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5장
6장
에필로그
5장
마리웨더는 소름 끼치도록 가식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기가 막혔다.
‘정말, 나보다 연기 잘하는구나.’
한 수 배우고 싶을 정도로 아주 훌륭했다. 감탄을 금치 못한 마리웨더는 카이든이 건네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툭툭 닦았다.
“리첼이야말로 괜찮아? 마음이 아프겠어. 그래도 양부모님인데.”
일부러 마리웨더는 뒤바뀌기 전, 원래의 처지에서 말했다. 그러자 리첼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무슨…… 말이니. 양녀는 너잖아.”
“리첼, 내가 잠시 떠나 있던 사이 내 역할을 해 줘서 고마워.”
워낙 작게 속삭였던 터라, 바로 코앞에 있는 리첼만이 마리웨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리웨더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고선 한껏 안타깝다는 듯이 시선을 올렸다. 눈썹에 매달렸던 눈물이 마리웨더의 새하얀 얼굴을 타고 애처롭게 흘러내렸다.
“그 덕분에…….”
잠시 말을 멈춘 마리웨더는 제 뒤에서 그저 팔짱 낀 채 상황을 지켜보는 카이든을 힐끔거렸다.
“든든한 남편을 얻었어.”
“……남편?”
“응, 곧 결혼하거든. 카이든과.”
마리웨더는 해사하게 웃었다.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웃는 얼굴은 천진난만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리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마리웨더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부 네 덕분이야, 리첼.”
“…….”
“네가 날 내쫓은 덕분에, 바꿔치기한 덕분에.”
“……하.”
꽈악-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놔 버렸다. 이제 리첼은 분노에 차오른 얼굴이 되었다. 도저히 화를 참을 줄 모르는 모습에 마리웨더는 속으로 실컷 비웃었다.
“그럼, 이만.”
마리웨더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곤 다시 관 쪽으로 다가갔다.
“흐윽…… 어머니, 아버지……!”
뒤에서 저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때마침 카이든이 제 연기를 도와주려는지 가까이 다가와서 어깨를 감쌌다.
“진정해, 마리.”
“흑…… 카이든……!”
마리웨더는 오늘 처음으로 알았다.
제 연기가 참 일품이었다는 것을.
***
바로 블랙우드가로 돌아갈까 했으나,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해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무리 장례식이 있어도 그렇지. 겉은 물론이고 내부 역시도 사람이 사는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안 돼.”
마리웨더는 자신의 침실로 올라왔다.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이 침실은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보였다.
잠시 주변을 훑어보던 마리웨더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문가에 기대어서 팔짱을 낀 카이든은 얼굴을 굳혔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널 혼자 둬?”
손을 뻗어 빨갛게 짓무른 마리웨더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아무리 리첼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위함이라 해도 너무 울었다.
마리웨더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따듯하여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설마요. 카이든과 같이 온 걸 아는데 제게 무슨 짓을 하겠어요?”
“바꿔치기 당한 것도 네가 저택에 있을 때였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어.”
더군다나 그녀가 리첼에게, 카이든과 곧 결혼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사실에 화가 난 리첼이 마리웨더에게 뭘 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마리웨더는 잠깐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혼자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역시, 쉽지 않네.’
마리웨더는 라프렌스 저택에 온 김에 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동쪽 문 앞 마족이 봉인된 항아리였다.
저와 리첼이 바꿔치기 당한 것도, 라프렌스 공작 부부가 죽은 것도 모두 그 항아리 마족 때문일 것이다. 그냥 두면 앞으로 제가 더 위험해질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어.’
원작 속에서는 항아리가 깨지는 순간 마족이 봉인에서 풀려나 자유를 되찾는다. 그리곤 동쪽 문을 열고 마족을 제국으로 불러들여서 또다시 마족과 인간 사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마리웨더는 항아리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원래는 마리웨더가 항아리를 깨고 마족을 해방시킨 후 리첼을 죽여 달라고 하는데.’
항아리 상태가 어떤지 모르기에 카이든을 데려갈 순 없었다. 카이든과 마족이 접촉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카이든이 마왕으로 각성할지도 모르고.’
그렇기에 그녀는 카이든을 두고 혼자서 확인하러 가야만 했다. 하지만 카이든은 여전히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말 들어, 마리.”
평소라면 이 정도의 고집은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물러날 수 없었다.
“싫어요.”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이 카이든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이번만큼은 물러나 주세요, 카이든.”
이윽고 마리웨더는 애원하듯이 그에게 부탁했다. 그는 그녀의 눈가를 쓸던 손길을 멈추곤 가만히 대고만 있다가 한숨을 푹 쉬며 뺨을 감쌌다.
“고집부리는 이유가 뭐지?”
“오랜만에 온 집이라서요. 혼자서 시간을 조금 보내고 싶었어요.”
“정말 그 이유뿐인가?”
“네. 다른 이유가 있을 리는 없잖아요.”
“…….”
“정말이에요.”
카이든은 눈치도 빠르고 감도 좋은 남자였다. 그는 마리웨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마리웨더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감이 좋은 사람이 이렇게 무서워.’
정말로 순수한 이유 때문이라는 듯이 마리웨더는 카이든을 똑바로 마주했다. 거짓말을 못 하는 편이긴 하나, 잘 속일 수는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이든은 그녀의 속임수에 넘어갔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딱 삼십 분.”
“한 시간을 주세요.”
“뭐? 십오 분이면 충분하다고?”
“카이든…….”
“십 분?”
“너무해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마리웨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삼십 분이라는 시간을 얻었다. 그는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쓸어 주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그럴게요.”
“하아…… 내가 어쩌다 너한테 이렇게 무르게 되었을까.”
“저도 제법 카이든에게 많이 양보하고 져 주고 있어요.”
“그것참 아주 고맙군.”
고개를 숙인 카이든은 마리웨더의 이마 위에 살며시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떼었다.
“저택 밖에서 대기하도록 하지. 볼일이 끝나면 바로 나와.”
카이든은 아예 마리웨더가 할 일이 있어서 저를 쫓아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이가 없는 마리웨더는 입을 달싹거렸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
잘 속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힘없이 웃던 마리웨더는 중얼거렸다.
“정말 추억에 잠기고 싶어서 그런 거라니까요.”
“그래, 알겠으니까 볼일 끝나면 바로 나오라고.”
“알겠어요.”
카이든은 대답까지 했으면서도 쉽게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저 마리웨더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끌어당기더니 꽉 안아 주었다.
“제멋대로 구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제가 언제 그랬다고…….”
“말도 많지.”
“…….”
드디어 카이든이 발을 움직였다. 마지못해 떨어진 카이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돌아보았다가 완전히 등을 지고 멀어졌다.
마리웨더는 카이든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제 침실 안에 있다가 한참 뒤에야 몸을 틀었다.
“……좋아. 지하를 찾자.”
마리웨더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저택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이렇게 사용인들이 안 보이지? 아무리 장례식에 집중했다고 해도…….’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은 저택은 폐허처럼 느껴졌다. 춥지도 않은데 괜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마리웨더는 주변을 살피며 지하를 찾았다. 라프렌스 가문이 지키는 동쪽 문은 분명 지하에 있었다.
‘대체 지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저택 내부가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지나가던 사용인이 보이면 물어보려고 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어째서인지 집 안을 빙글빙글 돌며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못 찾는 건가? 아니면 길을 잃어버렸나.’
목적지가 보이지 않으니 이제 슬슬 짜증이 일어날 때였다.
‘너는…… 누구니?’
그때였다. 어디선가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마리웨더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괜히 귀를 툭툭 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어쩌다 그 아이가…….’
또다시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웨더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잖아.”
여전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귀신?’
아무래도 지하 찾는 건 여기서 그만두고 카이든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나 싶었다.
‘여기, 뭔가 문 같아.’
서고 옆 모퉁이를 돌자마자 가짜 벽처럼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벽에 있는 별 무늬 중, 유일하게 단 하나의 큰 별만이 빨간색이었다.
“……이상한데.”
마리웨더는 침을 삼켰다.
빨간색 별을 만지기 전에 주변을 다시 한번 살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사람이 지나다니는 소리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리웨더는 조심히 빨간색 별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게 아닌가?’
혹시 버튼이 아닐까 싶어서 이번에는 꾹 눌러 보았다. 그러자 달칵 소리와 함께 벽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
살며시 벌어진 틈을 잡아당기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벽에 자그마한 창문이 난 틈을 통해 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마리웨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