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6
<목차>
22-2.
23.
24.
25-1.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22-2.
한 카페에 여성이 홀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으나, 주변의 사람들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기 바빴다.
그건 누가 봐도 가발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한 여자치고는 매우 짧은 머리라든가, 평범한 드레스처럼 보이지만 뭔가 독특하고 개성적인 차림새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찻잔을 드는 그 평이한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아우라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우아한 기품과는 확연히 다른 눈을 끄는 모양새는 분명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제게 몰리는 시선을 뻔히 의식하면서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그녀의 대범한 심성 역시 독특하긴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여러 사람이 한 명을 조용히 힐끗거리던 감상의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온 이방인의 등장에 깨졌다. 그 인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걸어와 자리에 앉았다.
“먼저 와 있었네요?”
비비안이 자리에 앉아 묻자, 사라는 보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이 시간대는 한가하니까요. 뭐 당분간 바쁠 일도 없으니까요.”
은근한 미소를 짓는 표정에서 기쁜 뉘앙스를 눈치챈 비비안이 화색을 보이며 물었다.
“정말요? 설마……!”
그러나 사라는 고개를 저으며 비비안의 말을 가로막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해요.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까요.”
사라가 주변을 슥 둘러보며 말하자, 비비안이 그제야 온 주목을 받고 있는 묘한 상황을 인식하고는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어쩐지 얼굴이 따끔따끔하다 했더니……. 그럼 잠시 나가서 걸을까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한껏 부풀리고는 떠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다들 아쉬운 듯 쳐다보았으나, 다양한 의미로 유명한 비비안과 연관되고 싶지는 않은지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실내에서 나온 비비안이 사라에게 물었다.
“원래 그래요? 사람들이 막 쳐다보고?”
“좀 그런 편이죠 아무래도. 머리도 그렇고, 옷도 그러니까.”
사라가 제 머리를 힐끗 가리키며 말했다. 밤에 봤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뒷머리에는 옆에 늘어진 제 고유의 색과는 확연히 다른 색의 머리칼이 다소곳이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 가발 썼던 거예요?”
“네, 무대에서는 남장을 해야 하니까 머리를 짧게 잘랐어요. 다만 평상시는 이렇게 가발을 붙이고 다니는 편이죠. 아니면 완벽하게 새로 쓰거나.”
“불편하겠어요.”
“뭐, 그게 직업인데 당연히 감수해야죠.”
익숙한 반응에 사라가 개의치 않다는 듯 이야기하자, 비비안이 그게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가발 쓰고 다니려면 불편하잖아요. 굳이 안 쓰고 다니면 편할 텐데.”
“…….”
“솔직히 머리를 잔뜩 길러서 이리저리 고정해 두고 다니는 거 너무 귀찮아요. 예전에는 적당히 길어지면 잘랐는데, 요즘은 전보다 더 빽빽하게 묶고 다녀야 해서 짜증 난다니까요.”
비비안의 투정에 사라는 살짝 놀랐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비비안 성격이라면 그렇겠네요.”
비비안은 그 말에 ‘근데 내 성격이 어떻길래?’ 하는 묘한 의문을 품으면서도, 같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까 마치지 못한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뒤에 왕비님은 만나 뵀어요?”
“그 일이 있고 며칠 후에 약속한 대로 궁정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장소와 시각, 날짜만 적혀 있었지만 의도야 뭐, 뻔했죠. 지난번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으니, 이번엔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선보이라는 거였으니까.”
비비안은 지난번 왕비의 혹평 아닌 혹평을 떠올렸다. 물론 저에게는 그때의 노래도 그저 감탄만 했을 뿐이었지만, 전문가인 두 사람이 그러니 그러려니 하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언급된 장소로 갔더니, 오페라 극장 하나가 텅텅 비어 있더군요. 그 황금 시간대에 객석은 텅 비어 있었고 정면의 박스석에 단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요?”
비비안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물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함께 천천히 걷던 사라는 갑자기 자리에 멈추더니, 멍한 표정을 보며 툭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노래를 불렀죠. 그게 끝이에요.”
“네?”
“아니, 뭐 다른 일이 있었겠어요? 노래 듣고 싶어서 온 분 앞에서 열심히 노래했겠죠.”
“아니, 그거야 그렇겠지만…….”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지 않냐’는 말투에 사라가 다시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궁금해하는지는 알겠는데, 글쎄요. 특별히 아무도 들이지 않고 왕비님 혼자만 보신 거라 이야기하기는 좀 눈치가 보이네요.”
“아…….”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비비안이 아쉽게 대답했다. 그 아쉬운 표정을 보며, 남몰래 짓궂게 웃던 사라는 넌지시 비비안이 궁금해할 것을 말해 주었다.
“끝나고 그러셨어요. 곧 있을 개인 음악회에 초대하시겠다고.”
“진짜요?”
비비안이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를 듯 기뻐하며 대답했다.
“네, 그분보다 취향이 더 까다로운 사람이 많으니 잘 준비해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건 사라를 소개하겠다는 말이랑 다를 바 없잖아요!”
“뭐, 그런 셈이죠.”
사라가 자부심을 숨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비비안은 사라를 와락 껴안으며 방방 뛰었다.
“축하해요! 진짜 잘됐어요. 하긴 사라 실력이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말 잘됐어요.”
그렇게 한참을 꺄악 소리치더니 갑자기 또 우뚝 멈춰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이거 나한테 말해도 되는 거죠?”
“이 정도는 되겠죠. 까다로운 분은 아니니까.”
“……뭐, ‘생각만큼’은요.”
“그래요, 생각만큼은.”
물론 이어진 말에 비비안은 약간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곧 사소한 생각 따윈 집어 던지고 기쁜 소식에 마저 환호했다.
자신의 일을 제 일처럼 기뻐해 주는 그 반응에 사라가 요 며칠간 고민했던 것을 조심히 물어봤다.
“비비안, 근데 왜 갑자기 연락한 거예요?”
진지한 물음에 비비안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었어요. 많이 놀랐죠.”
“2주가 넘어서 갑자기 온 연락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솔직히 난 연락이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네? 그건 오해예요.”
“알아요. 아까 비비안 반응 보고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정말 나랑 더 이상의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면, 내 일에 그렇게 기뻐해 주진 않았겠죠. 그래서 묻는 거예요. 무슨 일, 있었죠?”
“…….”
“무슨 일이 있던 거 맞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게…….”
사라의 물음에 비비안이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없는 반응에 사라는 조급해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말 못 할 문제라면 더 묻진 않을게요.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돼서 묻는 거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를 한껏 걱정하는 물음에 비비안이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갇혀 있었어요.”
“갇혀 있었다니요?”
예상치 못한 말에 사라가 심각하게 묻자, 비비안이 오해는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범죄 이런 건 아니에요. 그냥 내 방에 갇혀 있었던 것뿐이에요. 더 정확히는, 외출 금지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혹시나 하는 상상에 걱정하던 사라가 그제야 잔뜩 찌푸린 미간을 풀었다. 정확한 사정은 몰라도, 어떤 상황일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시선을 돌려 옆을 보던 사라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들켰어요?”
“네. 완벽하게, 들켰어요. 그래서 자숙하는 의미로 방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거예요.”
“공작 부인께서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안 물어봐도 알 것 같네요.”
“…….”
“많이 걱정하셔서 그랬을 거예요. 실제로 위험했으니까.”
위로하는 듯한 사라의 말에 비비안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글쎄요. 걱정해서 그러셨다기보다는……, 그냥 질책당했어요. 아주 호되게.”
몇 주 전 있던 일을 떠올리며 말하는 그녀의 말투는 아주 삐딱했다.
다사다난했던 하루가 지난 다음 날, 비비안은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밤새 신경이 곤두선 채 여기저기를 쏘다녔으니 피로가 잔뜩 쌓인 탓이었다.
한낮이 되도록 일어나지 않던 비비안은 늦은 점심이 돼서야, 그마저도 하도 일어나지 않아 눈치껏 그녀를 깨우러 온 하녀에 의해 일어났다.
잔뜩 참에 취해 대충 세수하고, 식당으로 내려가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진한 홍차와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서야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겨우 잠을 깨 밥을 먹은 비비안은 응접실을 지나치다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엄마?”
응접실에는 조세핀이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요 며칠간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조세핀이 웬일로 드물게 나와 있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 비비안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다가갔다.
“엄마!”
“비비안.”
비비안의 등장에 조세핀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어쩐지 지난 며칠과는 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에 비비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이제 일어났니? 늦었구나.”
“네, 좀 피곤해서요.”
“그래. 여기 좀 앉아 보렴.”
비비안이 맞은편에 앉으니 조세핀이 다시 신문을 보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니?”
“몸이요? 네, 그냥 좀 피곤했던 거예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제게 눈을 맞추지는 않았으나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보니 역시 기분은 꽤 좋은 듯했다. 기쁜 마음에 비비안이 슬그머니 말했다.
“엄마,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그래 보이니? 기쁜 소식이 들려와서 그렇단다.”
“기쁜 소식이요?”
조세핀의 대답에 비비안은 ‘그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금방 눈치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그래, 내 누명이 벗겨졌다는구나.”
“정말요? 정말 다행이네요.”
비비안이 적당한 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말 처음 소식을 듣는 것처럼 느낄 것만 같은 연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자연스러운 연기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여태 잠잠히 신문을 보고 있던 조세핀이 날카롭게 눈매를 빛내며 물었다. 그 표정에서 비비안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곤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백치처럼 웃으며 덧붙였다.
“그럼요.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엄마가 억울한 누명을 벗었는데.”
하지만 상대는 비비안의 어머니였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그녀를 줄곧 지켜봐 온 조세핀에게는 전부 어쭙잖은 연기에 불과했다.
“그래? 네가 다 한 것인데, 어떻게 네가 모를 수가 있니?”
“……네?”
“모르는 척이라면 안 해도 된단다. 이미 짐작하고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말에 비비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을 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 말에 조세핀이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어제 늦은 밤에 들어왔다는 걸 들었다.”
조세핀의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인상을 썼다.
‘혹시 그 심부름꾼 소년이 약속을 어기고 일렀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친절한 조세핀은 괜한 의심을 풀도록 도와주었다.
“가정부가 네가 들어오는 걸 봤다는구나. 그 새벽에 수선을 피웠으니, 당연하겠지.”
“아…….”
어쩐지 떨떠름하던 소년의 표정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니, 그럼 신호라도 좀 주지……. 그리고 가정부는 왜 나를 보고서 인기척도 안 낸 거람?’
비비안이 내심 서운한 기색을 보였으나 조세핀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