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수업 중입니다 2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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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2)



그때.

“하진아, 여기 여기!”

엄마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하진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엄마는 익숙한 동작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데이트 안 하고 여긴 왜 왔어?”

엄마는 반쯤 장난기 섞인 얼굴로 하진을 이끄는 손에 힘을 주었다. 성훈이 신랑 신부를 만나러 간 사이, 하진은 엄마의 팔에 이끌려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딸이 방학이라 잠시 미국에 왔어요.”

엄마의 인사에, 사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한 부인이 하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얼굴이 단정하고, 말 한마디 없이도 품위가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미국엔 얼마나 머무르세요?”

그 부인이 먼저 말을 건넸다. 하진은 살짝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한 달 정도요.”

“저는 크리스 엄마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기, 크리스가 오네요.”

그녀가 손을 들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성훈이 무리 사이를 헤치며 돌아오고 있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어머,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누군가 감탄 섞인 말투로 속삭이듯 말했다. 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 분위기는 농담처럼 가볍지 않았고,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성훈이 하진 옆에 선 순간, 또다시 감탄이 흘러나왔다. 무심한 듯 다정한 분위기, 거리감 없이 나란히 선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 나올 법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흐뭇한 표정의 교인들 사이를 빠져나와 차에 오른 하진은, 숨을 돌리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할 얘기가 있어요.”

운전대를 잡은 성훈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애써 밝은 말투였지만, 그 말에는 약간의 긴장이 묻어 있었다.

“사실은…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부모님은 아직 모르시고요. 하지만 성훈 씨 부모님이 괜한 기대를 하시게 되면… 곤란하실까 봐요.”

성훈의 표정이 잠시 굳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 씨가 부모님께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제가 아직 확신이 없어서요. 더 이상 말씀드리긴 곤란해요.”

“사실… 좀 실망스럽네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은 저도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걸로… 서로 비긴 건가요?”

뜻밖의 고백에 하진은 눈이 동그래졌다.

“대학 동창이에요. 한국인은 아닌데… 부모님이 반대하세요. 설득하는 것도 지치고, 그래서 정리하고 부모님 기대에 맞춰 보려던 건데… 뜻대로 되는 일이 없네요.”

운전하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랑… 정리하신 거예요?”

하진이 조심스레 물었다.

“정리 중이었죠. 너무 오래된 사이라… 헤어지자는 말도 어색할 만큼요. 혹시 오래 연애해 보셨어요? 한동안 연락이 없어도, 전혀 걱정되지 않는 사이. 뭘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은 그런 관계요. 너무 익숙해서, 공기처럼 가까이에 있는데, 의식하지 않게 되죠. 하지만 ‘없어졌다’고 상상하는 순간, 그제야 숨이 막혀요. 절박해지고, 놓치고 싶지 않아지고요.”

“표현… 정말 좋네요. 공기 같은 사람이라….”

하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속에, 떠올라선 안 되는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하진에게 민수는 어떤 존재일까. 문득, 그녀는 상념에 잠겼다. 민수가 다녀간 뒤, 하진의 머릿속은 온통 그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몸이 달아올라 얼음물을 들이켜도 쉽게 식지 않았고, 목마름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은 그 감정을 인정하기를 꺼렸다. 너무 빠르고, 너무 복잡해서, 마치 실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차 안이 덥나요?”

성훈이 에어컨 온도를 낮추며 얼굴이 붉어진 하진을 힐끔 보았다.

“조금요. 근데, 저에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해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거든요.”

씨익 웃어 보이는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훈이 잠시 머뭇대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하진 씨는 저한텐 산소 호흡기 같은 존재예요.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는데, 잠깐이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됐거든요. 계시는 동안이라도 친구처럼 지내다 가주면 좋겠어요.”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라디오에서 재즈 선율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창밖의 풍경은 천천히 뒤로 밀려나고, 하진은 손끝으로 팔걸이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럼 저도, 공기처럼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옆에 있을게요. 서로 부담 없이.”

하진의 말에 성훈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무겁게 짓눌리던 부담이 걷히고 하진은 영화사 스튜디오 투어 내내 진심으로 즐겼다. 아카데미 수상작 촬영지며 영화와 TV 제작 과정, 소품 전시실까지, 하진에게 지루할 틈은 없었다.

관람 중간중간, 성훈은 하진에게 설명을 덧붙였고, 하진은 간혹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다정하게, 그러나 분명한 거리감을 두며 그들은 하루를 함께 보냈다.

“원하면 춤춰도 돼요.”

투어를 마친 뒤, 재즈바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맥주를 마시던 중, 성훈이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좋아요. 같이 춰요.”

두 사람은 손에 맥주잔을 든 채 무대로 나갔다. 흥겨운 재즈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성훈은 리듬을 탄답시고 움직이면서도 온몸으로 ‘몸치’임을 증명했고, 하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하고 있을 때도 이렇게 잘 웃어요?”

성훈의 질문에 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요. 숨이 막혀요. 왜 그럴까요?”

오히려 질문을 되묻는 하진의 말에, 성훈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혹시 얘기하고 싶으면, 자세히 말해 주세요. 제가 분석해 드릴게요. 심리 상담가는 아니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정답은 아닐지라도, 나눌 수 있는 얘기는 있을 거예요.”

하진은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기회가 되면요, 나중에요.”

“그땐 꼭 들려주세요. 듣는 건, 제가 잘하거든요.”

그날 밤, 성훈과 헤어지고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하진은 깜깜한 거실 소파에 앉아 민수가 아닌, 성훈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기’, ‘산소 호흡기’ 같은 단어들이 끈적한 송진처럼 머릿속에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스럽게도, 그 끈적임이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편안했다.

물컹한 밤공기를 가르며 어둠 속에 앉아 있던 하진은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는 데 익숙해진 자신이, 정작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릿하게 웃음이 났다.

지금 하진에게 필요한 건 명확한 답이 아니라,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연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 첫 연습은, 아마도 ‘조민수’라는 이름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이토록 숨이 막히는 걸 보면, 그 사람은 이미 하진의 내면 깊은 곳에서 호흡처럼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익숙하고, 당연한 듯 곁에 머물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존재.

하진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거실. 그 고요함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민수의 흔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