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1권
지은이 : 여문
펴낸곳 : 디키 웹소설(교보문고)
ⓒ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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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대공가에 약혼자만 셋입니다
1권
여문
목차
1장.
2장.
3장.
1장.
1. 산크튜 고아원은 개인의 시간을 존중하나 매주 월요일마다 오전 아홉 시 조회와 오후 일곱 시 저녁 식사는 함께해야 합니다. 
이때 베르제네라는 이름의 소녀의 주변은 피하십시오. 만일 소녀가 먼저 다가왔다면 친절하게 대해 주십시오. 먼저 해를 끼치지 않으며 목적을 이룬다면 금방 물러날 것입니다.
2. 산크튜 고아원에는 허락 없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과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전자는 원장실과 와인 창고, 식품 관리실, 지하실입니다. 후자는 삼 층 아홉 번째 방입니다.
방의 주인인 베르제네는 고아원의 아이들과 교류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찾는다고 말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따르지 마십시오. 만일 실수로 방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사과 후 바로 나오십시오.
베르제네는 짜증을 내더라도 당신을 쫓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의무실을 방문하십시오.
3. 고아원생들은 일요일에 외출이 가능합니다. 단, 교사에게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며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밖에서 무얼 하든 자유지만 베르제네가 무얼 하든 궁금해하지도, 따라가지도 마십시오. 우연히 목격하게 되더라도 베르제네가 당신을 알아채기 전에 도망가십시오.
……놀랍게도 이 나폴리탄 괴담 같은 경고문의 베르제네가 바로 나였다.
내가 이런 위험 분자 취급받는 사정을 설명하려면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도시에 역병이 돌았는데, 내가 신세 지고 있는 산크튜 고아원도 피해갈 수 없었다.
‘나도 덩달아 아팠었고.’
뇌가 녹아버릴 것 같이 시도 때도 없이 열이 올랐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올라왔으며, 기도가 부어 숨 쉬기가 어려웠다.
왕실에서 의사를 파견해 사태를 일단락시켰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은 뒤였다. 산크튜 고아원의 아이들도 절반이 넘게 죽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닌지 나는 어떤 후유증도 없이 잘 살아남았다. 대신 저주의 힘이 더 강해져서 그렇지.
고아원에선 다른 아이들과 함께 실내를 청소하고 주인 잃은 물건을 태웠다. 그러고서 모두 가장 단정한 검정 옷을 입었다.
“빈자리가 많은 게 이렇게 실감 될 줄이야. ……잘 따라오거라. 괜히 엉뚱한 곳으로 새지 말고.”
이 시국에 땅에 묻히는 건 사치였기에 화장해 근처 강가에 유골을 뿌리기로 했다. 손에 하나씩 유골함이 들린 건 다 그런 이유였다.
“왜 네가 아닌 건데!”
앞에서 내내 훌쩍거리며 울던 마가릿이 교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내게 소리를 질렀다.
“왜 죽은 사람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잔인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친한 애가 이번 일로 죽었다는 것 같기도 하다.
황당해져서 친구가 그렇게 소중하면 따라가지 그러냐고 맞받아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왜 저 말에서 데자뷔를 느끼지?’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우선 대답이 늦어지니 나한테 한 방 먹인 줄 알고 의기양양해하는 저 얼굴부터 치워야겠다.
“아름다운 우정이야. 끝까지 함께했으면 나라에서 훈장을 줬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아쉽겠어, 마가릿.”
멍청해도 자기 욕하는 소리는 바로 알아듣는다. 마가릿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원장님에게 달려가더니 곁눈질을 하며 열심히 속닥거렸다. 내가 하는 말을 꼰지르는 것이다.
추모가 끝나 고아원으로 돌아오자 원장님은 곧장 나를 불렀다.
“왜 그렇게 못된 말을 했니?”
당연히도 마가릿은 자기 얘기는 쏙 빼놓았다. 나는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꾸며냈다.
“못된 말을요? 제가요?”
“마가릿에게 따라 죽으려고 했다며.”
“음, 원장님도 아시잖아요. 마가릿이 극단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요. 많이 슬퍼하기에 격려해 준 거예요. 끝까지 함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요.”
원장님은 아무래도 내가 악의 없이 한 말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베르제네.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단다.”
“그렇지 않아도 반성 중이에요.”
“좋아. 그러면 벌은 어떤 걸로 하는 게 좋겠니?”
“오늘 원장실 청소 제가 할게요.”
청소는 처벌로 채택되는 것 중 하나였으므로 원장님은 쉽게 허락했다.
나는 그녀가 나가자마자 바로 바쁘게 움직였다. 청소는 무슨, 단서를 찾기 위해서였다.
‘데자뷔를 느꼈던 게 <오로지 거룩하소서> 외전 도입부랑 똑같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거든.’
성녀인 여자 주인공이 성기사인 남자 주인공과 함께 악을 처단하면서 명예를 회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말이지 놀랍고 황당하게도 나는 책 속 인물로 태어난 것이다. 서브남주인 황태자의 아름다운 정부, 베르제네로.
정확히는 그의 숨겨진 최측근으로 역병 때 강해진한 ‘저주’를 이용해 세력을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금만 견디면 고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겠구나 하고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베르제네는 잔뜩 이용당하다가 죄를 다 뒤집어쓰고 처형당하니까.’
성녀가 황실의 추악한 뒷면을 들쑤시자 황태자는 그 죄를 ‘베르제네’가 다 짊어주기를 바랐다.
성녀가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 건 싫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나는 황태자를 어떻게든 피해야만 하는 것이다.
외전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나는 5년 뒤, 열다섯 살에 원장님에게 배신당해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진다.
‘저주’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는 희귀성이 있었기에 나는 경매장에 서는 대신 귀한 손님에게 내보여진다.
‘그 손님이 바로 황태자, 라헤스였고…….’
“나와 함께 가자.”
창공의 2황자. 촘촘한 속눈썹 밑에 고여있는 싱그러운 푸른빛이 베르제네의 마음을 푹 젖게 만들었다.
“내 너를 귀애해 주마.”
 
나와 소설 속 ‘베르제네’가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베르제네’가 왜 라헤스에게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워서 돌아버리려고 하는 나한테 처음이자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존재니까.’
라헤스는 손을 잡아주지도, 안아주지도 않았지만 귀애하겠다는 약속만큼은 완벽히 지켰다.
매일 꽃다발과 함께 자필로 시 구절을 적은 카드를 보냈고, 사교 시즌 말에는 함께 별장에 가 시간을 보냈다.
‘베르제네’는 처형대에 서게 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라헤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타던 날, 그를 위해 살고 죽어야겠다고 다짐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똑같은 미래를 밟고 싶지는 않아.’
고아원 아이들의 인적사항이 담겨져 있는 서류 파일을 뒤적여보다가 얼마 안 가 빠르게 덮었다.
내 파일에 찾아 적힌 문구를 확인했거든.
희귀 등급. 각별히 관리할 것.
고작 열두 살, 그 무엇도 스스로 결정할 수도, 행할 수도 없는 나이. 내게는 무엇으로부터든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아무래도 원장님은 입양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스스로 구해야만 한다.
‘일반 가정집은 안 돼.’
내가 가진 ‘저주’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적임자가 바로 에던데일 대공이었다.
본편에서 ‘베르제네’가 라헤스의 명을 받고 암살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에던데일 대공에게는 ‘저주’가 통하지 않았다. 잔뜩 상심해서 실패를 보고하니 라헤스가 뭐라고 했던가.
“유년기 때부터 독에 대한 면역력을 키운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황실의 편이니.”
에던데일 대공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셈이었다.
하나. 나를 곁에 둬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둘. 황실과도 대적할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대공과 접촉하냐는 건데…….’
에던데일 대공은 황제의 대관식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도 첫째 아들을 대리인으로 보냈었다.
‘따로 외부 활동을 한다는 얘기도 소설에서는 안 다뤄졌던 것 같은데.’
했다고 하더라도 본편은 지금으로부터 10년 뒤라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귀족 가의 여식이라면 어떻게 비벼볼 거리가 있었을 텐데. 
사용인으로라도 지원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나이의 하한선이 있거니와 추천서가 필요했다.
‘산크튜 고아원을 후원해 주는 가문 중에서 대공에게 나를 소개해줄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자도 없고.’
물론 소개해 줄 만한 이유도 없었다.
너무 막막해서 차라리 무작정 찾아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문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쫓겨날 게 뻔하지만.
다 헤집어놓은 원장실의 정리를 끝내자 저녁 시간이 되어, 그만 식당으로 내려갔다.
‘저주’ 때문에 6인실 방을 혼자 쓰는 만큼 식탁도 넓게 쓸 수 있었다.
‘애들이 내 주변에는 아무도 안 앉았거든.’
입안이 썼다.
방 안에서 혼자 먹어도 되는데, 굳이 가족이니까 식당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던 게 원장님이었다.
그렇게나 챙겨주던 사람이 나를 팔아넘긴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참 어렵다.
모든 아이들이 착석하자 원장님이 박수를 쳐 주목시켰다.
“자, 주어진 음식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드리자.”
지겨운 기도문을 다 외우고서 채소 스튜를 떠먹는데, 남자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 물건이야? 훔쳤어?”
“뭐래. 심부름 값으로 뒷골목 지부에서 산 거거든?”
아무래도 방법…… 찾은 것 같은데.
대귀족은 은밀하게 가문마다 뒷거래로 이익을 챙겼다. 에던데일 대공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 본편에 여주가 그 시장을 터는 에피소드가 있었지.’
각 도시에는 물품들을 관리하는 지부가 있다고 했다. 
특정 귀족의 것은 아니고 각 가문에서 물건을 받아 거래 대행을 해주는 곳이었다. 일단 내 계획은 이랬다. 
대공이 관심 가질만한 아이템을 내놓는다. 잘 공급하다가 도중에 거래를 끊어 접근하게 만든다.
‘마침 내게 획기적인 아이템이 있으니까.’
바로 내 ‘저주’. 
체액부터 체온, 거기다 숨까지도 모든 게 다 사람에게는 해를 끼쳤다. 독이나 다름없었다.
여태껏 발견된 적 없고 증거도 남기지 않는 독은 가치가 있으니 분명 팔릴 거라고 확신했다.
‘지부의 위치를 모르기는 하지만 찾으면 돼. 어차피 시간은 많아.’
원래는 오로지 일요일에만 외출할 수 있지만 나는 그보다 더 자주 밖에 나갔다.
역병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새로 들어오면서 원장님과 교사들이 바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건물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는데 웬 남성이 다가왔다.
“왜요?”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계속 혼자인 것 같아서 말이다.”
아직까지는 속셈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의심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