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너였다 1
 
지은이 : 임제
펴낸 곳 : 마이디팟
기획 : 최탐이나
 
투고 및 문의 : info@mydepot.co.kr
 
ⓒ 임제, 2025.
* 값 : 3,600원
* 발행일 : 2025 년  06월 21일
* ISBN : 979-11-318-7687-9 05810
* 불법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프롤로그. 하얀 소녀
첫 기억은 파란 하늘 아래에서였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과 광야처럼 펼쳐진 눈부신 설원 위에 홀로 서 있었다. 만약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아니었다면 몇 날 며칠이고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추, 추워.』
참을 수 없는 추위에 온기를 간절하게 소망했다. 그러자 오른쪽 가슴 언저리에서 열감이 느껴지더니 몸에서 하얀 빛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양팔을 뻗은 범위 안에 마치 봄이 찾아온 것처럼 살을 에는 냉기가 사라졌다.
그제야 저를 돌아보았다. 어깨와 목이 훤히 드러난 하얀 민소매 원피스부터 손, 팔, 은백색 머리카락에도 군데군데 탄내 나는 재가 묻어 있었다.
제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 싶다고 생각하다 깨달았다.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생김새도, 어디에서 왔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리고…….
내가 누군지.
기억을 쥐어짰으나 머리만 지끈 아팠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자 목에 걸린 무언가가 툭 떨어지다 가슴 부근에서 멈췄다. 부드러운 가죽 목줄을 들어 올리자 나무로 만든 동그란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잡고 앞뒤로 돌렸다. 앞면은 텅 비었고 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설화(?華)
“설화…….”
홀로 되뇌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지, 남의 이름인지도 알지 못한 채, 해가 지고 뜨기를 수차례 거듭하는 내내 반복해서 불렀다. 아무도 없는 설원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
저를 감싼 빛 덕분에 춥지는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러나 새하얀 머릿속도, 고독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동그란 달이 은은하게 빛나던 밤도, 잿빛 구름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솜뭉치 같은 눈을 떨어트린 날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람은 물론 지나가는 동물조차 없었다.
여기 있어도 아무도 오지 않을 거야.
그런 생각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태양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걸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다리에 납덩어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질 무렵, 곧게 뻗은 철로가 나타났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솟아 다람쥐처럼 달려갔다.
철로 위에 올라서자 백과사전만큼 두껍게 낀 성에가 녹아 사라졌다. 붉은 쇠붙이가 드러났다. 쇠 표면에 코를 박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비릿한 냄새에 절로 눈썹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양옆으로 뻗은 철로를 번갈아 보았다.
오른쪽은 잡아당긴 엿가락처럼 제멋대로 휘어진 채 끊어져 있고, 반면 왼쪽은 견고하고 곧게,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뻗어 있었다. 마치 따라가라고 인도하는 것처럼.
철로를 길 삼아 걸었다. 이 길 끝에 누군가 나타나기를 바랐건만, 사람 대신 뱀의 허물처럼 버려진 크고 긴 고철 덩어리를 발견했다.
저건 뭘까. 언뜻 두 눈처럼 보이나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하얗게 성에가 낀 유리창이었다. 높이는 그녀보다 몇 배는 높았고, 똑같이 생긴 거대한 고철 상자 여덟 개가 줄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깨진 창문으로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위쪽에 대롱거리는 삼각형 손잡이를 툭 건드려 보고, 양쪽 벽으로 길게 붙은 파란 의자에 앉아 보기도 했다. 얼어 버린 쿠션에서 바사삭하고 부서질 듯한 소리가 나자 흠칫 놀라 깊게 앉지 못하고 일어섰다.
안을 둘러보다 벽에 붙은 종이에 시선이 꽂혔다. 색이 바래 흐릿한 푸른색과 흰색뿐이었다.
【공무원 시험 합격은 에뒤몰】
어떤 종이에선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모바일 삼국지. 사전 예약 중】
어떤 종이에선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아저씨가 파도처럼 생긴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하철 광고 문의 1588 - 0078】
멸망한 문명의 흔적임을 알게 된 건 조금 더 훗날이었다.
***
다시 밤이 찾아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어둠이 싫은데 달빛마저 없었다.
『……무서워.』
빛이 간절했다. 그러자 온기를 빚어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끝에서 민들레 꽃씨 같은 작은 빛이 만들어졌다. 크기는 작아도 주변을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손에서 벗어난 빛은 둥실둥실 떠다니다 맞은편에 붙은 종이를 비추었다. 예쁜 언니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안……녕?”
종이에 찍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처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름이, 뭐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
열심히 올린 입꼬리가 절망하여 툭 떨어졌다. 결국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아무도 없는 걸까. 세상에 나만 남은 걸까.
차가운 침묵이, 또다시 찾아오는 어둠이, 홀로 지새워야 할 날들이 무서워 몸을 웅크렸다. 아침이 오기는 할까.
차라리 기억처럼 감정도 사라졌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무겁고 숨 막히고, 목이 터질 만큼 울고 싶은 마음도 몰랐을 텐데.
누가 나 좀 찾아 줘.
누가 나 좀 안아 줘.
누가 나 좀 구해 줘.
눈을 감으며 맺혔던 눈물과 함께 마음이 무너져 내리려는 그때.
쾅!
새카만 손이 옆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놀란 나머지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만약 조금만 옆으로 들어왔어도 머리가 터지거나 배에 구멍이 났을 거다.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움켜쥔 채 거대한 손을 쳐다보았다. 먹이를 놓쳐 아쉽다는 듯 끼기긱 소리를 내며 유리를 긁었다. 소름이 끼쳤다.
열린 문틈으로 손의 주인이 보였다. 불에 탄 시체처럼 전신이 새까맸다.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었고 코는 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경계가 모호했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걸었으나 사람이 아니었다.
괴물. 그 외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크르르르르.
사냥감을 놓쳐 아쉬워하는 짐승처럼 울어 댔다. 달아나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사이 괴물이 문을 강제로 벌렸다. 단단한 철문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구겨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등에 닿은 문은 도망칠 수 없다는 듯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괴물은 검은 타액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마치 식사를 기대하는 것처럼 징그러운 입을 벌렸다.
『오……오지…….』
하얀빛이 끓어 넘치기 직전의 물처럼 일렁였다. 그때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며 달려들었다.
『오지 마!』
무아몽중으로 외친 순간 철퇴를 맞은 것처럼 괴물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그러나 제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오들오들 떨었다.
주위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날아간 괴물은 바로 앞에 엎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검은 피만이 서서히 흐르며 다가왔다. 너를 삼켜 버리겠다는 것처럼.
도망쳐야 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괴물의 시체에게서 멀리 달아나 다른 문으로 향했다. 밖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 차량과 땅바닥의 높이를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악!”
갈비뼈를 제대로 부딪쳤다. 몹시 아팠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이 악물고 달렸다. 눈에 발이 푹푹 파묻혀 빠르게 달릴 수가 없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가슴은 뜨거웠다.
처음에는 괴물에 대한 공포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위화감이 들었다. 가슴 안쪽이 불에 달군 쇠를 품은 것처럼 뜨거웠다.
열기에 폐가 짓눌리기라도 하는 건지 숨이 가빴다. 그뿐 아니라 하얀 장막은 군데군데 벌집 모양으로 구멍이 뚫리더니 조각조각 무너져 내렸다. 곧 사라져 주변의 눈이 더는 녹지 않았다. 민들레 꽃씨 같은 빛마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롭게 깜박였다.
추운데 뜨거웠다. 상반되는 두 감각 모두 선명하게 아팠다. 점점 숨까지 쉬기 힘들어져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고통이 격해져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쿵. 쿵. 쿵.
땅이 울었다. 소리는 거대했고 진동은 거세졌다. 이윽고 산처럼 커다란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 죽은 개체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괴물이었다.
깜박이던 빛이 사라지고, 도망치려는 순간 괴물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괴물은 손에 잡은 사냥감을 터트려 죽일 것처럼 강하게 옥죄어 왔다. 전신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압박감과 눈앞에 다가온 죽음에 벌벌 떨었다.
괴물이 내뿜는 뜨거운 입김을 정면으로 맞았다. 썩은 쓰레기 같은 역한 냄새에 속이 뒤집히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빛이 없어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런데도 알 것 같았다. 이빨을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으려는 포식자의 본능. 전신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 끔찍한 감각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었다.
죽기 싫어.
마음을 죽이고 싶을 만큼 외로웠지만, 그만큼 절실히 살고 싶었다.
몸에서 나왔던 하얀 기운이 생각났다.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내뿜어지면서 이루어졌다. 온기를 원하면 주변이 따스해지고 빛을 원하면 주변이 밝아졌다. 처음 나타난 괴물도 그렇게 사라졌다.
『이, 이거…….』
놓으라고 외치려는 순간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고통이었다.
괴물은 죽어 가는 곤충을 관찰하듯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팔을 제 머리 위로 올렸다. 제 위장 속으로 떨어트리겠다는 듯 괴물의 아귀힘이 점점 느슨해졌다.
살려 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라고 속으로 외친 순간.
0100101100101011
괴물의 얼굴 옆으로 밝은 갈색빛의 숫자가 나타났다.
탕!
총성과 함께 괴물의 팔이 잘려나갔다. 검은 피가 역류하는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괴물의 손이 스르르 풀리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내장이 거꾸로 뒤집히듯 아찔했다. 이대로 떨어지면 온몸이 부서질 게 분명했지만, 지칠 대로 지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부아아아앙!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읏!”
순간 짧은 신음이 들렸다. 추락하여 부서지는 대신 파르르 떨리는 팔 위에 안착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셔 질끈 감았다가 조심스레 한쪽 눈을 떴다.
“……어린애?”
엄마와의 첫 만남이었다.
1장 - 육성학교의 불량품
[G13 구역, 진압까지 예상 소요시간 약 128초.]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스크린 옆으로 초록색 글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났다. 스크린이 비추는 가상 공간에서 훈련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자이크처럼 16등분으로 나뉜 화면에 찍힌 공간은 곳곳이 새하얗게 얼어 있었다. 어두운 통로며 깨진 창문에는 녹지 않는 성에가 덕지덕지 붙었고, 바닥 곳곳은 금이 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끼기기기긱.
그 안을 거대한 굼벵이 괴물들이 제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사람보다 두세 배는 더 큰 그들은 불에 탄 숯처럼 표피가 새까맸고,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들은 없는 눈으로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11101011
갑자기 괴물 한 마리의 미간 사이에 빛으로 이루어진 숫자가 나타났다.
탕!
방아쇠 당기는 소리와 동시에 숫자가 번쩍 빛나더니 그 괴물은 전기에 감전된 듯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자 다른 괴물들은 주변을 경계하는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꼬리와 구별하기 힘든 머리가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01001011
01001011
01001011
……
이윽고 또 다른 숫자가 여러 발 새겨졌다. 발포와 동시에 괴물들의 머리가 폭탄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은 피가 하얗게 성에 서린 바닥에 흩뿌려졌다.
- 그레이 울프 3, 4. 돌격.
지시와 동시에 벽 뒤에 숨어 있던 이들이 단도를 들고 빠르게 괴물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숫자로 이루어진 칼날을 꺼내어 괴물들의 급소를 찌르고 난도질했다.
- G13 구역, 진압 완료. 지금부터 B35 구역으로 들어간다.
그 광경을 마치 교통 상황 확인하듯 바라보던 남자 교수가 제 뒤에 서 있던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9팀에서 한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사람?”
“전투 전 보온 코드를 깐 탓에 사전에 위치가 발각된 것입니다.”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이즈들은 시각 대신 청각과 피부에 전해지는 변화로 인간을 감지합니다. 그런데 5분 전, 보온 코드를 깔았고 그로 인해 위치가 발각되어 3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학생은 설명과 동시에 7번째 스크린을 가리켰다. 대기실에 주저앉은 채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3명이 찍혔다.
그들은 5분 전 괴물에게 들켜 몸이 뚫리고 먹혔었다. 만약 가상훈련 공간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노이즈는 인간을 식(食)하는 괴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