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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45장. 한여름 밤의 캐피탈
46장. 다시 찾은 푸른 산맥
47장. 전운
48장. 얼어붙은 악령
45장. 한여름 밤의 캐피탈


작년 습격 이후로 일 년 만에 보는 놈이다. 어쩌면 마스터일지도 모르는, 언홀리 나이트를 이끄는 대장이 분명한 녀석.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내가 추적한 것은 분명 흑마법의 기운이었는데, 왜 놈이 여기 있는 걸까.
설마 덫을 파 놓은 건가? 하지만 내가 어떻게 추적해서 찾아올 줄 알고?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그나마 가장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좆됐다는 거?’
아마 소설 속에 들어온 이후 가장 최악의 상황이겠지.
일 년 전엔 놈이 방심했기에 몸을 빼내 달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해 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
여유 있는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녀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무 말도 없지?”
“반갑다는 인사라도 바란 건가?”
“뭐, 우리가 그럴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이내 눈을 감았다. 영문 모를 행동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 눈을 감다니.
강자이기에 나오는 여유인가?
하긴, 강자는 강자다. 지금도 이 성당 안은 모조리 녀석의 구역이었으니까.
‘로르다인과 비교하면…….’
불행 중 다행인 건가? 로르다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위압감보다는 덜했다.
로르다인 같은 괴물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냐만은.
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바슈른 영지전에서 만났던 두 언홀리 나이트처럼.
“흐음.”
그렇게 감고 있던 눈을 뜬 녀석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혼자 왔군.”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순간 당혹감이 들었으나 애써 내비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캐피탈이니까.”
네가 있는 이곳은 적의 심장부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런 내 말을 듣고도 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거야 뭐 아무런 상관없다만, 그래도 시간을 질질 끌 필요는 없겠지. 좋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본론이라면?”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카인 린다이어, 우리 쪽으로 합류해라.”
합류하라고?
뜬금없는 스카웃 제의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합류하라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저번에는 마석을 달라더니, 이번엔 합류하라고?”
“이젠 마석을 회수하는 것으로 무마될 수준이 아니다. 바로 너 때문에.”
“……그래서 나를 회유하겠다? 그리고 내게 관련된 정보를 아는 이들을 알아내서 뒤처리를 하려고?”
“그건 너를 회유함으로 얻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이득일 뿐이야.”
“그렇다면 다른 목적이 더 있다는 건가?”
“물론. 네 실력과 재능을 인정했다는 뜻이니까.”
“인정했다?”
“마나를 본격적으로 다룬 지 고작 일 년 만에 엑스퍼트를 이룬 재능, 번번이 우리 계획을 망쳐 놓는 그 기이할 정도의 선구안, 마지막으로 지금 나를 만나고도 여유를 내보일 정도로의 담력까지. 탐이 안 날 수가 없지. 죽이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까다로운 적은 곧 아군이 되면 더없이 든든한 법이니.”
“뜬금없이 웬 칭찬이지?”
“내가 너를 원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자면 몇 시간도 부족하다. 하지만 지금 그럴 여유는 없으니까.”
녀석의 눈웃음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칭찬이야 기분은 좋다만, 그래도 언홀리 나이트에 합류하라니.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거절하기엔 녀석의 목적을 알아낼 기회이기도 하니까.
“……합류하게 된다면 내가 뭘 얻을 수 있지?”
“뭐든.”
“뭐든?”
“그래. 네가 원하는 그 어떤 것이든.”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재물? 금화로 산을 쌓아 주겠다. 여자? 네가 손가락질하는 모든 여인이 네 침소로 찾아갈 것이고. 명예? 우리가 세울 새로운 역사에 당당한 축으로 남게 될 거다. 그 외에 더 바라는 게 있나? 그게 어떤 것이든 이뤄 주지.”
으음, 두 번째는 좀 마음에 드는데?
하지만 저런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다.
애초에 저 약속이 온전히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잖아?
하지만 속내와 다르게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구미가 당기는데.”
“그런가?”
“하지만 거기에 앞서, 만약 합류한다면 나는 누굴 섬기게 되는 거지?”
“그거야 합류하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일이다.”
“고용주가 누군지는 알고 일해야 할 거 아니야.”
“말장난하지 마라. 지금 네게 주어진 선택지는 합류하느냐 마느냐, 그 두 가지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건 말을 돌리는 녀석이었다. 하긴, 그렇게 멍청했다면 대장 노릇을 할 수도 없었겠지.
“만약 거절한다면?”
“몰라서 묻나?”
“…….”
어리석은 질문이긴 했다. 거절한다고 ‘이것 참 아쉽군요. 그럼 다음 기회에.’라고 말하고 떠날 리는 없잖아.
흐음, 만약 도망친다면 목숨을 지킬 수 있으려나?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건, 놈은 아직 내 제대로 된 실력을 모른다는 것.
작정하고 도망만 친다면 그럭저럭 살아남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확률이 희박한 도박에 가깝긴 하지만.
도주 계획도 세워 볼 겸, 머리를 차갑게 식힌 나는 아무 말이나 꺼내 시간을 벌기로 했다.
“그래서, 고작 나 하나를 회유하자고 캐피탈까지 와서 이런 일을 벌였다? 그건 좀 낭비 아니야? 그냥 전서로 초대장이나 보내지 뭐하러 이런 짓을 벌여?”
시간을 벌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긴 했다. 녀석도 그것을 아는지 픽 웃음을 흘렸다.
“시간을 벌려는 건가?”
“이대로 궁금증도 못 풀고 죽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하하!”
내 깡다구가 적잖이 마음에 들었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하러 이런 짓을 벌였냐……. 뭐라고 할까, 눈엣가시라고 하면 적절하겠군.”
“…….”
“그래. 너는 가시 같은 존재다. 당장 목숨에 위협을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두다간 언젠가 상처가 곪고 썩어 죽음으로 이르게 할 가시.”
“…….”
“오늘 캐피탈에 일으킨 일로 많은 손해를 보겠지. 하지만 그건 수순을 밟아 나가며 겪는 당연한 과정이다. 고작 가시 하나 때문에 살점을 뜯어낸다? 당장 보면 손해는 맞겠지.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가시를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살점을 뜯다 합병증으로 뒈질 수도 있다는 건 생각 못 했나 봐?”
“물론 캐피탈엔 그레이엄도 있고, 린다이어 백작도 있으니까. 위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 두 늙은이가 오기 전에 널 죽이고 몸을 빼낼 자신이 있다. 그리고 이건 거짓말이나 허세가 아니야.”
“내가 널 이렇게 찾아올 줄은 어떻게 알았고?”
“쓸데없이 궁금한 게 많군. 슬슬 대답할 시간인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건 또 숨기네.
어쨌든 녀석의 말처럼 놈은 허세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지금 부리는 여유도 내가 혼자 왔음을 확신했기에 내보이는 거겠지.
그리고 녀석의 입장에선 이제 막 엑스퍼트에 들어선 내 목을 비트는 건 아주 쉬운 일일 테고.
하지만 아까도 생각했듯, 내게는 녀석이 모르는 카드가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인 건가?”
“그렇겠지.”
그래. 남은 선택지는 하나다.
물론 녀석과 내가 생각하는 그 하나뿐인 선택의 내용은 다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휀에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내 대답도 알 테고.”
“어리석은 선택이다.”
“어리석고 아니고는 네가 판단할 게 아니야.”
내 대답에 여유 만만하던 녀석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아니, 그걸 판단하는 건 강자의 권리다.”
“…….”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넌 지금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녀석의 손도 검집으로 향했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 전신을 두들겼다.
이후 내 목이 베이는 광경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그려졌다. 그에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세우며 오러를 일으켰다.
콰앙!
날붙이의 충돌이라곤 믿을 수 없는 폭음이 성당 내부에 울려 퍼졌다.
손목에 부러질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검신에 피어올랐던 오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다.
마나하트를 체크해 봤다. 남은 마나의 양은 고작 반절뿐이었다. 단 한 번의 충돌의 결과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
오러는 오러로 막는다.
그 진리 아래 상대의 오러를 막기 위해 손실된 마나가 엄청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비워진 마나하트로 새로운 마나가 물밀듯이 채워졌다는 것.
마나터널이 뚫려 있기에 망정이었다. 만약 내가 보통의 기사였다면 마나의 소모를 따라가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졌겠지.
“아직도 합류할 생각이 없나?”
녀석의 검에는 여전히 용암이 들끓듯 마나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마 내가 방금 간신히 막아 냈던 그 공격도 녀석에겐 단지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잽에 불과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만 나온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너무 세잖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일 년 전의 실수를 반복할 순 없지. 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없다고.”
“좋아.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합류할 생각이 드나?”
“30초만. 마지막으로 고민 좀 해 보고.”
“10초 주지.”
야박한 놈.
하지만 그 야박함을 따질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대로라면 내 죽음은 기정사실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휀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