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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녹로 2권
지은이 : 원
펴낸이 : 김기철
펴낸곳 : (주)텐북
주소 :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2로 143 가산어반워크 2차 1705호
전화 : 070-8823-8681
FAX : 02-6344-5574
출판등록 : 제 2021-000015호
전자우편 : tenbook@tenbook.co.kr
홈페이지 : www.tenbook.co.kr
ⓒ원, 2025
※ ISBN : 979-11-7408-439-2
※ 가격 : 3,200원
※ 발행일 : 2025년 8월 22일
※ 저작권자의 승인 없는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2권
“표물을 나르다니. 그게 무슨…?”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테물렌이 당황하며 되물었지만, 운조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 나갈 뿐이었다.
“마적들의 기마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지. 특히 혈풍사의 마적들은 마치 말의 움직임을 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다던데. 그러니 표물도 누구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지 않겠나?”
“지금…. 우리 혈풍사 형제들에게 표사를 하라는 거냐?”
사뭇 진지한 얼굴로 이어진 운조의 말에 테물렌은 결국 참지 못하고 광소를 내뱉었다.
“광활한 사막을 가르고 중원에 들어와서 여러 놈들을 만나 보았지만 우릴 표사로 고용하겠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군. 표사 일이라….”
테물렌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턱 끝을 매만졌다.
“그러면 삼합표국의 표물을 옮기자는 거냐?”
“무슨 소리야? 분명 함께하자고 했잖아. 녹림의 길을 쓰자고.”
“……?”
“그러니까 나는 새로운 표국을 만들 생각이다.”
뭐라? 표국을 만들어?
테물렌는 황당함이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표국을 만들어? 아니, 만에 하나 만든다고 해도 마적과 산적이 함께 차린 표국 따위에 누가 표물을 맡긴다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될 텐데.”
“녹림도 사이에서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다. 다른 산채의 재물을 탐하지 않는 것이지.”
“그게 무슨…?”
벙찐 표정으로 묻는 테물렌의 말에도 운조는 덤덤히 답했다.
“쉽게 말해 혈풍사가 우리 쾌묘채와 협력관계라면 일수봉에 있는 우리 구역뿐만이 아니라 녹림이 지키는 산길은 그 어느 곳이든 무사 통과를 할 수 있다는 거다.”
“기가 막히는군. 그걸 지금 말이라고….”
“그래. 혈풍사 너희가 그 어느 집단보다도 안전하게 표물을 옮길 수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
표행에 가장 중요한 건 단 두 가지. 바로 ‘빠르게’와 ‘안전하게’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빠르고 안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게 바로 산을 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두 가지 산을 다 넘을 방도가 생기자 테물렌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녹림과 원활하게 협력할 수만 있다면…. 정말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여전히 이해가지 않는 게 있었다.
“대체 왜 하필 표국이지? 너희 녹림이라면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도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테물렌이 죽 째진 실눈을 날카롭게 뜨며 물었다.
“그리고 굳이 표국을 만든다고 해도, 사패련이 그랬던 것처럼 녹림의 세력들을 통합해 만드는 게 훨씬 낫지 않겠느냔 말이다.”
“흠. 솔직히 말하지.”
운조가 슬쩍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녹림에서는 산채별로 누가 가장 수익을 많이 낼지를 내기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다른 산채와는 협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모두가 너의 경쟁자라는 소리냐?”
“그래.”
“…….”
이유 없는 호의보다는 이유 있는 탐욕이 나은 법.
쾌묘채에서 자신들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무리다. 삼합표국만 해도 뒷배가 사패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네가 정말 표국일에 관심이 있다면 그 오명을 벗기 위해 삼합표국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행주는 빨아도 행주고 호박은 줄을 그어도 호박이다.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고 해 봤자 산적은 산적이고 마적은 마적일 뿐.
“게다가 이번에 제갈세가의 진법을 파훼하고 훔친 후로는 이제 사파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삼합표국을 사용하는 이가 없다고 하더군. 그런데 마적에 산적?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어야 할 거다.”
심지어 산적과 마적이 합쳐진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괜한 걱정할 필요 따위 없다. 우리 표국은 다른 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테니까.”
하지만 운조의 입가는 서늘하게 빛났다.
마치 계획이 있는 사람처럼.
* * *
쾌묘채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앞으로 함께 표국을 진행하기로 한 혈풍사의 마적들이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도록.”
“우리는 이제 마적이 아니다. 이왕이면 사막의 전사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옛 월하루가 있던 자리에서 우리 산채까지 그리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평균 뜀박질이 경공보다 빠른 수준인 혈타마를 타고 오니 순식간이었다.
제아무리 빠른 말이라도 보통 경공과 비슷하거나 그에 못 미치는 수준인 걸 감안하자면, 경공만 내리 익힌 고수가 아니고서야 혈타마를 따라잡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 새끼들이 귀꾸녕에 빙당호로가 박혔나? 큰형이 환영하라잖냐. 손목 가출했냐 시봉방 것들아? 박수. 박수!”
“환영하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지 말입니다.
쾌묘의 다그침에 산적들이 희번덕한 눈빛을 보내며 마적들에게 눈빛을 쏘아냈다.
으레 사내들끼리 하는 기 싸움 같은 거랄까?
‘아서라 새끼들아. 네놈들 실력으로는 놈들이 타고 온 혈타마에도 비비지 못한다.’
비록 그동안 특별히 만든 영양환 덕에 백독불침 정도 되던 놈들이 이제 천독불침 정도는 되었고.
몸에 가득 찬 탁기가 거의 다 사라졌으며, 좁쌀만 하던 단전이 쌀알만 하게 커지기도 했다.
그나마 기반이 있던 짝눈 짝귀의 단전이 쌀알에서 콩알로 커졌고, 코딱지만 한 재능이 있던 쾌묘가 콩알에서 복숭아 씨앗 정도 크기로 단전을 키우긴 했지.
하지만 쾌묘채 놈들이 얼마나 강해졌든 간에, 이미 기본기가 탄탄하게 잡혀있는 혈풍사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 위에 지은 산채라. 천하의 명당이 틀림없군.”
반면 마적들은 애초부터 산적들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일까?
다들 주변 풍경을 살피는 데 급급할 뿐, 산적 놈들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어색한 분위기는 술과 고기가 더해지자 금세 수그러들었다.
“시봉방거, 말이 일류 고수만큼 빠르다니! 끝내주는구만?”
“크흐흐. 고작 그 정도로 뭘 놀라고 그러나. 우리 대장의 말은 그보다 더 빠르다. 무려 절정 고수에 버금가는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와. 저런 말은 얼마 정도 하나? 은자 30냥 정도 하려나? 40냥?”
세상 물정 모르는 쾌묘 놈의 말에 마적들이 배꼽을 부여잡고 낄낄대자 쾌묘가 붕어 같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더 높아? 은원보 1개 정도 되나?”
“크큭. 더는 못 들어주겠군. 굳이 가격을 매기자면, 혈타마 중에서 가장 느린 녀석이더라도 최소 금원보 2개는 줘야 할 거다.”
“그… 금원보가 2개? 뭐 그딴 강호권력급 말이 다 있냐? 가, 가만. 이 조끄튼 시봉방이들. 너희가 타고 온 말만 해도 쉰이 넘는데 그러면… 흐어억?!”
입을 쩍 벌어진 쾌묘를 보며 터걸더르는 걸걸한 광소를 내뱉었다.
“강호권력급이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혈타마들은 우리의 가족이다.”
마적들이 풀숲에 자유롭게 풀어져 있는 혈타마들을 턱짓하며 말했다.
“만에 하나 돈을 주고 판다고 하더라도 중원인들 중에 혈타마를 탈 수 있는 자는 없다. 만약 네놈들 중에 혈타마를 탈 수 있는 놈이 있다면 혈타마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지.”
“진짜냐!”
“물론이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는 게 좋을 테다. 누차 말하지만 혈타마들은 성격이 까탈스러워 낯선 이가 가면….”
콰앙! 콰직-
“…음. 저렇게 되지. 누가 좀 챙겨야겠는데?”
터걸더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혈타마를 향해 내달렸던 쾌묘는 곧장 뒷발에 차여 몸이 새우처럼 접힌 채 풀숲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산적들은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짝귀야. 지금 장작 패는 소리 나지 않았냐?”
“…왜 비싼 말인지 알겠지 말입니다.”
“짝눈, 짝귀. 가서 쾌묘 좀 챙겨 와라. 금창약 좀 발라두고.”
“예, 큰형님. 가자.”
“예, 형님.”
쾌묘의 허리를 반으로 접히게 한 혈타마는 나름 쾌묘를 배려해서 찬 게 분명했다.
혈타마가 마음먹고 뒷발을 찼다면 쾌묘는 창자가 터진 채 즉사했을 테니까.
“든든하군. 앞으로 잘 부탁한다, 테물렌.”
“이왕 함께하기로 한 거, 혈타마들도 마음껏 달릴 수 있고, 우리 형제들도 떳떳하게 돈을 벌 수 있기를 바란다. 한데, 표국의 이름은 뭐로 지어야 하지?”
타물렌이 내 잔에 황주를 가득 채우며 물었다.
“오늘 정하기로 한 걸 잊은 건 아닌데…. 이름을 짓는 데엔 영 젬병이라. 운조, 자네는 따로 생각한 이름이 있나?”
나는 가득 채워진 잔을 비우고는 품에서 곰방대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는 모닥불 위에 대통을 잠시 그을리고 그 안에 소경단을 톡 밀어 넣어 빨아들였다.
“스읍, 후우….”
소경단의 짙고 묵직한 연기를 내뱉으며 천천히 집채만 한 혈타마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는 정(井)자 같은 표국이 되었으면 한다. 정자의 모습처럼 동서남북 그 어디로도 뻗어나갈 수 있는, 손님이 찾는다면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는 그런 표국 말이다.
“운조. 일단 앉아서 말을 하지 그래? 방금 전에 봤듯이 우리 애들이 그리 상냥한 편은 아니다. 특히 그 흑마는 아직 사람을 태운 적이 한 번도 없는 어린 녀석이다.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우려가 담긴 테물렌의 말에도 나는 달빛에 비친 묵빛 털이 비단처럼 빛나는 흑마에게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다른 기존의 표국에 비해 우리가 만들 표국의 차별점은 뭐지? 바로 ‘속도’와 ‘안전’이다. 혈풍사가 2인 1조로 움직이니 빠르고, 녹림의 산길을 이용하니 안전하다.”
운조와 흑마는 점점 가까워져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다랐고.
“중원의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속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연합!!”
“운조. 알았으니 더 가까이 가지 말고….”
테물렌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나는 짙은 소경단의 연기를 내뱉으며 흑마의 등에 훌쩍 뛰어들었다.
털석-!
혈타마는 앉는 법도 일반 말과 완전히 다르다. 아무런 안장도 고삐도 없이 오직 갈기를 잡은 채 타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사막의 전사들이 타는 그 방식 그대로 흑마 위에 올라타 있자 혈풍사 전원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중원인인 내가 혈타마에 올라탔다는 것 자체는 물론이고, 낯선 이를 태운 이 혈타마가 별다른 저항 없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미파의 비구니가 애를 낳았다는 수준의 놀라움일 테지.
“범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향은 팔방일 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길로 나아가는 게 바로 우리다.”
나는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 위에서 마적들과 산적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팔방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을 담겠다. 우리가 만들 표국은 구방표국(九方標局)이다.”
돈만 받으면 무엇이든 운송하는 집단, 표국.
그 표국의 정의가 지금 이 순간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존재했던 표국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