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룡전 08권
마룡전 08권
마룡전
08
김강현
마룡전 08권
차례
제80장. 박살
제81장. 운남에서
제82장. 천영방
제83장. 흡정마고
제84장. 정협맹
제85장. 백리황과 담무군
제86장. 우내사존
제87장. 마굴
제88장. 십룡맹
제89장. 혈마인
제90장. 무명인
제91장. 종장
마룡전 08권
제80장. 박살
휘이이이!
마룡이 회전하며 빨아들이는 기운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그 앞에서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다.
“피해!”
혈뇌마군이 크게 외치며 몸을 날렸다. 만일 그가 예전의 마군이었다면, 그때처럼 물불 안 가리고 돌진만 하던 마군이었다면 강하진에게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패기가 사라진 늙은 무인일 뿐이었다. 혈뇌마군은 일단 옆으로 뛰었다. 그리고 강하진에게서 최대한 멀리 도망갔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다.
콰우우우!
마룡포가 쭉 뻗으며 일직선상에 있던 무사들을 그대로 녹여 버렸다. 그들은 뭘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당했다. 마룡포는 너무 빨라 일단 뿜어져 나온 순간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무사들이 사방으로 훌쩍 뛰었다. 강하진의 창이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뛴 사람들 중 살아남은 자는 몇 되지 않았다.
콰우우우!
두 번째 마룡포가 쏟아져 나갔다. 방사형으로 넓게 퍼지며 사방을 휩쓸어버렸다. 거기에 걸려든 무사들이 핏물이 되어 흩어졌다.
강하진은 창을 몇 바퀴 더 빙글빙글 돌린 후, 바닥에 콱 찍었다. 그리고 오연한 눈으로 사방을 한 번 슥 훑어봤다. 살아남은 무사는 열 명 남짓이었다. 그 중 한 명이 혈뇌마군이었다.
“잘 따라와.”
강하진의 말에 허가령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에 바짝 붙었다. 강하진은 손에 든 마룡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천천히 걸어갔다. 마룡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검붉은 선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선은 채찍처럼 휘어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살아남은 무사들이 거기에 걸려 팔다리는 물론이고 몸통까지 뭉텅뭉텅 잘라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혈뇌마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는 한눈에 아무리 애써봐야 강하진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파악했다. 차라리 아직 오지 않은 무사들을 모조리 모아서 대항하는 편이 나았다.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어가는 혈뇌마군을 강하진은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보아하니 그냥 도망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다들 모이라고 열심히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다시 올 모양이었다.
“조금 천천히 가도 되겠군.”
강하진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전각이 보였다. 아마 도처에 비밀공간과 금고가 있을 것이다. 그런 걸 그냥 내버려두고 가는 건 멍청한 짓이다.
“다 들고 가려면 좀 무거울지도 모르겠네.”
강하진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마룡을 힘차게 휘둘렀다. 마룡에서 뽑혀 나온 가느다란 강기의 실이 주변 전각들을 칭칭 감았다.
카가가가가각!
두 채의 전각이 조각나며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 안에서 막 뛰어 나오던 무사들 역시 같이 휘말려 조각났다. 허가령은 뒤에서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최근 너무 잘해줘서 잘 못 느꼈는데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다.
“다들 나와!”
혈뇌마군의 외침이 곳곳에 울려 퍼졌다. 내공까지 썼기에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존마련 내에서 일하는 일꾼이나 시비들까지 우르르 달려왔다. 그들을 발견한 혈뇌마군이 잔인하게 웃었다. 방패가 생긴 것이다.
“저놈들을 방패로 쓴다. 다들 준비해!”
수많은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꾼과 시비를 잡아 앞으로 내세우고, 진형을 갖췄다. 그들은 그렇게 모여 강하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강하진과 존마련 무사들이 마주쳤다.
강하진은 무사들 뒤에서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고 소리 지르는 혈뇌마군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일반인이 분명한 사람들을 앞세워 방패로 삼은 무사들을 보고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진짜 쓰레기들이군.”
끓어오르던 투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대신 분노가 타올랐다. 사람들의 눈에서 공포를 읽었다.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붙잡고 있는 무사들의 눈과 얼굴에서 비웃음과 광기를 읽었다.
휘잉! 휘잉! 휘잉!
창이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검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강하진의 기로 만들어진 안개였다. 마치 혈무가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인간 방패를 앞세워 전진하던 존마련 무사들도 그 모습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혈무의 범위가 점점 늘어났다. 무사들이 뒤로 조금씩 물러났지만 혈무의 확장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며 무사들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인질을 든 무사들은 모두 혈무에 갇혔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무사들은 대부분 빠르게 뒤로 물러나 혈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퍼버버버벅!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그리고 혈무가 점점 짙어졌다. 마치 진짜 피가 뿌옇게 퍼지는 것 같았다.
솨아아아!
혈무가 일제히 존마련 무사들을 향해 흘러갔다. 사방으로 퍼졌던 혈무가 가운데로 모이더니 마치 강이 흐르듯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피해라!”
혈뇌마군이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외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 역시 혈무를 피했다.
촤아악!
미처 피하지 못하고 혈무를 뒤집어 쓴 무사들의 온몸이 새빨갛게 변했다. 혈무는 말 그대로 진짜 피가 되어 무사들을 덮쳤다. 물론 아무런 피해는 없었다. 그저 피를 뒤집어쓴 것뿐이었다.
혈무가 사라지고 마룡을 든 강하진이 나타났다. 여전히 오연하며,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혈뇌마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하진 뒤에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방패로 쓴 자들이었다. 존마련에서 일꾼으로, 또 시비나 주방장, 혹은 서기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방패에서 자유의 몸으로 바뀌었다.
“데리고 나가라.”
강하진의 말에 허가령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무사히 마을까지 데리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강하진은 이제부터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자신이 옆에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조금 전까지는 왜 쫓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스스로가 한심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목숨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으니, 따라온 보람과 의미가 생겼다.
사람들은 허가령의 말을 지극히 잘 따랐다. 죽다가 살아났으니 당연하다. 허가령은 그들을 살려준 사람의 동료 아닌가. 아니,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어 하는 사이에 정신을 차려보니 강하진 뒤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들 허가령도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큰 힘을 썼다고 믿었다.
허가령이 사람들을 이끌고 존마련을 벗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혈뇌마군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무력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강하진을 노려봤다.
“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우리에게 이러는 것이냐!”
혈뇌마군의 외침에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적반하장이군.”
강하진이 마룡을 붕붕 휘둘렀다.
“잡담은 지옥에 가서 해라.”
휘이이잉!
강하진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빠르게 회전시켰다. 마룡포를 쓸 때의 자세였다. 그것을 알아본 혈뇌마군이 소리쳤다.
“공격해!”
혈뇌마군이 소리치지 않아도 존마련 무사들은 상황을 파악하고 강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룡포를 겪은 사람 중 살아남은 건 혈뇌마군뿐이었지만 창의 회전에 빨려 들어가는 막대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큰 기운을 쓴다면 엄청난 기술일 것이고, 그런 기술을 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상식이다.
무사들의 공격이 막 강하진에게 닿기 직전, 혈뇌마군은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왠지 얼마 전에 쓴 마룡포와는 묘하게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회전하는 창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룡들이 튀어나왔다.
콰아아아!
강하진 주변을 한 바퀴 휘감은 뒤 사방으로 날뛰는 열두 마리의 마룡이 근처에 다가온 무사들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 일단 마룡에 휩쓸린 것은 사람이건 건물이건 결코 남아나지 않았다.
혈뇌마군은 경악한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룡을 보았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막대한 기운이 양손에 모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마룡의 입에 처넣었다.
꽈앙!
혈뇌마군의 공격은 마룡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머리를 잃어도 마룡은 여전히 마룡이었다. 그것은 그저 용 모양으로 형상화된 기운의 결집체일 뿐이었다. 머리가 날아갔지만 여전히 혈뇌마군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을 흩날리며 달려들었다.
꽈과광!
혈뇌마군은 양손으로 마룡을 마구 두드리며 몸을 날렸다. 마룡을 완전히 부술 수는 없었지만 방향을 비트는 것은 가능했다. 물론 그 때문에 주변에 있던 전각과 무사들이 무더기로 무너지고 죽었다.
열두 마리의 마룡은 엄청난 참상을 만들어낸 뒤 서서히 흩어졌다. 그렇게 흩어지는 와중에도 꿈틀거리며 주변을 가루로 만들었다.
강하진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장이 초토화되었다. 건물이고 사람이고 남아난 게 하나도 없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죽은 건 아니었다. 또한 모든 건물이 무너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절반 이상의 전각들이 사라졌고, 무사들은 채 삼 할도 남지 않았다.
혈뇌마군은 망연한 얼굴로 그 참상을 바라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혈뇌마군의 눈은 어느새 강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하진은 담담한 얼굴로 다시 마룡을 돌리고 있었다.
“이…… 이 지독한……!”
방금 전의 그 참담한 광경을 다시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참혹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런 무력감은 우내사존 앞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우내사존은 분명히 두려운 자들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휘잉! 휘잉! 휘잉!
창 돌아가는 소리가 혈뇌마군의 귓가에 밀려왔다. 혈뇌마군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물러난 혈뇌마군 앞에 갑자가 강하진이 나타났다. 수십 장에 달하는 거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너한테는 듣고 싶은 얘기가 좀 있지.”
빠악!
창이 혈뇌마군의 허리에 틀어 박혔다. 혈뇌마군은 창이 날아오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그 움직임의 묘리에서 혁세광의 검이 보였다.
“끄으으.”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 방에 온몸의 기운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반격도 할 수 없었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주저앉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빠악!
이번엔 머리였다. 혈뇌마군은 세상이 새까매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혼절했다.
“후우. 이제 좀 후련하네.”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존마련 무사들은 아직까지 채 도망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강하진이 그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한 명도 살려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들의 운명은 이미 양민들을 방패로 쓸 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콰아아아!
강하진의 창, 마룡이 광포한 울음을 토해냈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끌고 운룡산을 내려간 허가령은 일단 가장 가까운 마을로 향했다. 이들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사실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허가령이 지금 가진 돈은 많지 않다. 강하진과 둘이 여행하며 쓰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만 백여 명의 사람들을 책임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
일행 중 그나마 가장 똑똑해 보이는 청년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허가령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를 바라봤다. 허가령과 눈을 마주친 청년이 얼굴을 붉히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가요?”
“저…… 이제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어떻게 되다니요? 집으로 돌아가야지요.”
청년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운룡산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근처에서 납치해와 일을 시키고 써먹었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천하 각지에서 잡혀왔다. 특별한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집까지 가려면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준비의 대부분은 돈이었다.
허가령은 청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분이 돌아오시면 아마 다 해결될 테니까요.”
허가령은 강하진이 처음 존마련의 본거지에 들어서며 했던 말을 기억했다. 강하진은 그곳을 그냥 부수기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곳에 있는 적지 않은 재물을 몽땅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라면 얼추 해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전에 하룻밤 잘 곳을 찾아야겠지.’
일단 객잔으로 갈 생각이다. 하지만 백여 명이나 머무를 수 있는 방이 있을지 알 수 없다. 허가령은 내심 걱정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백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들이 마을에 들어서자,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을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분한 구경거리였다.
이들이 도착한 마을은 운룡산 주변에 있는 마을 중 그나마 규모가 있는 편이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머물렀던 마을 보다는 좀 작았지만 그래도 객잔이 몇 개는 있는 듯했다.
허가령은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찾아갔다. 그녀가 이끄는 사람들 중에서 이 마을에 집이 있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텐데 아무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강력한 힘을 눈앞에서 목격했으니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자칫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부로 빠져나가거나 말을 걸지도 못했다. 그나마 허가령에게 말을 걸었던 청년은 용기가 있는 경우였다.
* * *
객잔에 도착한 허가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객잔의 방이 충분치 않았다. 객잔이 텅 비어 있다면 어떻게든 우겨 넣을 수 있었겠지만 빈 방의 수가 많지 않았다. 별채라도 있다면 그곳에 한꺼번에 수용하면 되는데, 별채조차 없는 객잔이었다.
허가령이 객잔 밖으로 나오자, 객잔에 들어가지 않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어쩌지? 일단 마을 밖에서 하루 노숙을 해야 하나?’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누군가 급하게 다가오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아! 여기서 또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하무웅이었다. 그의 뒤로 허가령과 미처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추명호와 전대운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하무웅 옆에서 윤예린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가령은 환하게 웃어 반가움을 표했다. 그녀의 환한 미소에 하무웅은 또 멍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물론 바로 윤예린의 손가락에 응징을 당했다.
“마을을 옮겼는데도 또 만나다니 어쨌든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한데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하무웅은 시종 당당했다. 그의 뒤에서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물론 추명호나 전대운이 허가령 앞에서 당당하면 오히려 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즉, 무서워서 허가령을 두고 도망쳤으니까.
“여러 일이 많았답니다.”
허가령은 딱 거기까지만 얘기했다. 하지만 하무웅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괜히 더 얘기를 들추다 추명호와 전대운과 얽혔던 일까지 나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일은 하무웅만 알고 아직 윤예린은 모르는 상태다. 하무웅은 그 일을 그냥 묻어두고 싶었다. 자연히 허가령을 향한 그의 시선이 조심스러워졌다.
허가령은 하무웅과 추명호, 전대운 사이에 도는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추명호와 전대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전 다 잊었답니다.
두 사람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두 사람은 윤예린이 눈치채지 못하게 허가령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치욕적인 일을 묻어 주겠다니 정말로 고마웠다. 더구나 허가령은 당사자가 아닌가. 그녀의 거처에 몰래 숨어든 것도 모자라, 위협에 굴복해 도망치기까지 했는데, 그 모든 일을 잊어주겠다니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