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Page
광의녹로 10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55-2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0권
곤륜파의 몰락은 강호 전역에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구파일방 중 하나로 군림하며 중원의 수호자 역할을 해오던 곤륜은 단순히 정파 무림의 명문을 넘어, 강호의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곤륜이… 곤륜이 멸문했다고?”
얼마 남지 않은 강호 구석구석의 객잔은 이 충격적인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마교와 경계가 맞닿아 있는 곤륜은 단순한 문파가 아니었다.
그들은 강호를 침략하려는 마교를 수없이 막아낸 방패였고, 마교의 위협 앞에 선 중원의 최전선이었다.
“말도 안 돼. 곤륜이 어찌 그렇게 쉽게…”
“곤륜이 당했다면 이제 누가 마교를 막는단 말인가?”
“지금 마교가 문제인가! 곤륜을 그리 만든 게 혈교라고 하지 않나! 혈마가 부활했다는 말일세!”
중원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은 공포와 절망을 넘어 불안으로 이어졌다.
곤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강호의 균형이 깨졌음을 의미했다.
혈교의 세력이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역사 속에서 천마를 필두로 한 마인들이 몇 차례 중원으로 향하는 길목을 뚫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전투의 일환이었을 뿐이었다. 곤륜은 언제나 무너졌던 전선을 다시 세우고, 중원을 수호하기 위해 재정비되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어찌 삽시간에…”
곤륜의 멸문은 강호의 기록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속도로 이루어졌다. 단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말이다.
피로 물든 곤륜산맥의 모습을 전한 소식통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피가 산맥을 타고 내려오고 있더군. 마치 산 전체가 피로 뒤덮인 것 같았다네.”
“하, 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세! 다들 못 들었는가? 곤륜의 도사들이….”
“도사들이 뭐?”
“도, 도사들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돌아다니고 있네!”
피로 물든 곤륜산맥에서 벗어난 몇몇 목격자들의 증언은 처음엔 믿기 어려운 소문처럼 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도사들의 시신은 더 이상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생기가 사라진 채, 피로 물든 도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기괴하고 경직되었지만, 수년, 수십 년간 도가의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여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그들은 강호를 떠도는 새로운 강시가 되어 무차별적으로 무림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강시가… 곤륜의 도사들이다!”
“저건… 장로님이다! 장로님이 왜 강시로…!”
본산의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곤륜산으로 돌아온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형과 사제를 강시로 다시 마주해야 했다.
심지어 강시가 된 곤륜의 몇몇 도사들은 생전의 무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평범한 강시들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기에 그들이 무심한 얼굴로 내공을 실은 검과 손을 휘두르며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이 이지를 잃은 괴물이라는 점은 다를 바가 없었다.
“사, 사형! 접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키에에에엑!”
“사형 제발… 컥!”
무림인들은 그 장면을 보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죽음조차 그들을 끝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혈교도들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곤륜산을 초토화한 후 곧장 중원을 향해 몰려올 것이라 생각했던 혈교의 움직임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혈교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야? 그토록 많은 무리가 움직였는데….”
그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것이다.
곤륜에서 흘러나온 소식들은 혈교가 중원을 향해 진격할 것이라는 긴박한 경고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흔적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향했는지, 도무지 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흩어진 겁니까? 아니면 무언가를 준비 중인 겁니까?”
“그들이 단순히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닐 겁니다. 침묵은 폭풍 전야일 뿐이지요….”
혈교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무림은 혼란에 휩싸였다.
정파 문파들은 급히 경계를 강화하고, 각 세가는 혈교의 침략에 대비해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방어선 어디에도 혈교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아무렇게나 사라진 것이 아님은 명백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안 돼! 이미 강시에게 물렸다! 물러나라!”
하루가 멀다 하고 정파 무림의 소속 문파들에서 비참한 소식이 들려왔다.
한적한 산촌의 세가, 작지만 단단한 방파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의 시신은 대부분 훼손되었거나, 심지어 강시로 변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건 단순한 학살이 아니다. 그들은 중원 전역에 공포를 퍼트리고 있다.”
“흩어져 약한 곳부터 침투하고 있어. 우리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결국 무림맹은 긴급히 회의를 소집하고 전 무림맹주였던 천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천검! 중원의 위기가 도래했소. 곤륜의 비극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소!”
“혈교도들의 본대를 반드시 찾아내 저지해야만 합니다. 당신이 나서주시오.”
전 무림맹주 천검은 혈교도들을 저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
터무니 없이 뻔뻔한 부탁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더니 도움이 필요할 때는 응당 자신이 해야 하는 일처럼 말하는 태도가.
하지만 천검은 천검이었다.
“그러지. 이 기회에 혈마의 잔재를 뿌리째 뽑아주마.”
하지만 천검의 의지와는 달리 혈교도들의 본대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천검은 여러 차례 혈교의 기운이 감지된다는 소문을 따라 움직였으나,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것이 파괴된 후였다.
무림맹의 소속 문파와 세가가 하나둘씩 침탈당하는 가운데, 천검은 그들의 본대가 아닌 소수의 척후병들만 만날 수 있었다.
“강시들…. 이건 단순한 강시와는 다르다. 혈교의 손길이 닿은 강시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척후병들과의 전투에서 그는 강시의 특이점을 발견했다.
혈교에 의해 만들어진 강시들은 기존의 강시들과는 달리 생전에 익힌 무공을 활용하는 데 능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이대로는 중원이 막을 수 없다.”
천검은 혈교도들의 본대를 찾아내지 못한 채,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의 검 끝이 닿는 곳마다 강시들이 쓰러져 갔지만, 정작 혈교의 실체에 다가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무엇이든 단서를 찾아야 한다…. 혈교는 단순한 공포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하고 있다.”
중원을 잠식하는 혈교의 그림자는 점점 더 넓어졌고, 천검이 끝없이 고뇌하며 다시 움직이던 그때.
중원에는 한 가지 기이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파의 세가와 가문들이 자신들의 담벼락에 핏빛의 붉은 깃발을 꽂아두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붉은 깃발은 그들 가문이 혈교의 뜻에 반하지 않겠다는 굴복의 상징이었다.
“이 깃발이 뭐냐고? 혈교에 충성을 맹세하는 건가?”
객잔에서 한 무림인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의 말투에는 혼란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조용히 술잔을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성이라기보단 생존이지. 붉은 깃발을 단 곳은 혈교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걸 믿으란 말인가?”
“믿을 수 없지. 하지만 그 깃발을 단 가문들이 멀쩡하다는 것도 사실이야. 어쩌겠어? 당장 내일이라도 강시 떼가 몰려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이들이 기댈 곳은 결국 그것뿐이잖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그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문은 불길처럼 빠르게 중원 전역에 퍼져나갔다.
붉은 깃발을 단 가문이나 문파들은 실제로 혈교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
강시의 그림자가 산을 타고 내려오는 와중에도, 붉은 깃발 아래의 세가들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을 유지했다.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
“말도 안 되지만, 지금 상황에서 뭐든 해 보는 수밖에 없잖아. 우리도 깃발을 걸어두자고.”
대부분의 사파와 약한 세가들은 선택의 여지 없이 깃발을 달기 시작했다.
이 붉은 깃발의 물결은 마치 암울한 중원의 새로운 표식처럼 강호 곳곳에 퍼져나갔다.
* * *
장강수로채의 중심.
용왕의 거처에서는 긴급히 소집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채주님, 이대로 있다간 우리도 혈교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한 간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눈빛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정파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곤륜 같은 거대한 문파조차 멸문당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혈교를 막겠습니까?”
강호에 널리 퍼진 소문처럼, 붉은 기를 달면 혈교의 침략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장강수로채 내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붉은 깃발을 달아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중원을 강시들로 가득하게 만든 그 장본인이라는 혈교가 아니던가!
간부들과 회의를 이어 가면서 용왕의 고민이 길어졌다.
용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힌 생각들로 가득했다.
과연 붉은 깃발을 다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아니면, 그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무릎을 꿇는 굴복의 상징일까?
용왕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쩌면… 너희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붉은 깃발을 다는 것이 당장은 살길이겠지. 하나….”
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고 한 수하가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채주님! 큰일입니다!”
수하의 얼굴은 창백했고,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급히 말했다.
“혀, 혈교도! 그들이 지금 장강을 타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회의실의 간부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마나 가까운가?”
용왕의 물음에 수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미…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더는 붉은 깃발을 꽂을 시간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