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태자비 5권
가짜 태자비 5권
 
철없는 귀공자
 
 
 
“아닙니다. 마마는 벌써 일어나셔서 아침도 드시고, 집사와 집안일도 상의하셨습니다. 이제야 간신히 쉴 틈이 났는데 방에서 안 나오고 계십니다……. 왕야께서 오셨는데도…….”
자신도 뭔가 이상했는지 여종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알았다. 문이나 열어라.”
“예!”
여종이 얼른 문을 열었다.
내실은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 빛이 거의 안 들어와 어두웠다. 그래도 굳게 닫힌 창문 아래 앉아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하얀 꽃이 하나둘 수놓인 단순한 옷을 입고 있어서 한층 더 청순하고 우아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에 아련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이형도 그 모습에 잠시 황홀했다.
유옥환도 절세미녀였다. 유옥요와 비교해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형의 마음에는 이미 유옥요가 자리 잡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 뿐이었다.
유옥환이 얼른 일어나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왕야……, 조회를 마치셨습니까? 신첩이 맞으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세요.”
이형은 뭔가 불편한 듯 흥 하는 소리를 내더니 유옥환을 쳐다보았다. 어젯밤 잠을 못 잔 듯 눈 밑이 푸르스름했다.
“어젯밤에는 본 왕이 술에 취해서 쓸데없는 말을 했소. 마음에 두지 마시오.”
“신첩 왕야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지 이미 다 잊었습니다.”
유옥환이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아 이형이 다시 말했다.
“방금 집사에게 들었소. 왕부의 일로 노고가 많소.”
“신첩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대답도 빈틈없었다. 이형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달리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집사가 들어오더니 선물 물목을 이형에게 건네며 말했다.
“왕야, 살펴보시지요!”
“됐다. 왕비가 선택했으니 본 왕이 다시 볼 필요 없다.”
“네…….”
집사는 황당했다. 방금은 갖고 오라더니 지금이 또 왕비가 선택했으니 되었다고?
이형이 뒷짐을 지며 돌아섰다.
“그럼 본 왕은 나가겠소.”
“왕야, 식사는 이곳에서 안 하십니까?”
유옥환의 물음에 이형이 차갑게 대답했다.
“나는 됐소, 당신은 드시오.”
그러다 또 뭔가 떠올랐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 시간이 나면 본 왕과 함께 당신 친정에 갑시다.”
유옥환은 의아했지만 더는 묻지 않고 인사했다.
“살펴 가세요, 왕야.”
이형는 나가자 집사도 얼른 따라 나갔다.
유옥환이 의자에 앉자 여종이 기분 좋은 얼굴로 들어왔다.
“마마, 식사를 갖고 올까요?”
유옥환이 아무런 답이 없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여종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어린 아이의 근심걱정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랑 받으며 자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광스럽고 화려한 삶이지만 사실은 그녀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삶이 그녀가 원했던 것인가? 가문에서 심어 놓은 장기 돌로, 집안에서 그저 보는 장식품으로 이렇게 평생 살아가야 한다고?
남자들의 전쟁에서 여인은 그저 이런 부속품의 역할로 결정지어질 뿐인가…….
 
*
 
중추절이 지난 지 이미 한참 되었다. 화원의 국화도 진 지 오래였는데, 태자의 남하 계획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중궁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중서령 유삼사를 불러 만나고, 다시 황자들의 스승인 태부와 소부 등 원로대신을 불렀다. 집안의 일로 한담을 나누거나, 황자의 스승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의 명목이었고, 머문 시간도 짧아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낙청왕부도 한가하지 않았다. 낙청왕 이형은 왕비를 데리고 유씨 집안을 찾았다. 또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놀러 다녔다. 그 뒤부터 황제의 서탁에 태자를 얼른 남쪽으로 보내라는 상소가 가득 쌓이기 시작했다.
문무백관 대부분이 이런 상소를 올렸고, 심지어 태자의 측근인 형부상서 주만조도 같은 내용으로 올렸다.
“본 태자의 유일한 음모가 바로 황상께서 얼른 남쪽으로 나를 보내도록 하는 것이오! 게가 기름지고, 계화주가 향긋하게 익은 때에 가야 실컷 맛볼 수 있지 않겠소!”
“전하의 말씀에 소신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주만조가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태자 쪽으로 돌리자, 뒷짐을 지고 걷던 태자도 쳐다보며 껄껄 웃었다.
“그럼 자네도 부황께 청을 넣게. 탐식 흠차로 봉해 달라고! 그럼 본 태자가 데리고 가지! 하하하!”
태자의 큰 웃음소리에 대산들이 곁눈질로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저 태자는 남쪽에 가서 먹고 놀 생각만 한다며 다들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놀 생각만 하는 귀공자가 조운 수리시설을 돌아본다니, 더 혼란만 일어날 것 같아 걱정들이 늘었다.
오늘은 날씨가 흐렸다. 조회가 끝날 무렵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굵지 않았지만 깊은 가을비는 한층 더 춥게 느껴졌다. 한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따뜻한 안에 있다 밖으로 나온 이들은 으슬으슬한 추위에 몸을 떨었다.
추운지 두 손을 옷소매에 넣고 서 있는 주만조의 입술이 얼어서 약간 하얘졌다.
“소신은 가지 않겠습니다. 전하의 바람이 혹시 이뤄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황상께서 바로 허가를 한다 해도 서둘러 가지 않으면, 살찐 게는 먹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잘 익은 계화주는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잘 익은 술을 마시고 소신을 위해 몇 백 동이 가져 오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는 본 태자를 술 장사치로 생각하느냐? 술을 몇 백 동이 가져오라니!”
태자가 걷어차려고 하자 주만조가 얼른 피하며 웃었다.
“기다려라! 내 반드시 갖고 올 테니. 몇 백 동이가 아니라 한 홉 갖고 오지. 마시지는 못하고 냄새라도 맡으라고!”
주만조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그럼 소신은 꼭 쫓아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그저 농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주군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태자와 함께 강남을 가길 원한다 해도 황제는 허락할 리 없었고, 허락한다 해도 형부에서 그를 대신할 이가 없었다. 호시탐탐 형부상서의 지위를 노리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태자가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할 리 없었다.
청태전 광장을 나오자 빗줄기가 조금 더 강해졌다. 어린 내감이 급히 우산을 갖고 오자 안자가 얼른 우산을 펴서 태자의 머리 위를 가려 주었다.
머리 위 노란색의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든 우산을 흘긋 보고는 태자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주 대인에게 줘라!”
“감사하옵니다. 전하”
주만조는 안자의 반응을 기다리기도 전에 얼른 손을 뻗어 우산을 낚아채 쓰고 만족해 웃으며 얼른 출궁하는 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모습에 태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안자는 불만이었지만 태자가 아무 말이 없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주만조는 우산을 얻자 누가 그를 불러 세울까 겁내는 듯 바람처럼 빨리 걸었다. 주홍색의 문관 조복이 빗물에 젖어 어두워졌지만 젊은 그의 몸은 기분이 좋은 듯 통통 튀는 느낌이었다.
“전하! 소인이 얼른 가서 우산을 갖고 오겠습니다.”
우산을 갖고 온 어린 내감이 다시 달려가는데, 태자가 불렀다.
“돌아오너라. 가지 마라.”
내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자를 보며 도움을 청했고, 안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갖고 오지 말라면 갖고 오지 마라. 그리 눈치가 없다니! 방금 갖고 올 때 보기 좋은 우산으로 갖고 왔어야지!”
태자가 안자를 보고 껄껄 웃고는 뒷짐을 지고 동궁 쪽으로 걸어갔다. 빗줄기 속을 걸어가자 온몸이 안개비에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동궁에 도착하자 빗줄기는 아주 거세졌다. 동궁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멀리 우산도 없이 오는 태자 일행을 보고 다들 달려가 우산을 받치고, 바람막이를 걸치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번에는 태자도 거절하지 않고 시중을 받으며 발걸음을 더욱 빠르게 옮겼다. 그 바람에 우산을 받친 이가 제대로 따라오지를 못했다.
초 유모는 태자가 올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들고 궁인들과 맞으러 나갔다가 거센 비와 비에 젖은 태자를 보고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전하! 태자 전하! 어찌 이리 젖으셨습니까?”
그녀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수건을 꺼내 얼굴의 빗물을 닦으며 안자를 질책했다.
“눈치라곤 없는 종자 같으니! 주인의 우산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안자는 울상이 되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태자가 초 유모의 손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옥요는?”
“방에 계십니다. 방금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전하께서 그쪽에서 비를 피하느라 안 오시는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태자의 미소가 한층 깊어지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너희는 가서 일 보아라. 태자비 거처에도 시중드는 이들이 있으니!”
“네, 전하.”
시위와 다른 궁인들은 모두 물러가고 안자와 초 유모만 호숫가 거처로 갔다. 내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달콤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이런 걸신들린 고양이 같으니라고!”
태자는 급히 들어가지 않고, 처마 아래에 서서 몰래 안쪽을 쳐다보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가 청량했다.
깊은 가을에 비까지 와서 추운데 실내는 따뜻했다. 창문 아래 놓인 은주전자에서 뭔지 모르지만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달콤한 향이 안에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태자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고개를 돌려 보니 측비 방말이었다. 그녀는 하얀색의 짧은 웃옷에 장미색의 붉은 치마를 입고, 궁인이 받치고 있는 수놓인 꽃 우산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멀리 있는 태자를 향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신첩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동궁에 돌아와서 기분이 좋았던 태자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이를 보았지만 그렇다고 흥이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었다.
“일어나라.”
“네, 전하!”
방말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자비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네.”
태자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며 밝게 소리쳤다.
“옥요!”
유옥요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내실의 발을 걷으며 나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의 달려오듯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철! 돌아왔군요! 옷은 왜 다 젖었어요?”
그녀가 앞에 서서 태자의 몸을 털려 손을 들다가 뒤따라오는 방말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괜찮소. 비를 좀 맞았소. 먼저 옷을 갈아입지.”
태자가 유옥요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유옥요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유옥요는 옆에 있는 방말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신첩, 언니께 사과드리러 왔습니다. 언니께서 대인의 도량으로 신첩의 과오를 잊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짜 태자비 5권
 
동궁의 속셈
 
 
 
방말이 몹시 후회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유옥요는 중추절 다음 날인 팔 월 십육 일 저녁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화가 많이 났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거의 잊어서 그리 화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방말을 보며 말했다.
“됐다, 됐어! 나는 그리 속이 좁지 않다. 벌써 다 잊었다…….”
방말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언니, 태자 전하께서 강남지역에 조운과 수리시설을 시찰하러 가신다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궁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라 굳이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동궁의 측비가 아닌가.
“언제 출발하시는지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