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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수요일 아침, 어느덧 두 번째 휴무 날이 밝았다.
어제 끝끝내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세림의 심부름으로 과일 가게를 왔다 갔다 할 때에도 간간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던 홍이었다.
단지 눈을 보고 싶어서.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겨울에 태어난 홍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사랑했다.
눈이 쌓여도 언젠가는 녹기에 그 찰나의 순간을 소중히 할 수 있어서였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창문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제보다 더 맑아 보였다. 눈이 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오늘은 뭐 하지.’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던진 홍은 가볍게 숨을 뱉은 후,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귀중한 휴일을 이렇게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양옆으로 뒤척거리던 홍이 갑자기 몸을 바로 했다.
문득 나머지 네 사람이 휴무 날에 무얼 할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홍이 알기론 네 사람 다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시기상 지금은 방학일 테고, 계절 학기도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터였다. 지난 회식 자리에서 만난 이들도 계절 학기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바로 그저께, 김선우는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간다고 했었다.
학교, 학교라.
잠시 고민하던 홍은 완전히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제 기능을 찾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집에서 가까운 학교가 어디더라.
홍의 집은 J대와 K대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도 굳이 따진다면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J대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오는 거야.
한국의 대학교는 다녀본 적이 없었던 홍이었기에 구경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결론이 나자 행동은 빨라졌다. 어쩐지 알찬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짧게 외출 준비를 마친 홍은 밖을 나서기 전 신발장 옆에 붙은 전신 거울을 보고 섰다.
거울 속에는 파리한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장착한 여자가 서 있었다.
‘계속 피곤하긴 했었지…….’
생각보다 더 피곤한 듯한 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외출을 하는 게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간 홍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리로 나갔다.
* * *
날씨는 맑다 못해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따스했다.
눈을 볼 수 있는 확률이 점점 낮아지자, 홍의 마음 역시 가라앉았다.
‘여기서 쭉 직진, 그리고 좌회전했다가 은행이 보이는 쪽으로 길을 건너면…….’
핸드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켠 홍이 J대로 가는 길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네 사람 모두 대학을 다니고 있는 걸로 아는데, 정확히 어느 대학교에 다니는지는 알지 못했다.
유일하게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이세림뿐이었다.
지난번, 카페 내 오지랖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자 정보통인 박정효가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을 해 주었던 것이다.
‘……발군의 K대 의대생이고, 24살입니다.’
발군이라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세림이 학교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그건 그렇다 치기로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전단지를 나누어 주다 이세림을 처음 만났던 날, 그는 K대 로고가 새겨진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적어도 그를 J대에서 만날 일은 없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지만, 나머지 세 사람이 문제였다.
‘방학인데, 설마 학교에 있지는 않겠지.’
얼마 전까지 학교에 볼일이 있다던 김선우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그렇게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애써 생각을 지웠다.
얼마 후 도착한 J대 캠퍼스 입구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웅장했다.
단순한 호기심에 찾아본 J대는 한국에서 명문대에 속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영대와 공과대가 유명했다.
미국에서 나름 경영학을 전공으로 공부하고 있었던 홍은 자연스레 이곳의 경영대학에 관심이 쏠렸다.
게다가 J대는 제집에서 생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서주의 혼외자가 아니었다면 나름의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당당히 대학에 합격해 이런 곳에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일까. 캠퍼스 안으로 발을 옮기려는데 어쩐지 발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야, 점심 뭐 먹어? 시험도 끝났겠다 낮술 할까?”
“우리 과제 하나 남았거든요? 낮부터 술은 무슨. 이모네 갔다가 와플 조지러 가자.
“떡볶이에 와플? 완전 탄수화물 파티네. 콜!”
누가 보아도 J대 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들이 저마다 까르르거리며 정문을 지나쳤다.
즐거워 보이네.
유쾌한 얼굴로 점심 메뉴를 고르는 그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그것은 곧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난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냥 돌아갈까.
이곳에 올 때도 금방 왔으니, 돌아가는 길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정문 오른쪽에 큼지막하게 세워진 캠퍼스 안내도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만 반쯤 돌린 채 있던 그녀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추었다.
[003. 경영대학]
하필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영대학이 있었다.
하필이라니, 핑계도 좋다. 실은 보고 싶은 거면서.
머릿속에 온갖 상념을 떨쳐 내려 애쓰던 홍은 드디어 정문을 지나 경영대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에서부터 느꼈던 거지만 학교는 약간 경사가 있는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비탈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평소 운동을 하지 않는 홍에게는 다소 버겁게 느껴졌다.
밭은 숨을 내뱉으며 경영대학 앞에 도착한 홍이 건물 전체를 올려다보았다.
대리석으로 된 신식 건물들 사이에 붉은색 벽돌로 촘촘하게 지어진 건물이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만큼 전통이 있다는 거겠지, 생각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각종 포스터로 도배된 게시판이 보였다.
<20XX 스타트업 채용 페스티벌>
<취업 성공의 지름길, ㅇㅇ취업 아카데미 참여자 모집>
<경영대학 취업 멘토링 멘티 모집>
대부분의 포스터에 적힌 ‘취업’이라는 글자가 주홍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홍에게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글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금의 자신을 보니 어쩐지 방향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진정으로 뭘 하고 싶은 건지, 과거에는 뭘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홍 씨가 먼저 얘기해 주니 어쩐지 거절할 수가 없네. 거절할 이유가 생각이 안 나. 같이 일해 보죠, 뭐!’
별안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수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먼저 얘기를 꺼냈던 건 자신이었다. 다른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고, 제 스스로 이 카페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뭐라도 해 보겠다고 용기를 냈던 선택이었던 것이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잘하고 싶어요.’
제멋대로 잘 부탁한다고 했었다, 게다가 잘하고 싶다고도 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내뱉은 말에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아까까지 무력하게만 느껴졌던 자신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뭐라도 해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자신의 모습을 오늘에서야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건물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홍은 서둘러 건물 안에서 빠져나왔다.
* * *
밖으로 나온 홍은 건물 앞쪽으로 있는 길 끝에 분수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까까지 경영대학 위치만 좇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겨울이라 가동 전이기도 해서 분수대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벤치들이 빙 둘려 있었고, 홍은 맨 끝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아 있을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땅 쪽으로 시선을 내려 걷던 홍이 얼마 못 가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 끝에 검은색 스니커즈가 걸려 있었다.
길을 비켜주려 몸을 왼쪽으로 움직이자, 스니커즈도 왼쪽으로 따라 움직였다. 살짝 당황하며 오른쪽으로 움직였더니 이번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뭐야, 정말.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긴 홍이 고개를 들었다.
“!”
눈앞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나무진이었다. 방금까지의 행동이 의도된 것은 아니었는지, 나무진의 얼굴에도 약간의 당혹감이 서려 있는 듯했다.
“……어, 저, 안녕하세요?”
이게 무슨 인사야.
제 입으로 뱉어 놓고도 부끄러운 인사였다. 그 모습을 본 나무진은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다시 입을 닫았다. 홍의 입장에서는 숨 막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학교 다니는 줄 몰랐네요.”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확신은 없었지만 캠퍼스 안에서 마주쳤으니 그런가 보다, 라고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어, 네…….”
마지막에 했던 네, 라는 대답은 부디 그의 귀에 닿지 않았기를 바랐다. 쉬는 날이라 구경하러 왔다고 설명하기에는 어쩐지 구차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과?”
응?
원래대로라면 이 질문이 날아오기 전에 대화가 끝났어야 하는데, 남자가 기어코 질문을 던졌다.
왜 갑자기 안 하던 질문을 하세요.
홍은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무진은 어서 말해 보라는 얼굴이었다.
“어, 음, 그게, 그러니까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던 홍은 방금 자신이 나온 건물을 쳐다보았다.
그래, 아무래도 경영대학이 가장 일반적일 테니까.
나무진이 경영대를 다닌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무진은 이미지로만 보면 공대생에 더 가깝기도 했고.
“경영대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이제 돌아오는 질문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참았던 숨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나도 경영인데.”
“콜록! 켈록! 캑캑!”
별안간 사레가 들린 홍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침을 했다.
많고 많은 학과 중에 경영학과를 다닌다고? 이쯤 되면 말도 안 되는 학과를 하나 만들어서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안 나았나.”
기침이 멈춤과 동시에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 버렸다.
순간 무슨 소린가 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파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저, 죄송하지만…….”
“야 나무진! 폰은 장식으로 들고 다니지, 아주!”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정작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건 홍이었다. 나무진은 상대를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귀에 익은 목소리라 생각했었는데, 상대의 얼굴을 보니 확실해졌다.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그리고 같은 날 화장실에서 한 번 더 마주쳐서 나무진을 아느냐고 묻기도 했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그와 가까이하지 말라고 경고성 멘트를 날리는 바람에 홍에게는 아주 어이없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이가 없다는 걸 넘어선 무례한 발언이었다.
여자는 그새 머리 스타일을 바꿨는지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홍은 본체만체하며 지나가더니 나무진 옆 가까이 섰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누가 보면 사랑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받기 싫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