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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40장. 하슈나르
41장. 감언이설
42장. 셀라 플로레스
43장. 늙은 너구리와 젊은 구렁이
44장. 두 번째 개국기념일
40장. 하슈나르


이후로 나는 몇 번 더 하슈나르에게 도전을 했고, 그때마다 결과는 같았다.
푸확!
또다시 내 가슴팍을 꿰뚫은 하슈나르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이 죽음에 익숙해지는 게 가능할까?
답은 ‘아니오’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고 곧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익숙해질 리가 없다.
매번 두렵고, 매번 고통스럽다.
상식적으로 산 채로 심장을 뜯기는 데 익숙해지는 게 이상한 거지.
‘아니, 근데 이 새끼는 뭐가 이렇게 세?’
천천히 고개를 들자 하슈나르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과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녀석은 이 일을 즐기지도, 그렇다고 싫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차라리 귀찮은 기색이라도 보이던가.
이건 뭐 아무런 감정도 없는 바윗덩어리에 들이박는 거랑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해야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목을 타고 올라온 비릿한 핏물을 삼키며 손을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검지를 뻗어 하슈나르의 얼굴을 가리켰다.
“너, 조금만 기다려.”
기필코 그 심드렁한 얼굴을 일그러뜨려 주마.
끝내 마지막 말은 내뱉지 못한 채 나는 네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 * *

“공자님?”
깨어난 나를 맞이한 건 일리아였다.
그녀의 얼굴엔 모종의 기대감이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앞선 네 번의 도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실패다.”
“……그렇군요.”
일리아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게 이번 도전만큼은 나나 일리아나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했기에.
“좀 더 갈고닦으면 다음번엔 성공하실 겁니다.”
“아니.”
“예?”
“아마 다음에도 실패할 거야.”
사람은 실패로부터 배우는 동물이다.
그리고 나는 앞선 네 번의 실패로 톡톡히 느꼈다. 아무리 혹독하게 준비한들, 일반적인 방법으론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벌써 그렇게 단정 지으실 건…….”
“아니, 확실해.”
내가 아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최대한 붙어서 벌이는 전투부터 아예 등을 보인 채 도망만 다녀 보는 것까지.
하지만 그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가까이 붙으면 녀석은 강력한 전사가 된다.
거리를 벌리면 날렵한 암살자가 되고, 작정한 채 도망을 다니면 교활한 사냥꾼으로 변했다.
뭔 수를 쓰든 결국 나는 놈의 손바닥 안이란 뜻이다.
“처음부터 잘못 짚었어.”
“잘못 짚었다는 말씀은…….”
“내가 변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 세상엔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나오든 놈은 모든 걸 대처한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이유로는 놈의 불공평하리만큼 사기적인 능력이 주효했다.
“놈을 꺾으려면 일단 그 능력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녀석의 능력 말입니까.”
“그래. 밑도 끝도 없이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그 능력. 근본적으로 그걸 대처하지 못하면 백번을 싸워도 필패야.”
“하지만 그 능력은…….”
“적어도 너나 내가 아는 범주는 아니지. 블링크같이 마법인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뾰족한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그렇지.”
“예?”
“웬만하면 직접 부딪쳐서 해결하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으려나.”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긴 해.”
도박에 가깝긴 하지만 그래도 해 볼 만한 방법이 있었다.
물론 그 방법엔 몇 가지 조건과 운이 따라 줘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그래도 시도조차 안 해 보는 것보단 낫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이제는 제법 수족처럼 느껴지는 목발을 집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 줄게. 일단 그것보다 칼란다트는?”
어물쩍 넘기는 내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으나 더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방에 있습니다.”
“일단 녀석을 만나 봐야겠어.”
“그러면 저는 공자님이 일어나신 걸 확인했으니 사냥이라도 다녀오겠습니다.”
일리아의 말에 나는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를 느꼈다.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일리아가 망토를 챙겨 밖으로 향하는 걸 확인한 나는 몸을 일으켜 안쪽 방으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하자 방 안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원인이야 뻔하다. 아마 녀석이 자신의 취미 활동을 급하게 가리고 있겠지.
“드, 들어와.”
칼란다트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이번에도 실패했네.”
손에 물감을 덕지덕지 묻힌 칼란다트가 나를 바라보며 헤헤 웃었다.
지금까지 지켜본바 원래 저런 녀석임을 알고는 있다만, 아무리 봐도 저건 비웃는 것 같단 말이지.
“그래. 실패했다.”
“안타깝게 돼, 됐어.”
“너 정말 안타까운 거 맞냐?”
“그, 그럼.”
“……그렇다면야. 뭐, 어쨌든.”
천천히 걸어 녀석 앞에 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냐?”
“도, 도와 달라니?”
“내가 너한테 도움을 청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하, 하슈나르겠지.”
“잘 아네.”
“하,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왜지?”
“그건…… 비, 비겁하잖아.”
비겁이라.
하긴, 이해 못 할 건 없다. 아마 하슈나르는 드루이드에게 영웅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니 그와 싸우는 나를 돕기엔 난처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건 없다. 녀석은 지금 종족의 규율 같은 걸 들먹이며 거절한 게 아니었으니까.
규율이 아니다. 그 말은 곧 녀석의 마음만 돌려낸다면 도움을 얻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을 사용해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순 없다. 막말로 녀석이 앙심이라도 품는다면 곤란해지는 건 나일 테니.
그렇다면 남는 건 회유뿐인데.
다행히 그거라면 짚이는 구석이 있다.
“그래. 네 심정 이해한다.”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옆머리를 긁었다.
“이, 이해해 줘서 고마워.”
“당연한 건데 고마울 게 있나.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해 줬더라?”
“으응? 이, 이야기?”
칼란다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화색을 넘어서 열망에 가까운 눈빛이다.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뻔하다. 아마 내가 해 주는 이야기가 라헨나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겠지.
이곳에 머물게 된 이후 종종 칼란다트는 강아지처럼 옆에 달라붙어 라헨나에 대해 캐묻곤 했다.
그러면 나는 짧게 썰을 풀어 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녀석은 지금처럼 단순한 반가움을 넘어 광신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어차피 후유증 때문에 오늘은 꼬박 쉬어야 하잖아. 할 것도 없으니 이야기보따리나 풀어 볼까 해서.”
“그, 그래?”
예상대로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갈란다트가 황급히 나를 부축하며 거실로 향했다.
“그럼 거실에서 펴, 편하게 이야기하자!”
“그러지 뭐.”
“그, 그리고 혹시나 네가 잊었나 싶어서 마, 말해 주자면 저번엔 대수림까지…….”
“그래, 기억났다. 대수림까지 이야기했었지.”
“마, 맞아.”
“라헨나가 엘프 장로인 글로리안과 일대일로 맞선 장면이었나?”
“으, 으응! 맞아!”
칼란다트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참, 몸이 잔뜩 달아올랐구만.
그렇게 거실로 나온 내가 테이블 옆 의자에 걸터앉자 칼란다트가 잽싸게 맞은편에 앉아 경건한 자세를 취했다. 흡사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대로 순순히 입을 열 생각이 없단 말이지.
‘이 자식아. 세상이 그렇게 녹록한 줄 아냐?’
짐짓 헛기침한 나는 눈을 빛내는 칼란다트를 바라봤다.
“이야기는 해 주지.”
“좋아!”
“다만 공짜는 아니야.”
“으응?”
“너는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엔 음유시인이란 직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