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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서 있던 은빛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한 층 한 층 오르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보고 있으니 그제야 은빛은 자신이 스스로 이곳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강신오…….’
혀끝에 둥글려 본 이름은 낯설기가 그지없었다.
띵. 청아한 소리와 함께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열리자 은빛이 작고 마른 손을 겹쳐 잡았다.
“어서 오시죠. 본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온전히 열린 문밖에는 몇 번쯤 보았던 윤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눈을 내리깔곤 그를 지나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쪽으로 열리는 진한 고동색 문 앞에 서자 순간적으로 떨림이 온몸을 점령했다. 은빛이 양손을 올려 제 얼굴을 다소 강하게 두들긴 후 진한 고동색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문 하나를 건너온 목소리에 금해 그룹으로 달려오는 동안 했던 각오가 무색해질 만큼 심장이 욱신댔다. 은빛은 얼른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발이 바닥에 붙은 듯,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입니까?”
높낮이가 일정하게 날아든 저음을 따라 은빛이 눈동자를 고정했다. 책상 앞 소파 상석에 앉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신오를 향해 다가갔다.
“앉으시죠.”
“네.”
그가 권한 자리에 앉은 은빛이 어깨에 메고 온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요?”
그 말에 기가 차는지 그가 은빛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급했어도 먼저 설명을 했어야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마음이 앞서고 말았다. 순간 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황이 어려워진 건 아닐까 하는 극심한 불안이 마음에 엄습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은빛을 뚫어질 정도로 보던 신오가 입을 열었다.
“고작 그걸 물어보려 여기까지 온…….”
“아니요! 저한테는 무, 무척이나 중요한 얘기예요.”
“왜죠?”
“그러니까…… 그게…….”
“고희망이 강신현의 아들이니까?”
툭.
눈물이 은빛의 볼을 타고 흘렀다. 자백보다 더한 인정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는 말을 하려던 은빛이 옥죄여 오는 심장을 뒤로하며 그간의 사정을 나열했다.
5년 전 은빛은 사랑에 빠졌다. 그저 그 사람이 좋아서 시작된 첫사랑이었다. 행복한 나날이 영원처럼 이어진다 생각하던 때 찾아온 새 생명에 은빛은 덜컥 겁이 났다. 그 뒤로 알게 된 신현과 자신의 신분 차이에 은빛은 결심해야 했다. 그를 떠나기로. 제 안에 자라고 있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세상에서 지워졌다.
은빛은 그날을 이렇게 정의했다. 숭고한 배신. 신현이 그렇게 하늘로 갈 줄도 모르고.
그가 죽은 후 금해 그룹과는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고 살아가려 했지만, 오늘 은빛은 금해 그룹을 향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달려오고야 말았다. 금해 그룹의 핏줄만이 하나뿐인 제 아들 희망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정리해 보자면, 고은빛 씨가 죽은 내 동생의 아이를 낳아 홀로 키워 왔는데 우리 집안의 병에 대해 알게 되었고 확인 겸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 이 정도일 것 같은데 맞습니까?”
‘죽은 내 동생’이란 수식어가 붙어 나온 신현의 이름에 은빛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휘청였다. 하지만 태풍이 와도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신현은 죽었고 자신은 강신오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받아야 했다.
“네, 항체가 있다고 들었어요. 도와주시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만큼 잔잔하게 흔들리는 어깨가 유난히 가냘팠다. 그 모습을 지그시 누르듯 보던 신오의 평평한 이마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신오의 침묵이 길어지자, 긍정적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은빛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보던 신오의 시선이 순간 비틀렸다.
“내 항체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네……?”
젖은 눈동자로 은빛이 그를 천천히 살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기도 전에 신오의 입술 끝이 슬쩍 말려 올라갔다.
“나랑 붙어먹을 수 있겠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은빛이 몇 번이나 망설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은빛의 목소리 끝이 미세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떨렸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정작 고요함의 정석을 보여 주며 단정함을 유지했다. 그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신오의 무례가 곧게 밀려들었다.
“나랑 한 침대에서 뒹굴 수 있냐고.”
“-!”
미치지 않고서야 입에 담아서도 안 되는 말이었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낯빛에 그림을 감상하듯 빤한 시선이 닿았다. 전혀 친절하지 않은 눈빛, 손가락 몇 개로 숨통을 쥐고 있는 우월감에 은빛은 금방이라도 숨을 빼앗길 것 같았다.
“……진심이세요?”
“네. 제정신입니다.”
겨우 순화해 뱉어 낸 말을 고쳐 주는 느낌에 은빛은 속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홧홧했다.
“뭐든 하겠다 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 은근한 압박이 눈을 통해 건너오고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좇고 있었다. 동그란 이마를 시작으로 적당히 솟은 콧날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그러곤 입술에 조금 오래 머물렀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뿐이었는데 은빛은 속에서부터 호흡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눈을 깜박이며 그 느낌을 털어 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숨이 가빠졌다.
‘고은빛, 정신 차리자.’
은빛이 숨을 고르기 위해 입을 살짝 열었을 때였다. 신오가 굳게 닫혀 있던 제 입술을 붉은 혀로 가르며 느리게 훑었다. 순식간에 그와 함께 있는 공간이 여름 장마가 오기 직전으로 바뀐 것 같았다. 너무나 습해 끈적하다 못해 뜨거워 아득한 기분이었다. 얼른 벌려 두었던 틈을 닫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숨결이 허락도 없이 제 속을 막무가내로 파고들 것 같아서였다.
허겁지겁 제 입술을 닫아 잠그는 그녀를 보던 신오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끌려 올라갔다. 재미있다는 듯이. 조금 더 애써 보라는 것처럼.
머리부터 끼치는 소름에 가지런히 누워 있던 솜털이 일제히 일어나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멈춰 있던 그의 눈동자가 이번엔 은빛의 목덜미, 가슴, 허리선을 타고 아래로 향해서였다. 제정신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허벅지 사이에 욕정 어린 눈빛을 파묻었다. 오래간만에 입맛에 맞는 먹잇감을 사냥하는 것처럼 만족감마저 내비쳤다. 은빛이 할 수 있는 것은 있는 힘껏 힘을 주어 허벅지를 붙여 내는 것뿐이었다. 그러자 꿇어앉은 다리로 점점 피가 몰려 저릿한 느낌의 강도가 세졌다. 은빛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결정했습니까?”
자신은 네 선택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뉘앙스였다. 그 오만에 당장에라도 따귀를 올려붙이고 싶었지만, 은빛은 여자이기 전에 한 아이의 엄마였다. 찰나에 마음을 가라앉힌 은빛이 입술을 떼어 냈다.
“할게요.”
은빛이 여린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호하고 단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모멸감으로 인해 실핏줄이 툭 불거진 채.
그 순간 그가 상체를 숙여 꿇어앉은 은빛의 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어쩐지 피하고 싶지 않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꼿꼿하게 버텼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의 목덜미를 가뿐하게 잡곤 엄지로 살결을 음미하듯 쓸어내렸다. 숨이 안에서부터 소모되어 사라지는 느낌에 은빛은 급히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래요. 하죠.”
지은 죄에 형을 선고받은 느낌이 은빛을 휘몰아쳤다.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에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숭고한 존재를 위해서라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남자인 신현을 두 번이나 배신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다.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으로 입안을 짓씹었는지 피 내음이 퍼졌다. 은빛이 경멸 어린 얼굴로 물었다.
“뭐부터 하면 될까요.”
각오는 이미 끝났으니 네 마음대로 하라는 자포자기 같았다. 피식. 고요함을 뚫고 나온 것은 잘게 쪼개진 웃음소리였다. 제가 화를 낼 처지는 아니었지만, 울컥 솟구친 원망에 은빛이 입을 달싹거릴 때였다.
“결혼.”
쿵.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빠르게 오르내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다는 듯한 대답에 신오의 눈빛이 나른하게 바뀌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은빛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귓바퀴 너머로 넘겨 주며 말했다.
“결혼, 그것부터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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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두 달 전. 선선한 바람이 창가에 달라붙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베란다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공간에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던 은빛이 어깨를 쓸어내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작게 보글거리는 밥솥 소리에 은빛의 시선이 살짝 열린 방문과 시계에 연달아 닿았다. 오전 7시 30분. 아직 조금 더 잠을 자도 되는 시간이었다. 몇 분이라도 더 재우고 싶어 조용히 이불 속을 빠져나온 것이 한 시간 정도 된 것 같았다. 매일 같은 일상이었지만, 은빛에겐 너무도 소중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존재가 방문 너머에서 자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또 어떤 즐거움을 주며 문을 열고 나올지 궁금해 그녀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고요한 집 안에서 귀를 기울이던 은빛이 조그마한 기척에 바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역시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은빛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화면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부스스하게 솟은 머리에 작은 얼굴과 대비해 오뚝하게 솟은 코, 뽀뽀를 부르는 저 입술은 어떻단 말인가. 사심을 채우듯 은빛이 마음껏 모습을 담을 때였다.
“엄마, 그만 찌고.”
“희망이 네가 그러고 나왔는데 어떻게 그만 찍어.”
“치이.”
입술을 삐죽 올리는 희망이를 보던 은빛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청아하고도 맑은 소리가 집 안을 요리조리 돌아다닌다.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 나오던 중 형광등 불빛이 밝다며 생각해 낸 방안이 있었다. 희망이의 선택은 올해 여름에 사 준 아동용 선글라스. 기발하기도 하고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희망이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잠시 망설였던 시기가 있었다. 과연 아무도 없는 자신이 아이를 낳아 잘 키울 수 있을지 막막했으니까. 낳기로 마음먹고 아이 아빠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은 그의 어머니를 보필하는 실장이었다. 진부한 돈 봉투 그 시그널에 은빛은 망설임 없이 현실을 택했다.
그 뒤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제 안의 생명은 자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들어찼다.
다음 날부터 은빛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살고 있던 집부터 정리하고, 제가 살던 지역과는 반대로 방향을 꺾어 경기도 끝자락에 위치한 미혼모 센터를 알아보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은빛은 그 동네를 떴고, 그해 무사히 아이를 출산했다. 그 후로는 너무도 달라진 세상이었다. 시간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울고 옹알이 한 번에 잃었던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게 센터에서 1년이란 보호 기간 아래 몸과 마음을 추슬러 나갔다. 아이가 무럭무럭 크는 속도만큼 은빛은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기에 더욱 힘이 났던 시기였다. 또한 이대로 무너져 아이의 존재를 부정한 그들에게 질 생각 따윈 없었다. 그리고 원망이란 감정을 지니는 것은 은빛에겐 어찌 보면 사치기도 했고.
“엄마, 나 쉬! 화장실이 깜깜해서 무셔.”
다급한 목소리에 은빛이 스치듯 옛일을 떠올리다 접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이 곁으로 가서 선글라스를 얼굴에서 걷어 냈다.
“이제 됐지?”
“그래도 같이 있쪄.”
은빛이 화장실 앞에 쪼그려 앉아 희망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동통한 엉덩이가 꼭 새하얀 마시멜로 같아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때때로 엄마들은 이상한 상상에 빠지곤 한다. 희망이는 꽉 찬 일상의 행복을 알게 했고 하루하루를 더욱더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며 은빛이 희망이를 끌어안았다.
“너무너무 사랑해, 우리 희망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틈 없이 맞닿은 심장이 따뜻하게 온기를 나눌 때였다.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인사하듯 귓가를 울렸다. 은빛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얼른 밥 줄게.”
“웅!”
은빛은 금세 아침을 차려 냈다. 따끈한 밥과 국, 반찬 몇 가지였지만, 사랑이 듬뿍 담긴 밥상이었다. 오물거리는 볼이 귀여워 몇 번이나 뽀뽀해 댔는지 모른다. 볼을 은빛에게 내주고 밥을 먹는 희망이를 보면 그동안 꽤나 빈번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늘 그렇듯 평온하고 행복감에 절어 있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느긋하게 준비하던 두 사람은 유치원 통학버스 시간이 간당간당해서야 집을 나서고 말았다.
* * *
“흐으.”
말캉한 입술이 살짝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벌리며 맞물렸다. 폭발적인 설렘이 뒤섞이며 입안이 점차 습기를 머금는다. 미끄러지듯 침범한 도톰한 혀가 낯설다는 듯이 여자가 도망치듯 안으로 부드러움의 극치를 숨겼다. 하지만 곧 점막을 훑고 들어온 남자로 인해 자연스럽게 혀와 혀가 휘감겼다. 비벼지는 살덩이 사이로 꿀처럼 다디단 타액이 새어 나왔다. 오롯이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황홀함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벅차오르는 감정만큼 농밀한 움직임이 입안을 오갔다.
이 모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남자는 몰아붙이기를 반복했다. 여자의 가녀린 손이 단단한 남자의 가슴을 슬쩍 밀어냈다. 숨이 빠듯해서였다. 바로 의도를 알아챈 남자가 잠시 입술을 떼어 내어 숨구멍을 열어 주는가 싶더니, 여자의 손을 잡아 제 목뒤로 넘겼다. 긴장으로 차가워진 손끝을 타고 넘어오는 떨림에 남자의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남자의 입술은 곧 여자의 귓불을 지나 목선을 타고 흘렀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하얀 살결이 반짝였다. 남자가 지나는 자리마다 살포시 지르밟은 듯한 붉은 꽃잎이 피어났다. 커다란 손이 입술보다 먼저 아래를 헤쳐 매만졌을 땐 허리가 비틀리며 야릇한 신음이 터졌다.
“으흣!”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은 주름 사이사이까지 뜨겁고 축축해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는데 이상하게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옇다. 이상함을 감지하는 찰나였다.
“……사랑해.”
여자의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일순간 까만색 모래가 쏟아졌다. 제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손을 쓰기도 전에 모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 돼!”
울부짖는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위에 눌렸다 깨어나듯 급히 몸을 일으켜 거친 숨을 뱉었다.
“하아, 하아…….”
하얀색 침대 시트가 축축해질 정도로 젖어 있었다. 손으로 제 이마를 짚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지잉- 지잉- 침대 옆 협탁에 올려 둔 휴대전화가 징징대었다. 화면에 뜬 어머니라는 발신자에 신오가 몸을 반쯤 일으켜 전화를 손에 쥐었다.
[일어났니?]
“네, 조금 전에요.”
[어제 성북동 여사 전화 왔더라. 이번 주말 상진 물산 둘째 딸하고 약속 잡았으니까 그렇게 알아.]
“어머니.”
건조한 그의 부름이 신오의 방을 묵직하게 울렸다. 가까이 있었다면 천장이 쿵 내려앉을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전화 너머라 해서 예외는 아니란 얘기였다.
[……네가 일만 하고 통 여자를 만나지 않으니까 내가 나서는 거잖니. 어차피 손꼽는 혼처 중 한 명하고 결혼까지 무리 없이 진행될 텐데 무뚝뚝하게 그러지만 말고 곁을 좀 내줘. 엄마 소원이야, 아들.]
단번에 꺾인 목소리, 소원이라는 끝말에 신오가 하고픈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알겠다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옮기려는 찰나 느껴지는 끈적임에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끌려 올라갔다. 무슨 애새끼도 아니고. 부드러운 속옷 아래에 뭉쳐 있는 제 흔적으로 인해서였다.
신오는 욕실로 들어가 차가운 물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 냈다. 5년 전 쓰러진 후로 신오에겐 두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22번째 시도된 최면요법에도 돌아오지 않는 조각난 기억의 부재, 그리고 어떤 여자를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몸뚱이였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다시 이상 증세를 느끼고 있었다. 꿈을 꾸면 늘 나타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여자에게만 도파민이 터진다는 것이다. 씨발.
―안타깝지만 정신적, 심리적 원인으로 생기는 심인성 질병은 기약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던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내용과는 괴리가 있는 편리한 단호함이었다. 아침 일을 떠올리고 있던 신오의 귓가에 난처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울렸다.
“본, 본부장님?”
그제야 제가 앉아 있는 곳이 회의실임을 자각한 신오가 아무도 모르게 무거운 숨을 속으로 몰아냈다. 이렇듯 이맘때가 되면 꾸는 꿈은 신오를 잔뜩 예민하게 만들기도 했고 일상을 무너트리기도 했다. 탁! 손에 들려 있던 태블릿이 책상 위에 놓였다. 별로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병풍처럼 앉아 있던 임원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들 내용 읽어 보셨습니까?”
“네. 너무 말이 안 돼서 보다가 덮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사람 겉 다르고 속 다르다더니, 전 비서실장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고요.”
금해 그룹 강 회장의 충실한 개로 불렸던 비서실장이 벌인 일이었다. 그가 내부 인사 청탁에 관여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은 올해 초였다. 솎아 내고 보니 사돈에 팔촌까지 연이 안 닿아 있는 곳이 없었다. 기업 이미지를 목숨처럼 아끼는 할아버지가 이를 두고 볼 리 만무했다. 같은 날 같은 일시, 가족으로 엮여 있던 그들은 금해 그룹에서 단칼에 내쳐지고 말았다.
“전 마음에 들던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특히 제목이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정도던데.”
신오의 눈동자가 내려놓았던 태블릿 화면에 닿았다.
? 미신에 미친 오너 일가.
다시 봐도 마음에 쏙 드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전 비서실장이 금해 그룹에 다닌 햇수가 무려 30년이었다. 그 근속 기간은 블라인드에 적어 내린 글이 헛소리라 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부 지어낸 얘기가 아니기도 하고.”
“본, 본부장님.”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이 자리에 있는 분들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건 너무 억울한 오해입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입을 꿰매고 있더니 다들 짹짹거리기 바빴다. 아닌 척 위하는 척, 그 위선적인 모습들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들이 시끄럽기가 그지없었다.
“크흠, 흠. 해외에 오래 계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지만 현재 사안은 생각보다 크게 퍼진 상태고, 또 쉬이 가라앉을 수위가 아닙니다.”
양 이사가 콕 찌른 말에 찔려서 폐에 달라붙었던 가래가 목구멍을 건드린 사람처럼 꽉 메인 목소리를 냈다.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골라 뱉는 양 이사와는 달리 신오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계속하시죠.”
“이대로 두었다간 오너 리스크로 작용해 회사에 큰 손실이 발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라는…….”
“제가 그냥 넘어가겠다 했던가요?”
“그럼 내규대로 전 비서실장에게 책임을 물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내내 가만히 있던 법무 이사가 말을 보탰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이 나설 때라 생각하고 말을 찔러 넣은 뿌듯함마저 풍겨 나왔다.
신오가 손으로 제 이마를 살살 긁어내린 뒤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행동, 표정 하나에 난감한 얼굴을 한 그들의 눈이 한곳을 향해 모여들었다. 본부장이란 직함으로 상석에 앉아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는 강신오는 귀한 핏줄을 타고나 금해 그룹을 이끌어 갈 실세였다. 태생부터 달라서였을까. 189센티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매끄러운 피부 위로 신이 그려 넣은 것 같은 이목구비와 명석한 두뇌까지 전부를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번만 묻죠. 정말 그게 최선입니까?”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취조하는 어투였다. 해결 방안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고, 이런 방식은 신오의 특기 중 특기기도 했다. 이미 몇 번 겪어 본 탓에 임원진들은 눈알을 데굴거릴 뿐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오너 일가의 이미지가 걸려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이들을 한 명 한 명 저격하듯 보던 신오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었다.
“그럼 현재 금해 그룹의 근심을 덜어 내는 것으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