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2
<목차>
5.
6.
7.
8.
공작 영애 자리는 사양합니다
5.
‘어디 보자…….’
비비안은 어머니 몰래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니는 어느새 사람들과의 대화에 푹 빠져 자신이 빠져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비안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전부터 가 보고 싶던 말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 양산을 들고 도도도도 뛰어갔다.
어느 순간 딱딱한 대리석 바닥이 아니라 물컹하고 질척한 흙이 구두 아래로 느껴졌다. 점점 더 걸어갈수록 고상하고 우아한 말투가 아니라, 가식 없으면서도 노골적인 말투가 귓가에 들려왔다.
“30실버! 30실버!”
“현재 배당률이 얼마지?”
“3번 말, 3번 말에 거실 분 없습니까?”
“배당률을 확인하세요!”
“30실버라니 통이 작군. 5번 말에 1골드!”
돈을 바꾸는 사람들과 돈을 거는 사람들, 돈을 빌리는 사람들과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 호외꾼, 구경꾼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돈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한데 모인 곳은 아수라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처음엔 어마어마한 인파에 살짝 주춤하던 비비안도 이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배당률을 힐끔 보고, 말도 힐끔 보며, 사람들 사이에 익숙하다는 듯 녹아들었다.
말을 매어 놓은 곳 근처는 말똥이 무성했으나 드레스 자락을 잡고 조심스레 건너가 말의 목을 슬쩍 쓸어 보았다. 부드러운 털 아래로 펄떡대는 탄탄한 근육과 힘이 느껴졌다. 모든 말을 하나씩 쓸어 보며 비비안은 말의 상태를 체크하는 기수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흠…….”
한참을 말을 보면서 고민하는데, 한쪽에서 광채가 나는 듯한 얼굴이 보였다. 홀린 듯 다가가자 새하얀 얼굴이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새하얀 머리칼이 윤기가 자르르하게 찰랑였고, 검은 눈동자는 크고 동그란 흑진주처럼 매끈하게 빛나고 있었다.
“예쁘다…….”
비비안은 눈부시게 하얀 백마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디디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큰 키의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말은 건강미를 물씬 내뿜고 있었고 잘 관리된 아름다움이 물씬 느껴졌다.
마치 왕자님이 탈 법한 흰 말의 모습에 비비안은 설레어 하며 한 걸음씩 다가가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말은 사람의 손이 익숙한지 낯선 이의 손길에도 온순하게 고분고분했다.
“아가씨, 그 말이 마음에 드시나요? 이번 경주에도 참가하는 말인데 경마에 돈을 배팅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비비안이 말을 가만히 만지고 있자, 한 남자가 다가와 경마를 참여하기를 은근히 독려하였다. 그 소릴 들으며 비비안은 ‘얼마쯤 걸면 될까’ 하고 고민했다.
자신의 감으론 이렇게 훌륭한 말이라면 1등을 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돈도 충분히 가져왔지만…… 왠지 큰돈을 성큼 도박에 건다는 게 꺼려졌다.
한참을 고민했을까, 비비안이 돈을 걸려 할 때였다.
“내 말이 마음에 드나 보군?”
뒤에서 누군가가 웃으며 속삭였다.
“네?”
뒤를 돌아보자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와 눈매의 남성이 싱긋 웃으며 비비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금발의 남성은 비비안에게로 성큼 다가와 앞에 마주 서서 말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말이 이렇게 사람에게 온순하게 구는 건 처음인데 말이야.”
“아, 예…….”
비비안은 남자의 익숙한 하대에 어딘가 기시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다 이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정체를 기억해 내곤 외쳤다.
“그때 그 가면을 쓰신 분!”
“그래, 이제야 기억을 해 주는군.”
남자가 벌꿀처럼 다디단 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비비안은 저번에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인상인 남자의 얼굴에 흥미를 느끼며 빤히 쳐다보았다. 전에는 남자의 얼굴을 봐도 잘 몰랐는데, 가면을 벗은 남자의 얼굴은 매우…….
‘……잘생겼잖아…….’
비비안이 넋을 놓고 제 얼굴을 보는 걸 알았는지 남자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입가를 가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좀 부끄러운데.”
“아, 죄송합니다. 너무 잘생기셔서 그만…….”
“뭐? 하하하하. 나한테 직접적으로 잘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야. 그래, 그래. 내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해 준다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건방지다고 해야 할까, 어째야 할까…….”
남자가 재미있는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비비안은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뭐야, 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얼굴은 잘생겼는데 참 아리송한 사람이란 말이야.
다행히 남자는 화가 난 건 아닌 듯, 이내 대화의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내 말에 걸 생각인가?”
“아, 말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요. 튼튼하고 훌륭하기도 하구요.”
“보는 눈이 있군. 이 말은 국왕께서도 인정한 명마이지.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보통 명마는 성격이 좋지 않은 편이거든. 거친 편이지. 잘못했다간…….”
남자가 말 목을 쓸며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남자의 말이 끝나자 말이 갑작스럽게 튀어 오르며 앞으로 발길질을 했다. 그 바람에 비비안의 드레스며 얼굴에 온통 흙이 튀었다. 난데없이 쏟아진 흙 세례에 비비안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남자가 웃으며 손수건을 건넸다.
“자, 좀 정돈하는 편이 좋겠군.”
비비안이 태연하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손수건을 뺏어 들듯 챙기며 은근슬쩍 흘겨보았다.
흙이 튀어 오를 줄 알았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어떻게 자기만 쏙 피할 수 있어?
비비안의 흘기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아뇨.”
비비안이 할 수 없이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폭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그래, 많이 야속했나 보군. 필요하다면 저기 마차와 새 드레스를 준비해 줄 수도 있네만. 어떠신지, 레이디?”
남자가 비비안의 손에서 손수건을 부드럽게 빼앗아 들고 두 손을 잡으며 은근히 상체를 숙여 물었다. 남자의 한껏 가까워진 상체에 비비안이 뒤로 몸을 빼고는, 두 손을 빼내어 남자의 상체를 살포시 밀며 대답했다.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분의 마차를 함부로 탈 순 없지요.”
엄마가 아셨다간 기겁할 텐데, 어떻게 그런담?
“그래, 그렇단 말이지. 신중하군.”
“그야, 레이디이니까요. 신중해야지요.”
비비안이 제법 으스대듯 말하며 우쭐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니 제법 섭섭하군.”
“그야, 모르시는 분이니까요.”
“알베르 프레드릭 러스티. 모두들 알베르라고 부르지. 이 정도면 됐나?”
알베르 프레드릭 러스티? 아는 이름 중엔 없는데? 러스티? 어느 성씨지?
비비안이 이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 알베르가 어떻게 알았는지 대신 대답했다.
“아마 그대가 아는 이름은 아닐 거야. 난 그대를 알지만, 그대는 아마 날 모르겠지. 그야 처음 봤을 테니 말이야.”
“그런데 알베르 님은 저를 아신다고요?”
“수도에 올라온 귀족 중에 레이디 비비안을 모르는 귀족도 있을까, 과연?”
‘그야, 나름 유명 인사니까…….’
비비안이 애먼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혼자 주억거렸다.
“어찌 됐든, 방금 건 미안했네. 내 말이 갑자기 그럴 줄은 나도 몰랐으니.”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예, 뭐……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내 말에 돈을 걸 거라면, 많이 거는 걸 추천하지. 이번 경마에서 꼭 1등을 할 테니 말이야.”
“정말인가요?”
비비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레이디 비비안은 돈을 좋아하나 보군. 안 그런가?”
“그야……. 싫어하진 않죠. 하지만 돈보다는 재미가 우선이라서요.”
“그래, 나와 같네. 돈보다는 재미가 우선이지.”
남자가 비비안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후회하지 않을 걸세.”
남자가 빙그레 웃더니 비비안의 손에 무언가 하날 놓아 준 뒤 저만치 가 버렸다. 비비안은 자신에 손에 놓인, 하얀 각설탕을 내려 보다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비비안은 각설탕을 오독 한 입 깨물어 먹으며 중얼거렸다. 입 안에서 단맛이 한껏 퍼져 나갔다. 중독될 정도로 지독한, 단맛이었다.
알베르와 헤어진 뒤 비비안은 잠시 고민하다 경마 매대 앞에 섰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비비안은 말들을 다시 한번 쭈욱 둘러본 뒤에 돈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래, 질러 보자!’
비비안이 사람들의 목소리에 묻히지 않도록 큰 소리로 탁자에 돈을 탁 내밀었다.
“여기 이 말, 5골드!”
군중들의 시선이 비비안에게 쫙 몰렸다.
“5, 5골드? 5골드면 500실버입니다, 아가씨…….”
“그렇게 큰돈을 낸다고?”
“이런 내기는 처음인 것처럼 보이는 아가씨인데…….”
“좋아, 나도 질 수 없지. 2골드!”
“난 3골드 걸겠어!”
모두들 비비안의 통 큰 배팅에 흥분하여 너도나도 큰 금액을 부르기 바빴다. 그 틈바구니에서 비비안은 다시 돈을 내밀었다. 내기꾼이 비비안에게 되물었다.
“진짜 5골드 맞습니까?”
“맞아요.”
비비안이 단호하게 말하자, 내기꾼은 서둘러 마권을 주었다.
“나중에 돌려 달라고 해도 안 드립니다. 아시겠죠?”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 마요.”
비비안은 마권을 들고 신나게 뒤돌아 나왔다.
이길까? 이겼으면 좋겠다. 배당률이 얼마지? 비비안은 돈보다도 처음 자신이 해 보는 내기에 이겨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즐거워 보입니다.”
비비안의 어깨에 누군가가 툭 하고 부딪쳤다.
“레이디 비비안.”
“공작님.”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도박이라…….”
“왜요, 도박도 숙녀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하시게요?”
“그건 아닙니다. 다들 즐기는 유흥거리니.”
‘최근엔 좀 과열된 것 같긴 하지만…….’ 공작은 의외라는 듯 입가를 쓸며 덧붙였다. 설핏 웃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호탕하게 거금을 거는 레이디는 처음 봐서 그렇지.”
‘이젠 별것 가지고 다 참견질이야.’
“네, 잘 알겠구요.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비비안이 그를 지나쳐 가려 하는데 공작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 누구한테 걸었습니까?”
“왜요?”
“궁금해서 그럽니다.”
“비밀인데요?”
공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되물었다.
“말에 대해 잘 아십니까?”
“그런 시답잖은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오래 타 왔죠.”
“그렇군요. 나는 5번 말에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