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룡전 07권
마룡전 07권
마룡전
07
김강현
마룡전 07권
차례
제69장. 사천의 마인들
제70장. 빙정
제71장. 진유현과 정유환
제72장. 광마단
제73장. 냉포천
제74장. 진가장의 선택
제75장. 격돌
제76장. 마룡의 진화
제77장. 떠나다
제78장. 운룡산
제79장. 혈뇌마군
마룡전 07권
제69장. 사천의 마인들
강하진은 예상외의 환대에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무림맹에서 나올 때 그리 좋은 분위기로 헤어진 게 아니라서 이번에 그들을 도와 함께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껄끄러울 거라 예상했다. 한데 막상 도착해보니 무림맹 무사들이 너무 반가워해서 깜짝 놀랐다.
“확실히 참마단주의 명성이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허가령이 감탄하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서 무림맹 사람들과 만나며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천에서 마인들과 싸운다는 얘기만 들었지 이렇게 무림맹과 합류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마련 소속이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허가령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하진을 바라봤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뜨거웠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뜨거운 눈빛을 보고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를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허가령에게 접근하는 사내는 한 명도 없었다. 강하진을 넘어서서 허가령을 차지하려면 최소한 마군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 한다. 무림맹에서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을 꼽으라면 맹주인 남궁무 정도였다. 그나마도 확실치 않다. 남궁무가 아무리 십대고수 중 최고라 하더라도 마군은 십대고수를 능가하는 강자라 알려져 있다.
자연스럽게 허가령과 무림맹 무사들 간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났다. 물론 은근히 그녀와 말을 섞어보길 원하는 사람들이야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강하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미묘한 상황이 계속될 무렵, 강하진에게 무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단주님들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무림맹은 이곳 사천에 네 개 무력단체, 백호단, 청룡단, 주작단, 현무단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최근 마인들이 폭발적으로 증원되면서 그들 역시 하나로 힘을 모은 상태였다. 물론 작전권은 각자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협의 하에 작전을 선택하고 마인들과 싸웠다. 지금이 바로 그 협의의 시간인 것이다.
강하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가령과 함께 단주들이 머무는 막사로 향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아직까지도 단주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강하진이 왔다는 소식에도 그들끼리 회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약간의 반감이 남아있었기에 강하진과 조금 거리감을 둔 것이기도 했다.
강하진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단주들이 저마다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강하진을 맞이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강하진을 윗사람처럼 대했다. 그만큼 강하진에 대한 소문은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 자연스럽게 퍼지는 존재감에 압도되었다.
그렇게 간단히 인사를 마치자, 네 단주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허가령에게로 향했다. 그들 역시 남자들이다. 미녀를 보면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처음 뵙는 소저로군요.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도 비교적 강하진과 몇 번 안면이 있던 백호단주가 먼저 허가령에게 관심을 표하며 물었다. 물론 강하진과 함께 왔으니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인일 거라는 예상은 했다.
“허가령이에요.”
간단히 이름만 말하자 더욱 궁금증이 증폭되었다. 대체로 자신을 소개할 때는 어느 가문이나 문파에 소속되었는지가 중요한 법이다.
‘진가장 소속인가? 당연하니까 말을 안 한 것이겠지?’
다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연방 눈을 힐끔거리며 허가령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 한 번 보면 다시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 이쪽 여자는 신경 쓸 필요 없으니 필요한 얘기만 하지.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지?”
강하진은 자연스럽게 하대를 했다. 하지만 네 단주 중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반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강하진의 존재감이 압도적이었다.
“일단 적도 한군데로 모인 상황입니다. 그들은 지금 이곳으로 이동 중인데, 대규모로 싸우기 적당합니다. 숫자도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앞서니 그곳에서 적을 섬멸하고 다음 마인들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강하진은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이곳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강하진이 마음만 먹으면 반 각 안에 도착하는 것도 가능했다.
“일단 일차적으로 나 혼자서 싸우지. 뒤에서 진형을 단단히 하고 천천히 이동해서 도망가는 놈들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게 좋겠어.”
강하진의 말에 네 단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지금 이곳으로 오는 마인들의 수는 무려 이천 명이나 된다. 그들을 혼자 상대하다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그건 마군이라도 불가능하다.
“일반적인 무사들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마인입니다. 피에 미쳤으니 도망을 갈 리가 없습니다. 강 소협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홀로 이천 명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누가 혼자 간다고 했나? 같이 갈 사람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제야 단주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아, 그랬군요. 하지만 그래도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분들도 합류해서 저희들과 함께 일제히 몰아붙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강하진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일단 돌격대로 적을 흩어놓고 단단한 진형으로 싸우는 편이 정석이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돌격대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야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더구나 상대는 마인들, 진형이고 작전이고 전혀 생각지 않고 달려들 것이 뻔하다. 이런 경우는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설마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강하진의 단호한 말에 네 단주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누가 감히 강하진의 능력을 의심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강하진과 함께 돌격할 사람들을 예전 참마단이라고 예상했다. 그 정도라면 정말로 훌륭한 돌격대였다. 물론 예전 청룡단과 백호단을 동시에 깨버릴 때처럼 검진을 완벽하게 쓸 수 있다는 가정 하게 말이다.
“믿겠습니다. 다만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해야 하니, 돌격할 분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혹여 혼전 양상이 되었을 때, 같은 편을 공격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강하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쳐다봤다. 강하진의 시선을 따라 네 단주들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는 허가령이 있었다. 강하진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설마…… 두 분이서만 가시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 설마가 맞는데?”
“절대 안 됩니다!”
네 단주는 일제히 그렇게 외쳤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런 험악한 일에 허가령을 보낼 수는 없었다. 강하진이야 그렇다 치고 허가령이 그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허 소저께서 설마 십대고수에 필적할 강자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강하진이 눈을 빛냈다.
“음?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강하진의 말에 네 단주와 허가령의 눈이 같은 감정으로 물들었다. 불신과 허무, 그리고 원망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네 단주의 실력은 상당했다. 그들은 허가령이 막사에 들어온 순간 그녀의 경지를 단숨에 알아챘다. 허가령은 그들보다 한참 아래였다. 한데 그런 그녀가 십대고수에 필적하는 고수라니, 그런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자신들이 왠지 한심해졌다. 또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따위 장난이나 치고 있는 강하진이 원망스러웠다. 그것은 허가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난은 이제 그만 하십시오.”
“장난 아닌데? 내 말을 아직도 못 믿는 모양이군. 하긴, 당사자조차 믿지 못하니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다. 의심나면 확인해 보면 되잖아?”
확인하라는 말까지 나오니 네 단주들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허가령과 강하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뭘 어떻게 확인한단 말인가.
“간단해. 넷이 동시에 공격해봐. 단, 죽일 마음으로 공격해야 돼. 살기를 가득 담고. 진짜 죽지는 않을 거야. 위험하면 내가 알아서 하지.”
강하진의 말에 네 단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하진이 강한 건 인정하지만 자신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허가령을 공격했을 때, 그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이건 그냥 막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허가령이 진짜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때 막는 것이다.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젠데…….’
네 단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강하진을 보건대 진짜 칼이 허가령의 피부를 갈라야 나설 것 같았다. 만일 정말로 그 상태까지 간다면 허가령이 다칠 수밖에 없다. 거기서 허가령을 구해내는 건 마군이라 해도 불가능하다.
망설이는 단주들을 보며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왜? 이젠 내 실력을 못 믿겠어? 그럼 짜증이 좀 나지만 먼저 이걸로 내 실력부터 시험해보지.”
강하진은 그렇게 말하며 막사를 지탱하는 기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단주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기둥을 향해 검을 날렸다. 발검에서 시작해 쾌검으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단순했지만 빠르기와 협공이라는 특성을 살린 굉장한 일격이었다.
단번에 기둥이 잘라질 것 같았다. 그들의 검이 뿜어내는 예기만으로도 그렇게 될 듯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에 네 단주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네 개의 검이 기둥에 닿은 채로 멈춰 있었다. 검의 끝부분이 기둥에 딱 닿기만 했다. 기둥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네 단주는 믿을 수 없었다. 강하진과 자신의 격차가 이 정도나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강하진을 쳐다보려했다. 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점혈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몸에 아무것도 닿는 느낌이 없었는데 대체 언제 점혈을 당했단 말인가.
“이제 좀 안심이 돼?”
강하진의 말과 함께 그들의 점혈이 풀렸다. 네 사람은 경이로운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정말로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어쩌면 혼자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저희들이 얼마나 모자란지 제대로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단주는 그렇게 말하며 강하진에게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투지를 불태웠다. 목표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결코 어리지 않다. 하지만 무의 길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고 끝이 어디 있으랴.
“자, 그럼 두 번째를 시작해야지?”
강하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 단주가 허가령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들의 눈빛이 뜨겁게 타올랐다. 어차피 옷자락 하나 못 벤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강하진이 자신들에 대해 파악한 한계를 아주 조금이나마 부수고 싶었다.
“살기 제대로 싣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는 거 명심하고.”
그들의 시선에 살기가 어렸다. 허가령은 흠칫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네 단주의 검이 일제히 허가령에게 쏟아졌다. 절묘한 합공이었다.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며 날아가는 네 개의 검이 허가령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조금 전 기둥을 공격할 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게다가 기세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네 단주는 확신했다. 이건 무조건 성공한다고.
쉬쉬쉭!
네 단주는 검을 내지른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없었다. 그들의 검이 위치한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허가령은 어느새 한 발 옆으로 움직여 그들의 공격을 완벽하게 피해낸 것이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허가령이 빠른 속도로 움직여 눈앞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검을 내지르는 순간, 허가령이 정말로 절묘하게 한 걸음 걷는 것을 똑똑히 봤다. 그야말로 찰나의 틈을 가른 절묘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옷자락은 잘랐군.”
강하진의 말에 네 사람이 허가령의 옷을 살폈다. 배꼽 부위의 옷이 잘라져 나풀거리고 있었다. 나풀거리는 틈으로 허가령의 늘씬한 배와 허리가 보였다. 네 단주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검을 거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왠지 뭔가에 홀린 기분이군요.”
강하진이 피식 웃었다.
“왜? 우연 같아?”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방금 전 공격은 우연만으로 피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건 실력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단주는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우연일 리가 없지요.”
“자, 이제 내 말을 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네 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허가령을 바라봤다.
“충분히 강하다는 걸 믿겠습니다. 믿기 어렵지만…….”
정말로 믿기 어려웠다. 아직도 허가령의 경지는 그들의 손에 잡힐 듯 확연했다. 허가령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정말로 보잘 것 없었다. 내공도 크지 않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허 소저를 그런 위험에 방치할 수 없습니다.”
“그건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지.”
강하진이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결정해.”
강하진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허가령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막사를 나서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 네 단주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네 단주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고마워요.”
허가령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네 사내의 가슴이 한껏 방망이질 쳤다.
“후우.”
온갖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네 개의 한숨이 막사 안을 울렸다.
* * *
연희연은 허탈한 표정으로 개봉을 벗어났다. 개봉에 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강하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꿈에 젖었다. 하지만 현실은 꿈과는 달랐다. 강하진은 이미 개봉을 떠난 지 오래였다.
“동정호로 떠났다니…….”
개봉에서 일을 마치고 동정호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나마도 개봉을 사흘이나 이 잡듯 뒤져서 알아낸 정보였다. 물론 우연히 천명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아직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동정호까지 언제 가지?”
연희연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강하진을 만날 것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연희연은 작은 주먹을 들어 올리며 불끈 쥐었다.
“동정호에서는 꼭 만날 거야! 내 성의를 봐서라도 잘 해주시지 않겠어? 힘내자!”
연희연은 힘이 쭉 빠진 다리에 억지로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통해 폐에 희망을 가득 채웠다. 어느새 기운을 차린 그녀의 발걸음이 힘차게 변했다.
그녀는 그렇게 동정호로 향했다. 강하진이 이미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연희연은 힘차게 걷다가 이내 경공을 펼쳤다. 말은 개봉에서 팔았다. 여비에 보태쓰기 위해서였다.
처음 소주를 떠날 때 충분한 여비를 가져왔지만 여정이 늘어난 이상 돈을 더 아껴야만 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결연한 표정의 연희연이 바람처럼 내달렸다. 연희연은 동정호에 도착할 때쯤이면 경공 실력이 일취월장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더욱 힘차게 내력을 돌렸다.
강하진과 허가령은 어느새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상당히 너른 들판이었다. 무림맹이 예측한 대로라면 마인들은 조만간 이곳을 통과할 것이다.
무림맹의 네 개 무사단은 지금 이 들판을 향해 차근차근 전진하는 중이었다. 마인들이 도착할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해서 진형을 갖추고 강하진이 휘저어 놓은 마인들을 몰아쳐 단번에 승부를 볼 계획이었다.
허가령은 떨리는 눈으로 강하진을 바라봤다. 이제 곧 마인들이 들이닥친다. 마인이 어떤 족속인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마 그녀를 그냥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마인들은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울지도 모른다. 그녀의 팔다리를 뜯어 놓은 채로 말이다.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글쎄.”
허가령은 강하진의 무성의한 대답에 기가 막혔다. 지금 자신이 누구 때문에 여기 와 있는데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실망한 그녀의 귀로 강하진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든 넌 절대 안 죽어. 내가 지켜줄 테니까.”
허가령은 가슴이 떨렸다.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심장이 미칠 듯이 두근거렸다. 요즘 그저 강하진을 바라보기만 해도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안다. 그래서 더 슬프고 씁쓸했다.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지 몰랐어.’
허가령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했다. 독마의 제자가 된 순간부터 그녀는 냉정하게 그 감정을 잘라버렸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 맹세했고, 실제로 지금까지 그 맹세를 잘 지켜왔다. 그녀의 가슴을 떨리게 만든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와서…….’
왜 하필이면 강하진이란 말인가. 하필이면 자신을 인질로 사로잡은 적이란 말인가. 차라리 독마의 제자나 존마련의 무사에게 이런 감정을 느꼈다면 조금 더 마음이 편했으리라. 그리고 가능성도 있었으리라.
허가령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과 그런 일이 가능했을 리 없다. 그들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봤는지, 또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만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벌레가 온몸을 기어가는 것 같은데, 어떻게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