기실에서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음? 어디 가려고? 라커룸에 가서 한숨 자려는 건가?”
“…아니요, 내야 벤치로 가서 오랜만에 승리 토템을 좀 하려고요.”
사실 나는 지금 팀의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없다.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의 특성상, 마운드에 올라가기 전까진 그냥 불펜의 응원단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응원만 하다가 팀이 져버리기라도 하면 내 피 같은 1만 포인트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기에, 나는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해보려고 했다.
1만 포인트면 내가 급할 때 쓸 수 있는 에너지 물약이 무려 스무 병이었고, 룰렛으로 얻은 버프 상품을 장착할 수 있는 슬롯 하나의 가격이었으니까.
“오, 한? 여긴 웬일이야?”
“제임스 감독 대행님, 오늘은 제가 벤치에서 응원 좀 하려고요.”
“하하, 굳이 감독 대행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아직 이 팀을 떠나고 싶지 않거든. 뭐 아무튼, 잭 그 친구가 몹시 반가워하겠군.”
“…….”
“존도 좋아하겠어. 그 유명한 승리 토템이 대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평소에도 계속 궁금해했으니까.”
“…….”
…과연 오늘 내 엉덩이는 괜찮을까.
“아, 유석아.”
“예, 형.”
“웬일이야?”
“그냥 응원하러 왔어요.”
“아…….”
뭐 아무튼, 오늘은 훌리오가 마스크를 쓰고 선발 출장하면서, 강남이 형은 자연히 벤치에 앉게 됐다.
이미 예정된 일정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렵사리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게 된 선수의 소중한 출장 기회 한 번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 이틀이면 애송이 포수의 출장 정지 징계가 끝나기에, 이 사람에게 보장된 선발 출장 기회는 내일 단 한 경기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열흘 뒤 폴 스미스가 돌아오면, 그땐 자리를 비우기 위해 무조건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야 할 상황이기도 했고.
“유석아.”
“예, 형.”
“나도 저 나이 많은 포수처럼, 이 구장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고 은퇴식을 할 수 있을까?”
“…….”
음, 내 이름을 육두문자로 발음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참 좋긴 한데.
하지만, 왜 이렇게 이 형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돌부처의 버프를 뚫고 안구에 습기가 차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한국에서는 최고의 포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 이렇게 짠한 이미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퍽!
“스트라이크!”
벤치 구석에 소심하게 앉은 강남이 형은, 이 와중에도 열심히 훌리오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와, 저 귀신같은 프레이밍 솜씨 좀 봐. 볼을 스트라이크로 만들어 버리네. 잘하긴 진짜 잘한다.”
“예, 훌리오가 어떨 때는 폴보다 더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나도 저런 포수가 되고 싶어.”
음,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지금 강남이 형은, 이전에 힘들어하던 페드로 녀석이나 조던처럼 자신감을 완전히 잃은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뭐, 이런 사람들 정신 차리게 만드는 건 내가 전문이긴 하지.
“형, 잠깐 제 이야기 잘 들어봐요.”
“응?”
이제 우리 팀의 1회 초 수비가 무실점으로 끝날 무렵, 나는 자신감을 상실한 KBO 최고의 포수에게 일침을 가했다.
“형, 형도 메이저리거예요.”
“…유석아,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건 고맙다. 하지만 나는 내 처지를 잘 알고 있어. 이제 열흘 후면 나는 트리플A로…….”
“잠깐만요, 형.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요.”
“…….”
“형은 지금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팀의 유니폼을 입고 이 자리에 있어요. 세계 최고의 팀에서 함께 뛰고 있다고요. 이 팀에서 뛰길 희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아…….”
“형은 내일 1회부터 마스크를 쓰게 될 거예요. 우리 팀에 포수가 없으니까. 잘하면 오늘도 대타나 대주자 같은 방식으로 나갈 수도 있겠죠. 자, 그럼 기회가 왔을 때 이거 하나만 생각해요.”
이 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즐기지 않고, 주변 상황이나 타인의 평가를 너무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하지만 강남이 형은 지독한 연습벌레로 통하는 나조차도 기겁할 정도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경우, 이룰 수 있는 한 가지 목표를 세워서 그것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든 결과를 내 볼 수 있는 타입이다.
“대주자로 나가게 되면, KBO에서 했듯 베이스를 훔쳐요. 형 한국에서 잘했잖아요? 영상 보니까 기가 막히던데?”
“도루라…….”
“그리고 타석에 들어서게 되면, 딱 하나만 노려요. 무조건 브레이킹볼.”
“…브레이킹볼을?”
“빠른 공은 존에 들어오든 말든 다 버리고 그거만 노려서 치라고요. 지금처럼 자꾸 상대 투수가 던지는 모든 구질을 잘 치려고 할 필요 없어요. 형도 브레이킹볼을 노리면 잘 칠 수 있잖아요?”
“아…….”
“형이 제일 잘할 수 있는 걸 해봐요. 여기서 후회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뭐라도 하나 크게 터뜨리고 가야죠.”
내 이야기를 들은 강남이 형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잠깐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식으로 한국 최고의 선수였던 자신에게 대놓고 못하는 건 싹 버리고 자신의 강점만 살리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마 나 말고 없었겠지.
“…유석아, 고맙다. 내가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예?”
“한 선배님이 내가 2군 선수 시절 해주신 조언이 방금 네가 말한 거였어. 하, 이런 병신 같은 놈. 나를 프로로 만들어 줬던 그 소중한 조언을 여태 잊고 있었다니.”
“…….”
“유석아, 고맙다. 정말 고맙다.”
…아, 아버지.
이게 이렇게 되네요?
* * *
“오늘 경기에서 첫 번째 투수로 나온 좌완 베테랑 레이 위버가, 2회 초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후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아, 두 베테랑 배터리가 마운드에서 인사를 나누는군요.”
“두 선수도 함께 뛴 지 굉장히 오래됐죠. 레이도 올해 애리조나에서 열두 번째 시즌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기죠.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