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너였다 4
 
지은이 : 임제
펴낸 곳 : 마이디팟
기획 : 최탐이나
 
투고 및 문의 : info@mydepot.co.kr
 
ⓒ 임제, 2025.
* 값 : 3,600원
* 발행일 : 2025 년  06월 21일
* ISBN : 979-11-318-7690-9 05810
* 불법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9장 ? 합숙 (2)
“으으. 속 쓰려.”
이틀간의 합숙 훈련을 핑계로 온 MT가 끝났다. 이튿날 훈련은 순조롭게 끝났고, 김동찬이 전날 먼저 취한 설욕을 갚겠다며 노유진과 윤설화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완패했고, 남은 건 숙취뿐이었다.
보닛 위에 엎드린 김동찬이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든 말든 노유진은 트렁크에 제 짐을 실었다. 차가 꿀렁 흔들리자 김동찬은 멀미하듯 입을 틀어막았다.
“혼자 말술을 마실 것처럼 굴더니.”
“누님이 이상할 정도로 잘 마시는 거라고요. 그리고 저 정도면 잘 마시는 편 아닙니까?”
김동찬은 정신 덜 차린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는 박유하를 가리켰다.
“형님에 비하면.”
저를 부르는 걸 알고 박유하는 뭘 보냐는 얼굴로 흘겨봤다.
“그저께 일 진짜 기억 안 나십니까?”
“안 난다고 했잖아.”
“저희한테 그런 뜨거운 고백을 했으면서?”
“그게 무슨 고백이냐?”
“기억 안 난다면서요.”
“…….”
김동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낄낄댔다. 박유하가 무서운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최소 꿀밤 혹은 주먹이 날아올 거라 직감했는지 김동찬은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달리는 속도는 박유하가 월등히 빨랐다. 순식간에 따라잡아 김동찬의 목깃을 잡은 순간이었다.
끼익.
“늦어서 죄송합니…….”
마지막으로 나온 윤설화가 무슨 상황인지 읽으려는 듯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 해요?”
“별거 아니야.”
박유하는 잡았던 깃을 놓은 직후 내동댕이치듯 밀었다. 김동찬이 “꾸엑!”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박유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윤설화에게 다가가 그녀의 짐을 대신 들었다.
“다 챙겼어?”
“아, 네. 근데 짐은…….”
“넣을 거잖아.”
“제가 들게요.”
윤설화는 도로 달라고 손을 뻗었지만, 박유하가 팔을 길게 뻗어 윤설화에게서 사수했다. 그러곤 남은 손으로 윤설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 깜박할 사이었으나 강렬했다.
이제 알 텐데. 자기가 날 만지면 심장이 아기 새처럼 파르르 떨린다는 걸.
윤설화가 굳어 있는 사이 박유하는 어느새 윤설화의 짐을 싣고 트렁크를 닫았다.
“그럼 출발하자.”
“아! 잠깐만요, 선배들.”
윤설화가 손을 들어 세 사람을 주목시켰다.
“우리 가기 전에 사진 하나 찍고 가요.”
윤설화의 손에는 작은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아이디가 개발된 이후로는 더는 쓰지 않게 된 옛 유물이었다.
김동찬이 감탄하며 그녀의 손에 든 카메라를 넘겨받아 이리저리 관찰했다.
“와. 이게 언제 적 물건이냐? 어디서 났어?”
“방에 있었어요.”
“근데 작동은 해?”
“어제 궁금해서 눌러 봤더니 되더라고요. 흑백으로만 나오지만요.”
김동찬은 카메라 창에 눈을 대고 뭐를 찍을까 하고 이곳저곳 가리키다 렌즈가 노유진을 가리킨 순간 찰칵, 하고 버튼을 눌렀다.
플래시가 터지고 노유진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골골골 불안정한 소리를 내며 얇은 필름 한 장을 날름 뱉었다. 시간이 지나자 무방비한 표정인 노유진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누가 찍으래?”
“잘 되나 안 되나 확인한 거죠. 근데 저 이거 가져도 됩니까?”
“초상권료 내면.”
두 사람이 투덕거리며 흥정하는 사이 윤설화는 박유하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사진 찍는 거 싫어요?”
“좋아하진 않아.”
“왜요?”
윤설화는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박유하를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 짧게 답했다.
“……좋은 일로 찍힌 적이 없어.”
그의 푸른 눈이 어두워졌다. 윤설화가 좋아하는 하늘 같은 눈이 이 도시에서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가 한때 언론보도부의 조작으로 비난의 몰매를 맞았음을 들었기에 말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훨씬 많은 우리다. 과거의 파편 하나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설화는 양손으로 덥석 박유하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좋은 날을 추억하기 위해 찍는 거잖아요.”
상처가 덧나지 않기 위해 쓰라린 소독약을 발라야 하는 것처럼. 지금은 조금 아플지라도 이 순간이 당신을 치유하리라 굳게 믿으니까.
“그러니까 같이 찍어요, 네? 네?”
“…….”
“넷이 다 같이 왔는데 혼자 빠지면 안 되죠!”
윤설화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그의 팔을 가볍게 당겼다. 박유하는 눈이 커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제 손을 잡고 그네처럼 붕붕 흔드는 그녀를 보자 내가 졌다며 미소를 흘렸다.
만개한 벚나무와 호수를 배경 삼아 네 사람은 옹기종기 모였다. 김동찬은 제일 앞에 서서 카메라 렌즈가 일행 쪽으로 향하도록 잡고 팔을 쭉 뻗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플래시가 터지고 사진이 부들부들 떨며 나왔다.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서서히 선명해지는 사진을 확인했다.
“김동찬, 이 괴상한 표정은 뭐냐?”
“제가 못생겨지니까 세 사람이 더 아름답게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설화, 눈 반 감았다.”
“아아악! 이거 취소! 무효! 버려 주세요!”
“싫은데? 형님 가지실래요?”
윤설화가 반만 눈을 뜬 사진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오갔다. 김동찬에게서 박유하로. 윤설화는 까치발을 들고 박유하에게서 어떻게든 뺏으려고 했으나…….
“뭐, 이 사진 덕에 ‘좋은 추억’ 하나 만들었네.”
“다른 사진으로 간직해도 되잖아요!”
“난 이게 좋아.”
박유하가 눈이 접히게 웃는 바람에 윤설화는 차마 뺏을 수가 없었다.
결국 회수하지 못한 채 세 장을 마저 찍었다. 절대 눈을 감지 않겠다는 의지로 눈을 부릅떴다.
찰칵, 도르르. 찰칵, 도르르. 찰칵, 도르르.
우정의 증표처럼 사진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윤설화는 제 몫의 사진을 소중히 쓸었다. 도시에 처음 들어온 날, 어떤 애착도 갖지 않은 채 엄마의 진실만 알아내면 떠나겠다 결심했는데.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생겼다. 이제 도시는 외로운 곳이 아니었다.
“선배들.”
작고 얇은 증표를 품에 꼭 안았다.
“우리, 다음 학기에도 또 와요. 내년에도, 그다음에도 와서 오늘처럼 사진 찍어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던 윤설화는 처음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세 사람은 윤설화의 기약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러다 김동찬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아, 하고 운을 뗐다.
“근데 형님은 올해까지잖아.”
“네? 음……. 그럼 코치로 어때요?”
“다음에 여길 또 열라고? 귀찮은데.”
“누님, 어제 형님이 한 말 까먹었습니까? 그렇게 귀찮아하지 마시고……아아아악!”
박유하는 작작하라며 김동찬의 귀를 힘껏 잡아당겼다. 쩔쩔매는 김동찬, 철부지 남동생을 보는 듯한 노유진, 귀가 슬쩍 빨개진 박유하를 보고 윤설화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아아.
이때까지는 몰랐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평화인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덜 웃었을 텐데.
이루지 못할 약속인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덜 소중히 간직했을 텐데.
***
사무실 안은 거대한 쓰레기통이라 불러도 반대할 사람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방 곳곳에는 알싸한 진통제 향과 담배 냄새가 안 밴 곳이 없었고, 책상 위에는 버리지 않은 담배꽁초가 그득했다. 그 위에는 언제 정리했는지 모를 화면 수십 개가 둥둥 떠다녔다.
그곳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왜소한 체격과 백발 때문에 언뜻 노인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입가나 목에 깊은 주름은 드물었다.
소파 위에 빨래처럼 늘어진 그 남자는 검은 안대를 쓴 채 쪽잠을 자는 중이었다.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렸으나 남자는 미동도 안 했다. 그럴 줄 알았는지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문은 절로 열렸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표정 하나 없이 들어왔다. 그러고는 겨드랑이에 낀 신문 여러 장을 소파 옆 테이블에 버리듯이 내려놓았다.
우당탕 요란스러운 소리에, 자고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가벼운 경기를 일으켰다.
“아이, 시발.”
남자는 안대를 슬쩍 들어 올려 무슨 상황인지 살폈다. 제 앞에 서 있는 부하 직원이 보이자 욕을 중얼거리며 도로 누웠다.
신문을 내려놓은 여자는 험한 말을 듣건 말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똑바로 섰다.
“소장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
“방금 중앙탑에서 재료가 왔습니다.”
“……수량은?”
“넷입니다.”
“꼴랑 그거로 뭘 어쩌라고…….”
남자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몸을 옆으로 돌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러나 여자는 예상한 반응이라며 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검사 결과 품질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테스트한 신제품 재료로도 손색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최소 다섯은 있어야 한다고 그랬잖아.”
남자가 돌아누운 자세는 풀지 않은 채 어깨만 살짝 돌렸다. 곧이어 물어볼 질문의 답이 시원찮으면 다시 잠이나 자겠다는 의중이었다.
“지난번에 보낸 건 어떻게 했어? 야심 차게 준비한 신제품인데.”
“안 그래도 보고드리려 했는데…….”
여자는 방금 내려놓은 신문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처리되었습니다.”
“……엉?”
남자가 스프링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래된 소파에서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삐거덕 소리가 났지만, 그러든 말든 남자는 쓰고 있던 안대를 훌러덩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