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남주가 나를 시한부로 착각한다 1권
지은이 : 오촘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 오촘, 2025
※ ISBN : 979-11-7313-921-5
※ 가격 : 3,900원
※ 발행일 : 2025년 04월 14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
이리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지금 죽어 가고 있었다. 삶의 끝에 도달해서일까?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너무 힘들었지.’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이리나 레더스의 인생은 기구했다. 그녀는 검술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검술에 대한 재능이 전무했다.
심지어 신체도 그다지 건강하지 않았다.
가문의 주치의는 이리나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탁기가 온몸에 가득해 검도 배우지 못하고 거동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스무 살을 넘기면 기적입니다.>
<마나를 사용할수록 점차 육체가 죽어 갈 겁니다. 탁기는 강해지고 점차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겠죠.>
검술을 익히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이리나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레더스 가문의 실패작.>
<검술 명가에 태어난 돌연변이.>
<아델 레더스의 약점.>
가문의 사람들은 이리나를 지독히도 천대했다.
그래도 이리나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언젠가 가문의 실패작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차라리 나를 지켜 줄 검술 명가에서 태어난 게 다행일지도 몰라.’
만약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채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이리나의 착각이었다.
검술 명가에서 태어난 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이리나의 아버지 아델 레더스는 이 세계의 흑막 집단인 악신 추종자들이 눈여겨보는 강자였다.
<네가 아델 레더스의 딸이구나.>
<그자가 그렇게 너를 아낀다지?>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납치되며 이리나는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전생을 떠올리게 됐다.
마치 머릿속에 글자가 입력되듯, 순식간에 펼쳐진 기억이었다. 그 이후부터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로 환생했다는, 그것도 흑막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말이야.’
작품에 따르면 이리나는 검술 명가에서 태어났으나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녔다.
그것도 그냥 뛰어난 것도 아니고 몇천 년에 한 번씩 나오는 천재였다.
≪멸망한 제국≫
이리나가 빙의한 소설의 제목이었다.
‘기억이 떠오를 거라면, 차라리 납치당하기 전에 떠올랐으면 좋았잖아.’
그렇다면 최소한 정해진 운명에 대해 발악이라도 해 봤을 텐데 말이다.
미래를 늦게 알아챈 것도 죄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동안 너무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리나는 죽지 못해 살아갔다.
주치의의 말은 틀렸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살아남았어.’
그는 이리나의 마법적인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추측이었다. 이리나는 마법으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고 그로 인해 긴 시간 생존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용해 스스로 탁기를 정화했다.
악신 추종자들은 그녀가 마법의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떠들어 댔다.
‘평생을 이용당했지.’
어쩌면 곧 닥칠 죽음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리나는 자신의 배를 꿰뚫은 검을 바라보았다.
‘결국, 주인공에게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이 소설 속의 주인공, 케드릭 아크네에게 말이다.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아나?”
이리나는 배를 더듬었다.
신성한 힘이 담긴 성검은 그녀의 몸이 가진 괴물 같은 회복력을 억제했다.
투득, 피가 흘러내렸다.
“마녀 프리제타. 지금까지 네 힘 때문에 죽어 간 자들을 알 것이다.”
“나는…….”
“죽음으로 속죄해라.”
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구절절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리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죽어도 싼 인간이니까.’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손을 들어 올렸다.
팔에 주렁주렁 매달린 마나 구속구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녀는 케드릭의 팔을 붙잡았다.
케드릭은 이리나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따뜻해.’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를 느껴서일까. 가족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이즈키엘…….
가문에 있을 땐 눈치채지 못했던 그들의 따뜻한 눈빛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보고 싶어.”
“이봐, 대체…….”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이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마지막 순간 이리나가 본 건, 당황한 듯 일그러진 케드릭의 얼굴이었다.
* * *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소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울렸다.
“죽여! 저곳에 이리나 레더스가 있다.”
“남매만 생포하고 다른 놈들은 죽여도 좋다.”
온몸이 무거웠다.
이리나는 꿈쩍도 않는 손을 겨우 들어 머리에 올렸다. 불덩이같이 뜨거운 이마가 느껴졌다. 이상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분명 병은 다 나았었는데…….’
마치 병약하던 어릴 때 같았다. 몸이 약해 툭 하면 쓰러지곤 하던 그때 말이다.
귓가에 누군가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리나, 괜찮아.”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손길이 따뜻했다. 이리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목소리가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 목소리를 절대 잊을 수 없지.’
그녀의 오라버니 이즈키엘이었다.
꿈에서라도 나오길, 나와서 예전처럼 까칠하게 굴어 주길 그렇게 바랐는데 절대 나오지 않더니.
죽고 나서야 그가 꿈에 나오는 걸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모든 일이 끝나 있을 거야.”
이건 악몽인 걸까.
이리나는 이 뒤에 이즈키엘이 할 말을 알고 있었다. 수천 번도 더 넘게 떠올린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겠지.
<내가 널 지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즈키엘은 이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지킬 테니까.”
거짓말.
이리나는 나오려는 말을 집어삼켰다. 이즈키엘은 이곳에서 그녀를 지키지 못한다.
이리나는 무거운 눈을 억지로 떴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이즈키엘이 있었다.
‘어린 이즈키엘이네.’
이리나는 인상을 썼다.
그의 푸른 눈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은발에, 푸른 눈동자. 파리한 안색의 소녀.
“이즈키엘.”
그녀는 마나를 운용하려 했다. 이즈키엘의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어 시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리나는 당황했다.
그녀의 뱃속에서 항상 꿈틀거리던 거대한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꿈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이 존재할 리 없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이즈키엘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었다.
그가 보고 싶을 때면 상상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용자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마법은 갈수록 흐려지기만 해 이즈키엘을 온전히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즈키엘은 달랐다.
그는 진짜로 살아 있었다.
이리나는 다급히 그의 심장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쿵쿵, 거세게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들렸다.
“이즈키엘……?”
“이리나?”
이즈키엘을 다시 만난다면, 이리나는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녀는 그중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이 바보 자식아.”
“뭐, 뭐?”
“오빠는 사실 날 좋아해, 그렇지?”
이즈키엘은 가문에 있을 때 이리나에게 쌀쌀맞게 대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게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