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tents
목차
31장. 푸른 산맥
32장. 하늘 요새
33장. 뜻밖의 소식
34장. 중재자
31장. 푸른 산맥


푸른 산맥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을에 다다르자 엉성한 목책 위로 머리 하나가 솟았다.
“누구요?”
늦은 밤이라 어두워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나는 에보니의 힘을 끌어냈다.
그러자 마치 렌즈를 낀 것처럼 어둠 속에서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물감은 없었다. 원래 내 눈인 것처럼 편안했으니까.
‘정말 요긴하기 이를 데 없다니까.’
나이트비전이라고 부를까 하다가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아 암안(暗眼)이라 이름 붙였다.
실제로 어둠을 꿰뚫어 보기도 하고 마차에서 거울을 비춰 봤을 때 눈동자가 검게 바뀌었으니.
그렇게 암안으로 살펴본 목책에 선 남자는 전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의 중년인이었다.
손에는 활을 쥐고 있었으나 그 기세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했다. 아무래도 전사라기보단 자경단 수준에 불과해 보였다.
“여행잡니다. 푸른 산맥으로 향하던 길에 마을이 보여 들렀습니다.”
내가 가만히 목책을 살피는 사이 리하스가 앞으로 나서 자신을 밝혔다.
정식 기사가 되었음에도 굳이 여행자라고 밝히는 이유는 아마 리하스가 권위를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 거겠지. 하긴, 그런 성격이면 애초에 자신이 섬기는 귀족의 목을 베지도 않았겠지만.
“푸른 산맥으로 향하는 여행자라고? 혹시 여행 목적지가 지옥이시우?”
신랄한 비꼼에 리하스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하늘 요새로 가는 중입니다.”
“아, 하늘 요새? 기사 나리요?”
“크흠, 바람기사단 소속입니다.”
“그렇구먼. 알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중년인의 대답에 리하스는 당황했다. 기사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자신을 낮추거나 겁을 먹는 기운이 없었기 때문.
뭐, 나는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뻔하다. 둘 중 하나겠지. 기사가 무슨 존재인지 모르거나, 아니면 기사를 하도 많이 만나 봐서 만성이 되었거나.
하지만 이곳은 하늘 요새에 다다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니 아마 후자일 공산이 높을 거다.
“바람기사단 분이시란다. 열어 드려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람기사단의 이름을 옆 동네 친구 부르듯 하는 저 중년인의 태도는 뭘까.
드르륵…….
엉성한 목책에 엉성한 문이 엉성하게 열렸으며, 이후 모습을 드러낸 두 문지기의 행색도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엉성한 마을이네.’
간단한 말로 감상을 내린 나는 리하스와 함께 마차를 몰아 마을 내부로 들어섰다.
지나치면서 문지기들과 눈을 마주했다.
질 나쁜 창을 든 문지기들은 그래도 처음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중년인보단 훨씬 젊어 보였다. 이십 대 중반쯤 되었을까?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이 마을에 여관이 있습니까?”
리하스의 멍청한 질문에 난 한숨을 내쉬었다.
“여행자도 없는 지역에 여관이 있겠어?”
“아, 그렇군요.”
머쓱한 얼굴로 리하스가 뒷덜미를 긁적이고 있자 젊은 문지기가 나서서 먼 곳의 건물을 가리켰다.
“저 집이 촌장님이 거주하시는 곳입니다. 이방인들은 대개 저곳에서 머무릅니다.”
“그런가요? 찾아가도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예. 이방인들이 괜히 다른 집들을 들쑤시느니 그냥 촌장님께서 전부 맡겠다고 하셨죠.”
“알려 줘서 고맙군요.”
상대가 평민임에도 리하스는 정중한 말투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젊은이는 리하스의 감사에도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그건 그렇고, 우리 이전에 다른 기사들이 온 적 있나?”
“다른 기사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잿빛 매가 그려진 마차를 타고 왔을 텐데.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아주 길어야 일주일이겠지.”
“못 봤습니다만.”
데인은 아마 이 마을을 거치지 않고 바로 향한 듯했다. 하긴, 이런 작은 마을에 굳이 들러서 쉴 필요가 있겠냐마는.
이후 마차를 몰아 촌장의 집 앞에 당도하자 리하스가 말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촌장님 계십니까?”
끼익-.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렇다 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은 아니었다. 옷에 가려져 있으나 그의 몸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바로 꼿꼿이 선 자세엔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었는데, 특히 무기가 없음에도 자연스레 손이 허리로 올라가는 모습은 과거 검을 쥔 경력이 있음을 짐작케 했다.
흡사 전장에서 닳고 닳은 노익장의 대표적인 이미지라고 할까. 범상치 않은 인물임은 분명했다.
“내가 이 마을 촌장이오.”
“머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만.”
“두 사람 전부 기사요?”
이상한 마을에 어울리는 촌장이었다.
우리를 지나가는 여행자 대하는 듯한 태도에 리하스도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람기사단 소속이고, 하늘 요새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자 찾았습니다.”
“하긴, 이 이후로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뒤이어 촌장이 우리가 타고 온 말을 보곤 집 옆에 자리한 작은 창고를 가리켰다.
“마구간은 없소. 저기가 헛간이니 대충 매어 놓으시오. 건초는 헛간에 있으니 먹일 물만 마을 중앙 우물에서 길어 오면 될 거요.”
촌장의 말에 이제는 완전히 적응해 버린 리하스가 나를 바라봤다.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시죠.”
“고생해.”
내 말에 빙긋 웃은 리하스가 말을 이끌고 헛간으로 향했고, 뒤이어 나는 촌장의 뒤를 따라 작은 이층집 내부로 들어섰다.
추운 겨울인 데다 푸른 산맥 근처인 탓에 살을 에는 추위에 시달렸던 나는 훈훈한 실내로 들어가자 몸이 녹는 기분이 들었다.
발을 털고 몸을 감싸고 있던 망토를 벗자 그런 내 모습을 본 촌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조용한 마을에 잿빛 매가 찾아왔구먼.”
내 머리칼을 보고 삼공자임을 알아낸 모습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촌장, 너무 수상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예, 신세 좀 지겠습니다.”
감사를 표하자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하셨소?”
“대충 끼니는 때웠습니다만.”
“달라는 소리군. 스튜가 좀 남았지. 불을 지피고 올 테니 대충 자리에 앉아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내가 삼공자임을 안 뒤에도 턱짓으로 거실 테이블을 가리키는 촌장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이 이상한 마을의 분위기는 이 촌장이 만들어 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당신 누구야, 대체?’

* * *

김이 피어오르는 따듯한 스튜 두 접시와 테이블 가운데 거칠지만 두툼한 밀빵이 놓였다.
“차린 건 없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와 리하스가 감사를 표하며 스튜를 떠 입에 넣었다.
그렇게 한 숟갈이 두 숟갈이 되고, 이내 스튜와 빵까지 남김없이 깨끗이 먹어치운 나와 리하스가 그제야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돌렸다.
끝내주는 맛은 아니었으나 온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있는 식사였다.
“모자라시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 말에 리하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늘 요새에는 어쩐 일로 가시는가?”
촌장의 물음에 나는 물을 마시며 답했다.
“기사 수행이 있어 찾습니다.”
“기사 수행? 대체 뭔 잘못을 했기에 하늘 요새로 수행을 떠나는 거요, 그것도 공자의 신분으로?”
“뭐, 사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야 더는 묻지 않겠소.”
촌장의 말에 나는 지금껏 궁금했던 내용을 조심스레 물었다.
“그보다 노인장께선 원래 하시던 일이 무엇이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라비틀어진 마을 촌장에게 노인장은 무슨.”
“글쎄요, 사람은 누구나 지나온 길에 따라 각자 다른 기운을 가지니 말입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으시군. 그냥 시골 마을 촌장일 뿐이오.”
거짓말이다.
틈틈이 촌장의 행동을 모두 지켜본 결과 그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스튜를 젓던 국자조차도 무기 집듯 하는 양반인데 단순한 촌장일 리가 있나.
게다가 이 마을 사람들의 태도도 이상했다.
촌장이야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마을 사람들까지 기사를 무슨 동네 똥강아지 보듯 대하니 말이다.
‘촌장이 만약 기사였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된다. 그것도 꽤 높은 지위의 기사.’
그런 존재를 촌장으로 삼고 있다면 이 무감각한 대응도 이해가 되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과거에 어디서 활약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소만.”
“혹, 저희가 마땅히 예를 갖춰야 하는 신분이신데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 말입니다.”
내 말에 시종일관 같은 표정이던 촌장의 얼굴에 조금은 웃음기가 맴돌았다.
“예를 갖춰야 하는 신분? 됐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를 끌어내 지금의 자신을 돋보여 봤자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이오.”
“그렇습니까.”
“그래도 마냥 감추자니 당신들 실망한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잠시 말을 아꼈던 촌장이 검지를 폈다.
“하나에 하나 어떠하신가.”
“하나에 하나……라는 말씀은.”
“들어 보면 알 거요. 그럼 먼저 시작하겠소.”
이내 촌장은 지금까지 보여 주던 과묵한 인상은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직시했다.
“혹 하늘 요새의 성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요?”
“…….”
콜스 나이드가 죽었다는 건 영지 내부에서도 엄중히 비밀로 여기는 사실이다.
바람기사단 정도 되는 요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심지어 갓 입단한 리하스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런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 묻는 촌장의 말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관리했지만 리하스는 그러지 못했다.
“하늘 요새의 성주님은 콜스 나이드 님 아닙니까? 그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