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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그 시각 임시 사무실 안쪽에 자리한 신오는 한창 화상 회의 중이었다. 오늘 안건은 건물 높이 제한 관련 새로운 내용으로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까지 모두 참여한 상태였다.
“북부는 그동안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묶인 곳이 많아서 조금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정말 잘됐습니다.”
“그러게요. 본부장님께서 나서자마자 꽉 막혀 있던 북진동 사업도 움직임이 보이고, 높이 제한까지 풀렸으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이 말을 누가 먼저 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필두로 아부하는 목소리가 겹쳤다. 그들이 흥분하는 것을 탓하기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과이긴 했다. 군부대 협의를 받아야만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일대까지 협의 없이 시 자체 검토만으로 건축 가능해졌으니까. 딱 떨어지는 시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번 결과에 할아버지가 장 선생의 영험함을 크게 치하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천하를 호령할 것처럼 꼿꼿한 양반이 고개를 숙이고 굽실굽실 굽어살핍사 머리를 조아린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장 선생은 그 모습을 보며 세상에 군림한 듯 기세등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썩 마음에 드는 장면은 아니었으나 그런다 한들 그들의 리그에 참견하고 싶은 것도 아니라 생각할 때였다. 화면 한쪽에 메시지 창이 빼꼼 떠올랐다.
<본부장님, 휴대전화 포렌식 끝났고 소유주 확인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내 놓았지만, 회의가 끝난 뒤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메시지가 뒤를 이었다. 신오가 대각선에 앉아 있는 윤 비서를 힐끔 쳐다보았다. 늘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다시 회의가 진행되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신오의 검지가 책상 위를 오르내렸다. 심증뿐이었지만, 은빛을 도촬한 인간이 가로등에 손댔을 것이란 가설에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일 안에 들어 있을 내용으로 인해 이번엔 뒤통수에 후끈하게 열이 올랐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불쾌함으로 신오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비쳤다. 회의 따윈 집어치우고 바로 메일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다니.’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부터, 아니 은빛이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박 씨라는 남자와 서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속이 아주 난장이었다.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래서 오늘 아침부터 과히 충동적이면서 폭력적인 고백을 하고 말았다. 뱉은 뒤에 후회가 밀려왔지만, 말을 하고 보니 제 마음이 정확히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없어 어떤 것이 설레는 것인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눈과 눈이 얽혀 있는 순간에 뛰는 심장이 증거였으므로.
서른둘이란 나이에 맞지 않게 하고 그걸 하는 모양이었다. 짝사랑……. 내려진 판결에 어처구니가 없어 신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가 막혀서 두 번 정도 더 웃고 나서야 화면에 떠 있는 임원들의 얼굴과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들의 떡 벌어진 입이 눈에 들어왔다.
“만족스러운 일이라 기분이 좋아서요.”
금세 시니컬하게 웃으며 신오가 말을 보탰다. 그러자 모든 이들이 그럴 만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높이 제한 문제가 풀렸으니 축배를 드는 분위기를 타는 것보다 일에 속도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것부터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세요.”
“검토해야 하는 거라면…….”
“예전 기준에 맞춰 선정된 시공 업체 리스트 말입니다.”
당연한 얘기였는데 양 이사가 갑자기 손수건을 꺼내 아직 땀이 새어 나오기 전인 것으로 보이는 뽀송한 이마를 꾹꾹 찍어 냈다. 그러곤 축축한 혀를 꺼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꼭 거짓말을 하기 전에 기름칠하는 것처럼.
“그건 이미 통과된 업체들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바꾸게 되면 일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 위험 부담이 클 것 같습니다.”
위험 부담은 뭔가 켕기는 것이 있어 득달같이 나불댄 양 이사에게 있어 보였다. 일이라는 걸 하다 보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상황에 맞게 끌고 나갈 수 있고, 걸리지 않는 선에서 오가는 정도 눈감아 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연 적당함을 지켰는가였다. 신오가 한쪽 눈썹을 크게 들썩이며 팔을 교차해 팔짱을 꼈다.
“지지부진한 프로젝트로 인해서 계약은 진행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문제 될 게 없어 보이는데 제가 놓친 부분이 있었습니까? 예를 들어 구두로 완료된 사안이었는데 아직 보고 전이든지.”
“아,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업체 중 두 회사가 안전 관련 이슈가 크게 터졌던 곳이었는데 상호와 대표자를 두 번이나 바꿔 버젓이 운영하는 곳으로 확인되었으니까요. 사무실에 앉아 있다고 이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거리에 놀아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동안은 그 자리에서 스스로 눈을 가렸을지 모르지만 더는 안 될 것이란 얘기를 돌려 하자, 눈에 띄게 몇 명의 얼굴이 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앞으로 회사를 맡게 되면 반드시 걸러 내야 할 쥐새끼들이었다. 신오가 팔을 풀어내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양 이사님.”
“네, 네. 본부장님.”
“문제의 두 업체는 양 이사님 주도하에 처리하는 거로 하죠. 말씀하신 것처럼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입장에서 잡음이 생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많이 먹었으면 그만큼 쌀 똥은 무지막지할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양 이사의 얼굴이 일주일은 변비에 걸린 사람처럼 금세 누렇게 떴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신오의 한마디에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음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곧 화면을 끈 신오가 바로 메일을 확인했다.
<이름: 오창수.
나이: 73세.
몇 년 전 진단받은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여 지팡이에 의존…….>
메일 내용을 읽어 내리던 신오가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날 분명 사진을 찍다 걸렸을 때 꽁무니를 빼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절대 아픈 노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명의자의 휴대전화에 의심 없이 접근할 수 있고 주민들 사이에 섞일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철저하게 자신의 사정을 숨기고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하고 있을 테니 주변 탐색만으로는 걸러 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기에 심리적으로 한껏 몰렸을 테니 이 점을 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윤 비서.”
회의록을 정리하던 윤 비서가 신오의 부름에 바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네, 본부장님.”
“그 휴대전화 주인은 아무래도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닌 듯싶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의하듯 물어 오는 상사는 겉으론 차분해 보였으나 그 뒤에서 넘어오는 냉기는 영안실 앞에서 느껴 봤을 서늘함의 몇 배나 되는 정도였다. 윤 비서가 살짝 고개를 돌려 같은 공간에 있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한층 작게 대답했다.
“주변까지 범위 확대해서…….”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아…… 제가 더 좋은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동식 뷔페부터 알아보세요.”
“네? 뷔, 뷔페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안이 울릴 정도의 음량이 사무실에 퍼졌다. 그 바람에 노트북에 시선을 박고 일하던 직원들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개발 건으로 마을이 소란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주민들과 식사라도 했으면 해서.”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이런 느낌이면 좋을 것 같은데.”
마치 자신이 참고할 만한 이미지를 찾은 것처럼 신오가 제 노트북을 가리켰다. 신오가 매끄럽게 상황을 돌린 덕분에 직원들은 다시 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직원이 걸려 온 전화를 받으며 정신없이 통화를 하자 윤 비서가 입을 반쯤 열어 신오만 들릴 정도로 숨을 몰아냈다. 그러곤 노트북을 자세히 보는 것처럼 상체를 숙였다.
“본부장님 뷔페를 알아보라는 게 정말이세요?”
“그럼 빈말일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윤 비서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여 신오와 눈을 맞췄다.
“죄송한데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에게 공식적으로 기어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뿐 아니라 외지인인 우리까지 있으니 자신을 봤을 사람을 파악하려 하겠죠. 무척 티를 낼 예정이거든요. 그러려면 그 휴대전화와 같은 기종이 필요할 것 같고요.”
아주 그럴싸한 설명이었지만, 듣다 보니 꼭 그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범인을 끌어내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에 윤 비서의 얼굴이 돌을 깎아 만든 석고상처럼 대번에 굳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발 없는 말도 같이 존재하지 않나. 혹시라도 신오가 늦은 밤 은빛의 집 앞에 있었다는 사실이 입에 오르내리기라도 한다면 그 수습은 고스란히 윤 비서의 차지였다.
“직접 나서시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직언에 신오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윤 비서가 하면 되겠네요.”
“……네? 제, 제가요?”
“어색하지 않게 가능하죠?”
해 본 적도 없는데 ‘어색하지 않게’란 단서를 붙이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순식간에 막중한 배역을 떠맡게 된 상황에 윤 비서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신오가 눈썹을 까딱 밀어 올리며 응? 하고 물어 왔다. 순간 윤 비서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꼭 잘해 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해서였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좋네요.”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싶었지만 속으로 끙 하고 짧게 앓는 것까진 어쩌지 못했다. 곧 윤 비서가 자세를 곧게 고쳤다.
“날짜는 언제로 하면 될까요?”
“이틀 뒤로 하죠.”
망설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날짜부터 마을 한 곳에 깔릴 음식, 오가는 사람까지 계산의 오차는 없어 보였다. 순간 오늘이 15일이라는 것이 생각난 윤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틀 뒤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그날은…….”
“잔치하기 딱 좋은 날인 것 같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정돈된 지시와 답이 오간 뒤 윤 비서는 자리로 돌아와 정리하던 회의록부터 마무리했다. 신오는 보고 있던 메일을 끄곤 빈 화면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 여자에게 한가로이 감정을 운운했다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려 주었을 때와는 다르게 어떻게 하면 은빛이 끝까지 모르게 일을 처리할까 하는 궁리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알게 된다면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여자는 지금보다 더욱 위축될 것이고, 꼬리표처럼 평생을 달고 다니며 스스로 갉아먹을 것이 뻔했다. 그 의미가 한껏 부정적이라 책상 위에 올려 둔 손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손등 위로 혈관이 툭 불거졌다. 딱 그의 심정을 보여 주는 것처럼 아주 짙고 푸르렀다.
* * *
딸랑. 학원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리고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은빛이 말없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할 때만 해도 몰랐는데 혼자 있으니 이런저런 생각이 기어 나왔다. 앞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전화를 꺼내 자주 이용하는 은행 앱을 찾아 눌렀다. 얼마 되지 않는 잔고가 든 계좌를 보던 은빛이 곤란한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가 이내 풀어냈다.
“어쩌지. 계속 신세를 질 수도 없는데.”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길은 은빛이 잠시라도 거처를 옮기는 것이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은빛이 잔뜩 흐린 얼굴을 한 채 안쪽에 놓인 제 책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 옆 탁상 달력의 17이란 숫자 위로 노란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잊으면 안 되는 날처럼 한 번이 아닌 몇 번이나 둥글려 놓은 것치곤 정작 무슨 날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쓰여 있지 않은 날이었다. 손을 뻗어 달력을 집어 든 은빛의 눈이 그 숫자 위를 배회하듯 내려보았다.
노란색을 가장 좋아했다. 웃을 때 한쪽에 부드럽게 팬 보조개가 선한 인상을 완성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가도 저만 보면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눈을 휘었으며, 만나러 올 때마다 딸기우유를 손에 들고 왔다가 어느 날엔 꽃 한 송이도 함께 내밀었다. 가끔은 서글퍼지는 얼굴에서 숨겨 둔 아픔이 엿보이기도 해서 마음이 갔고, 사랑하면 세상이 이렇게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했으며, 희망이를 제게 남긴 채 떠난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제 가슴에 깊이 새겨진 신현의 생일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챙겨 본 적은 없었지만, 매년 새해가 되면 달력을 넘겨 17일이란 숫자 위엔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렸다. 은빛이 손가락으로 노란색 원을 덧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역국 한 번을 못 끓여 줬었네.”
* * *
해정이네 식구들에게 저녁까지 얻어먹은 은빛은 나서서 저녁 슈퍼 일을 도맡았다. 설거지를 끝낸 뒤에 슈퍼로 내려가려 방에 있던 휴대전화를 챙기고 카디건을 걸치며 현관을 나섰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데 길가에 세워져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이 눈을 잡아끌었다. 퇴근할 때 보았던 그대로였다. 그중 남자가 저를 태웠던 차도 있었고.
“여기서도 야근하나 보…….”
그가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한다 해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은빛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몇 개 되지 않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슈퍼 문 손잡이에 걸려 있던 ‘식사 중’ 푯말을 빼고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간 은빛이 흐트러진 물건이 없는지 진열대를 한 바퀴 돌곤 의자에 앉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느낌이 나쁘지 않았지만 어쩐지 삭막한 느낌에 라디오를 켰다. 차분하게 흐르는 DJ의 목소리가 공간의 사이사이를 메우며 돌아다니는데 슈퍼 문에 달린 기계음이 은빛의 귓구멍을 찔렀다.
“어서 오세요.”
인사부터 한 은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정 엄마는?”
방문한 사람은 부녀회장이었다. 밤마실 나왔다가 물건을 사러 온 듯했다.
“위에 계세요.”
은빛이 슈퍼 일을 도와주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부녀회장이 ‘그렇구나.’ 하면서 진열대를 돌며 다양한 종류의 과자와 음료수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과자 다섯 개하고 음료수 해서 만 이천육백 원이네요.”
“여기.”
부녀회장이 휴대전화 케이스 안에 있던 카드 중 하나를 빼서 건넸다. 빠르게 계산한 은빛이 카드를 건넨 후 봉지를 하나 뜯어서 물건을 담는데 부녀회장이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아침에 박 씨랑 일 있었다면서.”
박 씨와 자신만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매끄러운 과자봉지를 집던 은빛이 부녀회장의 눈을 찾아 맞췄다.
“얘기 들어 보니까 너무했더라.”
“……어떤 부분이요?”
뺨을 맞은 일이 그리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 내용이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속이 탔다.
“아니, 해정이 할머니가 박 씨 머리를 말린 북어로 때렸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정신없는 노인네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박 씨 머리에 혹이 엄청 크게 났대. 그래서 희망 엄마가 해정 엄마 속 시끄러우니까 슈퍼 일 도와주는 거지?”
한껏 했던 긴장이 민망해졌다. 은빛이 잡고 있을 뿐 봉지 안으로 넣지 못했던 음료수를 얼른 과자 옆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그저 웃으며 그녀에게 봉지를 내밀었다.
“아무튼 해정 엄마도 참 안됐어. 남편 없이 시어머니 모시는 것도 쉽지 않은 건데 말이야. 그럼 나 이만 가 볼게. 수고해.”
“네, 들어가세요.”
늘 부녀회장을 만나면 잠깐이라도 많은 말이 오간 것처럼 진이 빠지곤 했다. 크지 않은 동네였지만, 중간중간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두 시간 정도 지났을 즈음엔 오가는 사람들마저 뚝 끊겼다. 시간을 확인하니 11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은빛이 앉은 채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 후 계산대 옆에 모아 둔 영수증과 현금을 늘 사용하시는 가방에 넣었다. 한 손에 가방을 든 은빛이 일어나 눈으로 안을 한번 훑은 뒤에 밝게 켜 있던 전등을 껐다. 깜깜해진 탓에 움직임이 한껏 조심스러웠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밀자 문이 여닫힐 때마다 울리는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려 얼른 밖으로 나왔다. 열쇠를 꺼낸 은빛이 문을 잠갔다. 그러곤 귀퉁이에 놓여 있던 갈고리 모양 쇠꼬챙이를 집어 적당한 구멍에 걸어 내리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빡빡한 느낌만 전해질 뿐 꼼짝하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은빛이 쇠꼬챙이를 빼내었다가 다시 구멍에 넣었다. 이번에 두 손을 이용해 내리려는 순간 옆에서 짙은 숲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고 조금 전까지 어딘가 걸려 있던 것 같았던 녹슨 셔터가 은빛의 턱선까지 내려왔다.
“언, 언제…….”
“조금 전에.”
남자가 말을 건네며 은빛의 손에 있던 꼬챙이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 옆에 놓았다.
“여기에서 지내기로 한 겁니까?”
“……당분간요.”
“그러려면 늦은 밤까지 일도 해야 하고?”
그러냐 묻는 남자의 시선이 슈퍼 간판을 비롯해 곳곳에 닿았다 은빛에게 돌아왔다. 한껏 못마땅한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낌없는 나무처럼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도움을 주는 해정이네 식구들을 이상하게 모는 느낌에 은빛이 막 입을 떼어 내는데 그가 셔터를 잡곤 허리를 숙여 끝까지 내린 뒤에 일어났다. 순간 은빛의 눈동자가 어둡게 색을 달리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손가락에 잔뜩 붙은 먼지로 인해서였다. 오전만 해도 저로 인해 남자는 박 씨를 상대하다가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지금도 저를 도와준다는 이유로 깨끗한 손을 더럽혔다. 은빛이 그의 손을 빤히 보며 새롭지도 않은 사실을 자각했다. 그녀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는 것을 본 신오가 툭툭 손을 털어 냈다. 그 어떤 것이든 제겐 별 대수롭지 않다는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일도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아니에요, 제가 도와 드리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꽉 다물린 은빛의 입술을 보던 그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밀려났다. 이 타이밍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왜 웃으세요?”
“나한테만 대쪽 같은 건 아닌 것 같아서.”
꼭 제게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아니라서 좋은 것 같았다. 은빛이 눈을 내리깔며 말머리를 돌렸다.
“근데 뭐 사러 오셨던 건가요?”
“설마. 고은빛이 있어서 온 거지.”
“…….”
“내일도 또 이 시간까지 여기 있을 예정입니까?”
“아니요.”
즉각적으로 대답했지만, 아직 어떻게 할지 정해진 건 없었다. 해정 엄마를 도울 수도 있는 것이었고, 오늘처럼 혼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남자에게 자신의 동선을 밝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다행이네.”
“……네?”
“내일은 내가 본사로 출근하거든요.”
본인이 이곳에 없는 시간이 불안했다는 듯이 들렸다. 그 다정함이 은빛에겐 다른 의미로 닿는지도 모르는 채.
“우린 모레 보도록 하죠.”
“…….”
“그리고 식사하는 거 말인데.”
순간 그때 그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