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복수가 다 끝난 후에
사랑은 복수가 다 끝난 후에
사랑은 복수가 다 끝난 후에
1.



강원도 평창의 리조트, 11월의 싸늘한 바람이 잔디밭 위를 쓰다듬었다. 흩날리는 낙엽과 빈 맥주 캔, 여학생의 웃음소리와 남자들의 고함 소리가 이따금씩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리조트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별채 건물, 조명이 어슴푸레한 그곳 욕실 안에는 붉은 물이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사람의 체온이 식을 때는 고작 몇 분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유진희는 몰랐다. 그저 손목에서 떨어지는 피가 물 위에 퍼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입술이 떨렸다. 눈꺼풀 위로 눈물이 맺혔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피와 물과 눈물이 한 공간에 공존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무표정에 가까웠다. 공허하고 텅 빈 눈동자, 그것은 오늘 밤 그녀가 겪은 일이 결코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 연합 동문 MT라는 이름으로 모인 그날 밤은 시끄러웠다. 강남고 출신 대학생들, 서울 상위권 대학 법대, 의대, 경영학과의 재학생과 졸업반 선배들, 그리고 ‘눈이 예쁘다’는 이유로 끌려온 동문회 후배 여자들까지.

“진희, 원 샷.”

컵이 손에 쥐어졌을 때, 유진희는 거절하지 못했다. ‘분위기 파괴자’라는 말을 듣는 게 싫었고, 눈치 없는 애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1학년. 명찰에는 ‘경제학과’라는 학과명이 붙어 있었지만, 이 자리에서 그녀의 소속감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누군가의 팔이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얹어졌고, 누군가는 그녀의 잔을 채우며 웃었다.

“근데 진희 너, 진짜 귀엽게 생겼다.”

“그쵸? 후배들 중에 걔 말고 얘가 제일 괜찮아.”

알 수 없는 이야기, 알 수 없는 시선. 분위기는 빠르게 끈적하게 가라앉았고, 그 와중에도 술은 계속 흘렀다. 처음에는 그냥 손끝이 닿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점 팔꿈치가 허벅지에, 무릎이 다리 사이에 얹히고 나자, 유진희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싫어요.”

그녀는 말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남자 셋이 양옆에 앉았다. 나머지 둘은 문가 근처에서 휴대폰을 보며 서 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문을 지키고 있었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음을.

‘망보는 놈들. 방관자.’

그 단어가 뇌 속을 찔렀다.

입술이 막히고, 눈물이 터졌고, 몸이 눌리고, 울음 대신 흐느낌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움직였고, 진희는 점점 자신의 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의식은 있었지만, 감각은 없었다. 자기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멈췄다. 문이 열렸고, 누군가가 ‘야, 야!’ 하며 소리쳤고, 복도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희는 그저 무너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숨이 붙어 있었고, 머리는 아팠고, 손이 떨렸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을 틀고, 거울 앞에 섰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입술은 벌겋게 터져 있었다. 셔츠 단추는 일부 풀려 있었고, 허벅지에는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칫솔 통 옆에 놓인 면도칼을 집어 들었다. 몇 초 망설이다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물은 빠르게 몸을 덮었다.

피는 물 위에서 조용히 퍼졌다. 아름다울 정도로 붉었다.



문이 열렸다. 발소리. 숨 가쁜 숨소리. 그리고 그의 목소리.

“진희야!”

이정욱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고,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간간이 연락을 이어 오던 유일한 친구. 그는 욕조 안으로 다가와 그녀를 끌어 올렸다. 젖은 몸, 축 늘어진 팔, 식어 가는 손끝. 그는 외쳤다.

“진희야! 눈 떠! 진희야!”

119를 부르고, 수건을 꺼내고,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안으며, 그는 울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아, 진희야…”



병원. 응급실의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깨어난 유진희는 조용히 눈을 떴다. 손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코끝엔 산소 호흡기가 끼워져 있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정욱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이윽고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살았네.”

그의 손이 움찔 움직였다.

“죽고 싶었는데.”

“진희야….”

“난 살려 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듣지 않았어.”

그 말에 이정욱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흘렀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몇 주 뒤, 그녀는 다시 이정욱을 만났다. 색이 바랜 후드티, 무표정한 얼굴,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달라져 있었다.

“그놈들한테 복수하고 싶어.”

이정욱은 물었다.

“네가 그걸 할 수 있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건 쉬웠어. 그 날 했으니까. 근데… 내가 살기로 했잖아. 그럼, 내 방식대로 살아야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끝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복수하려면, 넌 떳떳하게 살아야 해. 네가 네 삶을 잃지 않아야, 그게 진짜 복수야.”

“그럼… 도와줄래? 정욱아.”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도와줄게.”



5년 후.

윤한나.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바뀐 여자. 고급스러운 메이크업, 정제된 억양, 작은 몸에 흐르는 치명적인 기운. 그녀는 강남 한복판, 상류층 남성들이 모이는 고급 룸살롱 ‘엘라비나’의 최고 에이스였다.

하룻밤, 그녀를 개인적으로 대동하려면 최소 500만 원. 그마저도 예약이 밀려 있어 몇 주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설적인 여자.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는 단 두 명뿐이었다.

자신. 그리고 이정욱.

한나는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다시 그리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서기철. 최철민. 민윤찬. 이민기. 정도욱. 박일남. 황태열.”

그녀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한 명씩. 천천히. 아주 고요하게.”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구두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사냥이 시작되려는 밤이었다.

* * *

강남구 신사동. 은밀하게 숨겨진 건물 5층, ‘엘라비나’의 문이 열렸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각.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은 없었다. 화려한 조명 대신 은은한 백열등이 천장 아래로 늘어졌고, 샹들리에가 어두운 금빛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톱’이라 불리는 여자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고치고 있었다.

윤한나.
누구도 그녀가 성형과 신분 세탁, 위조된 서류를 통해 새로 태어난 여자라는 걸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아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존재는 룸살롱 그 자체였고, VIP 고객들에겐 ‘예약이 불가능한 여자’로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