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2권
지은이 : 여문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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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2권
여문
목차
4장.
5장.
6장.
4장.
사교 모임에 대비하랴,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약혼식 준비도 거들랴 정신없이 하루들을 보내는 와중.
카를린님의 주도 아래에 라오트와 얼굴을 맞대고서 포도를 따 먹는 것도 벌써 나흘째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투덜대더니 소용없다는 걸 받아들였는지 이제는 좀 얌전해졌다. 사실 한 공간에 있어도 각자 할 일을 하니까 무시하기로 정한 걸지도 몰랐다.
“라오트님.”
아에테가 줬던 서류를 뒤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라오트님도 푸른 잎사귀 모임에 참석하세요?”
“아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답은 간결하지만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오히려 저 성격에 간다고 했으면 그게 더 의외였을지도.
“그렇구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내 일에 집중했다. 슬쩍 나를 향한 라오트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뭐야?”
“뭐가요?”
“왜 이유 안 물어봐?”
의도치 않은 공생을 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면, 라오트가 은근 성가시다는 거였다. 관심 가지면 귀찮아하면서 또 신경 쓰지 않으면 언짢아한다. 자기가 무슨 고양이야?
“왜 불참하세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이 삐딱해졌다. 턱을 괴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끝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짜증나잖아. 눈치만 보고 불편해하는 기색은 숨기지도 못하고.”
금방 이해가 된다. 확실히 어렵지 않게 상상되는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너는 딱히 그렇지도 않네?”
“좋은 뜻이에요?”
이번에는 답하고 싶지 않은지 입을 다물어 버린다. 라오트가 짚었던 대로 나는 한결 그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까.’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 확신만 든다면 나는 맹수와도 탈 없이 지내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그거 형님이 준 거지?”
라오트가 파일을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음, 네.”
“남한테 그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이 아닌데.”
용건은 그 뒤에 있었다.
“너는 형한테 고마워해야 돼.”
그렇지 않아도 아에테에게 보답할 작정이었으니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지내느라 답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 지체되다가는 아무래도 아에테에게 별 소리를 다 들게 될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선물을 해 드리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해.”
그새 포도를 다 해치운 라오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황급히 따라 나갔으나 이미 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련은 늘 다양하게 찾아오네.’
로잘린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그녀도 마땅한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어지간한 건 이미 가지고 있을 거라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직접 만드는 건 어때?”
고아원에서도 바느질 같은 가사는 맡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손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정성이 중요한 거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싶은데.
“오, 글쎄요…….”
정성은 별로라는 거군. 이후에 쥐어짠 아이디어들도 족족 퇴짜를 맞아 의욕이 증발해 버렸다. 겨우 기운을 내 상업지구까지 나와 봤으나 아에테의 눈에 찰만한 물건은 찾기 힘들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기는 해.”
“둘러볼 곳은 아직 많으니 다음에 다시 와요.”
그렇게 어떤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히이이이잉―
마차가 갑작스럽게 멈추어 섰다.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질 뻔한 반동이었다. 내 몸은 다행히 로잘린이 붙잡아 주었다.
“……뭐지?”
“무슨 일이 생겼나 봐요. 제가 확인해 볼게요.”
로잘린이 완전히 일어선 순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가라앉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별일 아닐 거예요.”
나를 안도시키려고 하지만 문도 열리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부터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잭 씨! 도와줘요! 문이 안 열려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이런 젠……!”
로잘린은 겨우 욕설을 참아내고서 다급히 마차 창문을 열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얼른 나가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시트를 밟고 올라가 창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갑작스레 강렬한 구토감과 현기증이 들이닥쳤다. 기우뚱 넘어가는 몸을 멈추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당연히 로튼베일 저택의 내 침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건 오로지 암흑뿐이었다.
겨우 어둠에 익숙해져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나, 납치당한 것 같은데.’
오로지 철제문만 달랑 있는 좁은 밀실이었다. 호흡이 불규칙하게 가빠지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겨 봤으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장님인가? 아니면 라헤스?’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워진 본능이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굳어 있기도 잠시 나는 얼른 다시 바닥에 누웠다. 원장님이든, 라헤스든, 누군가를 맞닥트릴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숨을 죽이는 게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온몸에서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심장박동이 격렬한 탓에 좀처럼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눈을 질끈 감고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점차 가까워지던 발걸음이 이윽고 멈추어 섰다.
“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나를 훑는 시선이 느껴진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문구멍 너머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리라.
“애라서 그런가 보지. 내버려 둬. 급한 건 아니니까.”
낯선 목소리가 혀를 한 번 차더니 그대로 가버린다. 그럼에도 안심할 수 없었던 나는 한참을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금방 또 확인하러 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다시 나를 찾기는 할 거야.’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을 치맛자락에 문지르며 차분히 상황과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래도 원장님이나 라헤스가 저지른 짓 같지는 않아.’
한결 침착해지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나를 되찾기 위해 에던데일 가와 척을 지는 건 무모한 짓이다.
‘제대로 된 사고 능력을 갖췄다면 이런 수작을 벌이는 게 말이 되나.’
거기다가 나는 이제 원장이 내놓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니 라헤스도 나를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주위에는 이런 납치극을 벌일만한 사람이 없었다.
‘……에던데일 가와 관련 있는 자들일 것 같은데.’
일단 정황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누가 얼마 전까지 고아였던 여자애를 노리겠어? 첫 문제에 대한 답을 도출해 내자 다른 문제가 새롭게 떠올랐다.
목적이 무엇일까?
‘가문과 엮여있는 게 정답이라면 나는 유추도 할 수 없어. 패스.’
나를 살려서 돌려보내 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인질로 사용되지 못한다면 이대로 사라질 확률이 더 높아…….’
모두 나에게 잘해주기는 하지만. 과연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구해주려나.
‘자신이 없네. 그건.’
좋아. 그럼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히 몸을 일으키고서 문 가까이 다가갔다. 손잡이는 없었다. 몸으로 밀어 봐도 꿈쩍도 안 한다.
‘아니. 설령 이 방에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여기가 어디고,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고, 따돌려야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잖아.’
다음. 여기서 죽는게 내 말로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차라리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때쯤 문이 열렸다.
“뭐야.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네? 따라와라, 꼬맹이.”
***
잭 아이런. 이름을 들이밀 정도는 아니지만 품위를 지킬 수준은 되는 고만고만한 가문의 차남.
재산 대부분은 가주가 될 형님 차지에, 부모님은 얼굴만 보면 도박을 끊으라는 잔소리만 늘어놓았다. 차별이고 핍박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까지 이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용돈은 늘 주시니까.’
평소처럼 친구들과 게임을 즐기고 기분 좋게 취해 새벽에 귀가하던 날이었다. 시간이 늦은 만큼 다들 잠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따라 저택은 유달리 고요했다. 스산한 분위기마저 느껴졌지만 잭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게 부츠만 대충 벗어놓고 잠들었는데…….
“잭 아이런, 당신을 존속살해 혐의로 체포합니다.”
술이 덜 깬 상황에서 구속 사유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경비에게 잡혀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사건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런 자작 내외와 장남이 침대 위에서 죽었다고. 신고자는 가문의 집사장. 사건의 범인으로 잭을 지목했다.
“내,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저는 그때 밖에 있었다고요!”
알리바이가 확실했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범죄자가 되어 오랜 수감 생활을 버텨야만 했다. 형을 다 채우고 출소했을 때는 전부를 잃은 후였다.
사용인들은 다들 도망간 지 오래, 친구들은 잭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저택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술집을 전전하며 폐인처럼 사는 잭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시비나 걸려고 찾아온 거면 꺼져.”
“당신,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복수. 누군가에게는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운 유혹. 잭 역시도 복수를 꿈꾸던 시절이 있기는 했다. 그는 멈칫했다가 눈을 부라렸다.
“너 누구야! 나 알아?”
“오, 그럼요. 우선은 당신과 목적이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해야겠군요.”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기묘한 느낌을 주는 후원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잭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도.
“아니, 아니. 잠깐. 그러니까…… 이 일의 배후가 에던데일 대공가다, 이 뜻?”
“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생각지도 못한 대상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에던데일 공작가가 어떤 곳인가. 권력과 재력의 정점, 황실과도 대적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가문이었다. 기세 좋게 응한 것이 무색하게 의욕이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아니. 근데, 그런 가문이 왜 우리를…….”
“음, 뭐 당사자니까 알려줘도 괜찮겠죠.”
후원자가 들려준 진실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아이런 가는 황실의 지저분한 심부름을 도맡는 가문 중 하나였다는 거다.
“이번 에던데일 대공은 전대보다 더 깔끔하시지요.”
일종의 청소였다는 뜻. 결국 고래 싸움에 새우였다는 소리인데, 뒷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잭은 이 판에 끼어들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주춤거리자 이를 눈치 챈 후원자는 적극적으로 나왔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런 자작.”
“……자작이요. 전 승계받지 못했는데.”
“긴 싸움이 되겠지만 이 작전이 무사히 성공하면 그렇게 불리게 될 겁니다.”
아주 노련하게 욕망을 건드리며 잭을 끌어들인다.
“대공가에 아주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가 들어왔어요. 우리는 그 카나리아를 노릴 겁니다.”
“큼. 그걸 어떻게 복수라고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