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이 결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이 결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이 결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목차
6-2.
7.
8.
9-1.
이 결혼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3
6-2.



플로렌스는 우울했다. 그건 그녀가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커다란 영예의 자리를 떠안은 이래 늘 부산물처럼 따라왔던 감정이었다.
처음 리하르트가 플로렌스를 정혼자로 지목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저 고귀한 남자의 짝이 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온 사방에 자랑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고 실제로도 가끔은 그렇게 했다. 모든 영애들이 플로렌스를 부러워하면서도 그녀의 눈 밖에 날 것을 두려워했으니 세상은 이미 반쯤 그녀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었지만.’
플로렌스가 착각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하르트가 직접 그녀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도 그는 늘 그녀에게 무심했다. 직접 찾아가면 바쁘다는 핑계로 문전박대하기 일쑤였으며 공석에서도 그녀의 입장 따윈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았다.
차라리 정략결혼의 상대로만 여길 수 있었더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플로렌스는 그를 사랑했다. 그게 그녀가 겪은 모든 비극의 근원이었다. 리하르트를 사랑했기에 플로렌스는 그가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이해하려 했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가 그런 사람임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하르트는 본디 아름답고도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제국 제일의 미인은 황태자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천사 같은 외모를 지녔으나 그 피부 아래 숨은 성정은 크게 뒤틀려 있었다. 타인의 실수에 민감한 그는 수시로 아랫것들을 갈아 치웠고 대신들 앞에선 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나라를 책임질 재목이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신하들이 많았으나 황제가 슬하에 둔 자식이 오직 그 하나뿐이었으니 말뿐인 반대야 아무 의미가 없었다.
리하르트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못된 사람이었고, 그리 생각하면 그가 그녀에게 특별히 나쁘게 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플로렌스는 고작 그런 사실에 위안받았다. 리하르트에게도 예외가 있다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진.
‘이오나 모드로프.’
황태자의 호위 기사, 어려서부터 리하르트를 보필했던 그만의 충견, 늘 무표정한 낯을 하고 있어 더 인형처럼 아름다운 여자…….
처음 이오나와 만났을 때 플로렌스는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플로렌스의 시녀들은 황태자의 측근이 하필 어리고 예쁜 여자라는 데 적잖은 우려를 표했지만 플로렌스는 상대를 실제로 보곤 외려 안심한 축이었다. 리하르트가 모두에게 날을 세우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오나는 반대로 모두에게 똑같이 무관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리하르트에게조차 딱히 진심을 다하는 것 같지 않았다. 주군을 향한 맹목적인 충심을 가진 이라면 으레 뿜어낼 법한 열기가 그녀에겐 없었다. 저런 인형 같은 여자라면 주군에게 언감생심 연애 감정 같은 걸 품지도 않을 것이라, 플로렌스는 안이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반대 경우는 상상도 못 하고 말이야.’
이오나는 플로렌스가 예상한 대로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리하르트에게 무심했다. 지금 와서 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리하르트는 지고한 황태자 신분이었고 그의 눈에 들고자 하는 야망 넘치는 젊은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저 시키는 일에만 잘 따를 뿐, 그 쉬운 아부 한번 떠는 법이 없던 그녀가 어떻게 그의 측근 자리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걸까.
답은 간단했다. 리하르트가 그녀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플로렌스 님, 오늘도 리하르트 님은 아침을 들자마자 밖으로 나가셨대요.”

플로렌스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양껏 비를 머금은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여름날의 일이다.
그해 플로렌스는 운 좋게도 황실 사람들과 함께 여름 휴가를 떠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리하르트의 무심함에 지친 그녀가 시름시름 앓자 보다 못한 란츠호프 후작이 나서 황제에게 완곡한 항의를 전한 덕분이었다. 후일 결혼할 두 남녀에게 정을 쌓을 기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황제는 선뜻 휴가를 함께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플로렌스는 기대에 부푼 채 황실 소유의 별장으로 떠났으나, 현실은 다소 암담했다. 리하르트는 제 약혼자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홀로 시간을 보내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외진 곳으로 사라지고 있는 탓에 플로렌스는 약혼자의 얼굴조차도 구경하기 힘들었다. 이래서야 수도에 있을 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플로렌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또 한발 늦었나 보구나.”
“황태자 전하도 참, 어쩜 이렇게 무심하신지, 이럴 때라도 플로렌스 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시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곧 있으면 휴가도 끝인데 언제까지 이러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리하르트의 무심한 행태에 플로렌스의 시녀들이 입을 모아 불평을 쏟아 냈다. 후작가의 고명딸로 귀하게 자라 온 플로렌스가 정작 약혼자에겐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네들의 큰 불만이었다.
그때 한참 눈치를 보던 시녀 하나가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플로렌스 님, 오늘은 리하르트 님을 직접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떠세요?”
“직접 찾아가라고?”
“제가 일찍 일어나서 뭣 좀 엿들은 게 있거든요. 이오나 경이 아까 주방에 와서 도시락을 부탁하셨는데, 그러면서 황태자님께서 드실 음식이라고 당부하시더라고요.”

모두가 제 말에 집중한 걸 확인한 시녀가 으스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밖으로 나오시는 걸 제가 딱! 붙잡아서 모르는 척 어디 나가시냐고 여쭤봤더니, 호수 쪽으로 가신다고 해서 바로 머릿속에 넣어 두고 플로렌스 님께서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근방에 호수라면 딱 한 곳이 있었다. 꽤 넓은 크기이긴 해도 말을 타면 못 둘러볼 거리는 아니었다. 혹여 왜 따라왔냐며 추궁당해도 물놀이를 나왔다는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마음에 걸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녀들은 신이 나서 당장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시녀 셋에 심부름을 들 하녀들까지 모이자 꽤 그럴듯한 나들이 행렬이 완성되었다. 플로렌스는 털에 윤기가 흐르는 백마를 타고 무작정 호수로 출발했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모두를 끌고 다니긴 무리가 있어, 플로렌스는 그들에게 물놀이를 하고 있으라 명하곤 혼자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리하르트와 마주쳤을 때 혹여 박대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리하르트가 저를 보고 반가워한다면 그를 물놀이 장소로 데려가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를 발견하지 못한 셈 치고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생각이었다.
플로렌스가 리하르트를 발견한 건 호수 외곽을 정확히 반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근처에서 들려온 말소리가 플로렌스의 귀를 잡아챘다. 홀린 듯 소리가 난 방향으로 다가가던 플로렌스는 이오나가 뒤를 돌아보려 하는 걸 느끼곤 무의식적으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왜 그러지?”
“어디서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아서요.”
“그러지 말고 옆에 와서 앉아, 명령이야.”
“앉은 자세론 불시의 습격에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불시의 습격을 당한다 해도 난 널 제물로 바치고 발 빠르게 달아나 주지. 그러니 안심하고 앉아.”

그 말도 안 되는 발언에 설득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오나가 주춤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리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이오나가 바닥에 깔린 천 위로 넘어졌다. 이오나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리하르트가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앉을 테니 이만 놔주십시오.”
“어깨에 힘 빼고 낮잠이라도 자. 긴장 풀린 것 같으면 놔줄 테니.”
“전 전하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겁니다.”
“내 명령을 거역하는 건가?”

누가 봐도 리하르트는 억지를 부리고 있었으나 그 억지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오나는 리하르트가 시키는 대로 그의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제야 이오나의 손을 놓아준 리하르트가 자세를 편히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눈 감은 이오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정말이지 오래도록, 다른 곳으로 관심 한번 돌리지 않고 아주 검질기게…….

“눈 뜨지 마, 이오나.”

리하르트가 속삭이듯 경고했다. 플로렌스에겐 그 말이 꼭 제 마음을 들키기 싫다는 뜻처럼 들렸다. 리하르트는 이오나를 눈 감게 하고서야 밀린 욕심을 채우듯 남몰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리하르트는 그의 마음을 드러낼 어떤 행동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러나 플로렌스는 이를 대체 사랑 외의 무슨 감정으로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오나를 일으켜 리하르트의 곁에서 밀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도 아니면 리하르트에게 가서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자신과 약혼했느냐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알면서 왜 하필 나를 골라 그 이름뿐인 자리에 앉혀 두었냐고…….
물론 플로렌스는 그중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달아났다.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되뇌며 숲길을 달려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물놀이와 시녀들의 웃음소리는 플로렌스의 불안을 효과적으로 희석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생각 하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안에 남았다.
그날 이후 플로렌스는 이오나를 마주칠 때마다 맹렬한 감정이 불타오르는 걸 느꼈다. 그것은 주로 분노의 모습으로 표출됐으나 그 안에 담긴 성분은 다양했다. 질투와 멸시, 열패감과 서러움, 외로움과 고독, 죄 없는 사람을 잡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일말의 죄책감까지.
플로렌스는 이오나가 리하르트를 이성적인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그 사실은 외려 플로렌스가 이오나를 더욱더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이오나가 자신만큼 그의 마음을 욕심냈더라면 차라리 억울하지라도 않았을 것이다. 플로렌스는 자신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 다른 이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게, 정작 그치는 본인이 그걸 가진 줄도 모른다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파혼하게 될지도 모르겠어.”
플로렌스가 손에 들린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리하르트에게 보냈던 서신이 포장조차 뜯기지 않고 고스란히 반송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플로렌스는 이오나의 뺨을 때리고 궁에서 쫓겨난 이래 한 번도 리하르트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며 사죄의 편지만을 부지런히 써 보내고 있었으나 상대는 늘 묵묵부답이었다.
플로렌스는 몹시 지쳤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에 얼굴은 거의 반쪽이 되어 있었고 안색 또한 과히 좋지 못했다. 플로렌스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건 리하르트가 그런 그녀의 상태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거란 점이었다.
플로렌스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촛불에 편지를 태우고는 그것을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사그라드는 불씨를 보며 씨근거리는 숨을 내리누르는데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플로렌스가 신경질적인 태도로 물었다.
“뭐지?”
“플로렌스 님, 모드로프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모드로프 영애라니.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플로렌스는 순간적으로 제 귀를 의심했다.
“……이오나 모드로프 경 말인가?”
“아니요, 이본느 모드로프 양이십니다.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신 건 아닌 듯한데…… 돌려보낼까요?”
이오나가 찾아온 게 아니라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동생 쪽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방문인 건 마찬가지였다. 이본느와 플로렌스는 오며 가며 파티에서 몇 번 마주쳤을 뿐 별다른 친분이랄 게 없는 사이였다. 플로렌스는 모드로프라는 성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대체 무슨 용건으로 저를 찾았는지 알 수 없어 플로렌스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 일단 응접실로 데려가. 내가 준비하는 동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내 하녀들도 여기 불러다 줘.”
결국 호기심이 불쾌감을 이겼다. 이본느의 방문을 받아들인 플로렌스는 우선 단장을 도울 하녀부터 불러들였다. 조용히 있고 싶은 마음에 사용인들을 전부 무른 상태라 지금 방 안엔 그녀 혼자뿐이었다. 우선 이 말도 안 되는 꼴부터 수습해야 상대를 만나 용건을 알아내든 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름을 받은 하녀들이 부리나케 달려왔지만 플로렌스는 부러 느긋한 속도로 준비를 마쳤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상대를 반갑게 맞아들일 만큼 플로렌스가 상냥한 여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의 방문객이 이오나의 동생이라면 플로렌스는 얼마든지 더 심술궂어질 수 있었다.
평소보다 한참 시간을 들여 단장한 플로렌스가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것 같던 얼굴이 어느새 그럭저럭 봐 줄 만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간 마음고생을 하며 살이 빠진 탓에 한결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긴 했지만 그건 이번 만남에 있어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될 요인은 아니었다.
플로렌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손님을 맞이하러 나섰다. 상대도 보통 용건을 가지고 저를 찾은 건 아닌지 긴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플로렌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상대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곧장 고압적인 투로 물었다.
“용건이 뭐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이본느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아하니 시비를 걸러 온 건 아닌 듯했지만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여전히 싸늘한 태도를 유지했다.
“영애가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와 할 만한 말이 당최 뭐가 있는지 모르겠군.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저희가 막역한 친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애께 깊이 마음 쓰일 만한 일이 생겨 이렇게 용기 내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용건부터 빠르게 전달하면 고맙겠어. 내가 갑작스러운 방문에 오랜 시간을 허비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서.”
플로렌스가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이본느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이본느는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굴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 쥐었다.
“플로렌스 양, 영애께서는 이번 황궁 무도회에 어느 분의 파트너로 참석하실 예정이신가요?”
거슬리는 질문에 플로렌스가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황궁 무도회라. 그건 안 그래도 플로렌스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던 일정이었다. 황실에서 무도회를 개최하겠다는 소식을 발표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플로렌스는 리하르트에게 아무런 기별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리하르트가 적당한 때에 제게 연락을 취할 것이란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라면 리하르트의 약혼자인 플로렌스가 응당 그의 파트너 역할로 참석해야 했으니까. 한데 이 영애는 왜 그런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던지는 걸까.
상대가 누구와 한집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본느가 다음으로 꺼낸 말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 황태자 전하께서 누구를 에스코트할 예정이신지 알아요.”
플로렌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플로렌스가 입술만 겨우 달싹여 물었다.
“……이오나 모드로프?”
“주제넘은 일이죠.”
이본느가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 이본느는 당사자인 플로렌스보다도 더 그 사실에 분개한 것처럼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가 티테이블 위 어딘가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아무리 황태자의 기사라고 해도 엄연히 플로렌스 님이 약혼자로 계신데 파트너 자리를 뺏다니요. 심지어 본인은 다른 남자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면서, 정말 웃기지도 않죠.”
이본느는 꼭 주문이라도 외는 사람처럼 낮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어찌 보면 그건 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종이었으나,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이본느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그 애는 항상 남의 걸 탐내요. 자기 게 아닌 걸 다 빼앗아 가 놓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받은 게 없다는 듯 행동하죠. 주제를 모르고, 심지어는 염치도 없어요.”
“…….”
“걔는…… 벌을 받아야 해요.”
이본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플로렌스를 바라보는 눈엔 빨간 실핏줄이 올라서 있었다. 그에 플로렌스는 무심코 조금 감탄했다.
이오나 모드로프와 이본느 모드로프, 두 자매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쯤은 플로렌스도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본느는 공공연히 이오나를 흉보곤 했고 자신이 제 양자매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구태여 숨기지도 않았다. 피가 통하지 않은 두 사람이 친자매처럼 구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으므로 플로렌스는 이를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녀의 존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친딸이라면 충분히 상대에게 경쟁심을 품을 법도 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상대의 반응을 보니 이본느가 이오나에게 품은 감정은 그런 귀여운 질투 수준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이본느는 플로렌스보다도 더 이오나를 증오했다.
“왜 날 찾아온 거지?”
“그건…….”
“내가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 그 여자한테 해코지라도 하길 바라서?”
플로렌스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꼭 선을 긋는 듯한 태도에 이본느가 억울하다는 듯 반문했다.
“플로렌스 님, 그런 계집애를 가만두실 건가요?”
“가만히 안 두면 뭐, 죽이기라도 할까?”
그리 물으며 플로렌스가 가는눈으로 이본느를 응시했다. 사실은 상대의 의중을 떠본 것이었다.
이본느가 이오나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하다. 제 화를 돋워 분풀이를 작당할 의도로 이곳을 찾은 것도 맞는 듯하다. 플로렌스가 궁금한 건 이본느가 과연 어디까지 각오를 다지고 왔는가였다.
“저라면…… 죽이고 싶었을 거예요.”
이본느가 그리 속삭이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처음에 닐스가 이오나를 죽이자고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본느는 실상 별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을 함부로 벌여도 되나 싶어 오라비의 짧은 생각을 걱정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국 닐스가 옳았다. 어머니의 기일에 플뢰르를 두둔하고 나선 이오나를 보고 깨달았다. 그들 남매는 처음부터 이오나를 없애 버렸어야 했다. 그 건방진 사생아가 감히 그들의 어머니를 그런 식으로 우습게 취급하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됐다.
그러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오나는 마땅한 대가를 치르긴커녕 나날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영지에서 벌어진 횡령 사건을 밝혀내며 아버지의 신임을 샀고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황태자에게선 파트너 제의를 받았다. 당장이라도 이오나를 죽일 것처럼 굴던 닐스는 정작 아버지의 경고 앞에서 꼬리를 말았다. 그는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식으로 동생을 달랬으나 정작 이를 바라보는 이본느의 시각은 회의적이었다.
‘나중을 기약할 순 없어. 정말 공작과 결혼이라도 하고 나면 아예 손댈 수 없게 될 테니까.’
더 높이 날아오르기 전에 어떻게든 끌어내려 감히 재기를 꿈꿀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본느는 이오나를 죽이고 싶은 것만큼이나 이오나가 죽지 못해 엉망으로 사는 꼴을 보고 싶었다. 천한 출신과 어울리는 진창에 처넣고 네 자리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며 한껏 비웃길 원했다. 상대의 숨을 거두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플로렌스 만큼 뜻이 잘 맞아떨어지는 협력자도 또 없을 것이었다. 플로렌스는 항시 이오나의 건방진 콧대를 꺾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여자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