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5장
6장
7장
8장
5장
뒤늦게 침실에 도착한 사하는 부랑자 같은 엘제의 몰골을 보더니 서둘러 욕조를 침실에 올렸다. 그녀가 목욕을 끝마칠 때쯤, 황혼이 짙게 깔려 있던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가는 길, 사하는 겸사겸사 본궁 구조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3층 중앙에는 폐하의 침실과 황후 폐하의 침실이 있어요. 침실 안에 있는 문을 열면 계단이 하나 보일 거예요. 그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황녀님이 머무실 침실이 나와요. 황후 폐하의 침실도 똑같이 계단이 연결되어 있어요.”
“…….”
“2층에는 황녀 전하의 침실뿐만 아니라 만찬 대기실과 손님들이 머물 방이 마련되어 있어요. 서쪽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연회장이, 동쪽 끝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폐하께서 사용하시는 집무실과 서재가 보일 거예요. 아, 그리고 도서관은 본궁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어요. 혹시 책을 읽고 싶으시다면 서재를 사용하시는 게 도서관에 가시는 것보다 편하실 거예요. 서재에도 도서관 못지않게 책이 쌓여 있거든요.”
사하의 부지런한 걸음에 발을 맞춰 궁을 둘러보는 동안, 엘제는 그녀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멍하게 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탓이었다.
?그러니 오늘 저지른 행동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지 천천히 생각해 봐. 밤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
제가 책임질 방법이 도대체 뭐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엘제는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문득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벌을 받던 모습이 떠올랐다. 벽을 보고 선 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야 하는 벌.
자신은 그의 딸아이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벌을 받는 게 맞는 건가. 끝내 울컥하며 감정이 치밀었다.
반골 기질이 있어 나온 반항심은 아니었다. 그냥…… 그에게 아이 취급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자 싫었던 게 전부였다. 결국 시무룩하게 눈꼬리가 내려갔다.
“……1층에는 식당이 있고, 사용인들의 방이 마련되어 있어요.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부르시면 돼요. 1층 가장 끝 쪽에는 회의장이 있는데, 아마 이번에 건물이 증축되면 그곳으로 옮길 것 같아요.”
2층 난간에 기댄 채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하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엘제 님, 침실에서 폐하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제가 모르지만 그래도…… 들었던 말에 너무 괘념치 마세요. 항상 어떤 일에도 동요가 없으신 분인데, 오늘 엘제 님이 사라지신 일에는 정말 크게 놀라셨거든요. 어쩌면 제가 읽은 폐하의 감정보다 속으론 더 크게 불안해하셨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마 마음과 반대되는 날카로운 말들이 나오신 걸 거예요.”
엘제는 당혹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였다. 침실에서 나눈 대화 때문에 심란한 건 맞으나, 그가 못된 말들을 내뱉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하의 잘못된 추측에 대해 해명하는 게 좋을까……. 복잡한 표정으로 사하를 바라보자, 그녀는 당황해하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제 말을 믿으셔도 돼요. 엘제 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반지. 그래, 반지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이제껏 폐하는 엘제 님을 데려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나눠 낀 반지를 한시도 빼놓은 적이 없으세요. 심지어 중요한 결정이 필요한 상황에는 종일 반지를 만지며 생각에 잠기셨어요. 그런 폐하께서 엘제 님이 미워서 못된 말을 뱉으셨을 리가 없잖아요.”
사하는 진실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엘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이다가도 보쥬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부부의 침실에 남편이 아닌 다른 사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른 남자와 침실에 있는 저와 아내인 사하를 겹쳐 본 탓에 보쥬가 뱉어 낸 헛말인 줄 알았다. 사하가 다른 남자와 침실에 함께 있다면, 그 남자의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며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사하의 말을 듣고 보니 보쥬의 말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반지. 나눠 낀 반지. 결혼반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믿을 수 없어 약지를 하염없이 만졌다. 반지를 받은 적이 없으니, 손가락의 허전함이 자연스러운 느낌인데도 그녀는 초조해하며 약지를 문질렀다.
‘……나머지 반지는 누구한테 있는 거지?’
불길함이 엄습했다. 엘제가 심란한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문으로 새가 스산하게 울어 대는 소리가 어지럽게 메아리쳤다. 문득 어머니와 여름 숲을 거닐며 둥지를 구경했을 때의 끔찍한 경험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말하길,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있는 알을 제거하고 자신의 알을 그 자리에 둔다고 했다. 그렇게 다른 새가 제 새끼를 키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걸 내어 주고 정성껏 키운 새가 실은 자기 새끼가 아니라는 걸 다른 새가 만약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당연히 고통스럽고 끔찍할 테다.
하필 그 이야기가 이 시점에서 떠올랐기 때문일까. 뻐꾸기의 새끼처럼, 자신도 모르게 다른 여인의 자리를 빼앗아 그의 품을 차지한 게 아닐까, 하는 생생한 의심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혐오 어린 눈빛이 떠오르며, 그 눈빛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게 됐다.
* * *
“숙면에 도움 되는 차를 가지고 와 봤어요.”
식사를 끝낸 뒤 침실로 돌아오자, 사하는 잔 하나를 내밀었다. 엘제가 고개를 꾸벅이며 잔을 받자, 사하는 그녀의 약지를 스치듯 살펴보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사하의 혼란스러워하는 시선을 꿋꿋하게 감당했다. 식사 시간 동안 골똘히 생각해 보니 반지가 없다는 사실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반지가 없는 모습이 당연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황궁에 도착하기 전, 그가 진즉 제게 물어봤어야 했다.
“이만 나가 볼게요. 푹 쉬세요, 엘제 님.”
사하는 저녁에 했던 이야기를 도로 주워 담고 싶은지 입가를 문지르며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엘제는 탁자 위, 화병에 담긴 꽃을 한참 만지작댔다. 그러고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잎 하나를 따다가 열심히 손을 놀렸다.
부지런한 손이 잎사귀의 가장자리를 뜯어 내자 앙상한 줄기가 드러났고, 줄기의 양쪽 부분을 매듭지으니 작은 풀 반지 하나가 완성됐다. 그렇게 또다시 한참 풀 반지를 만지작대던 그녀는 초조하게 침실을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시간이 가혹하게 느껴질 만큼 더디게 흘렀다. 결국 침실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그를 기다리며 불안을 다스리려 애썼다.
‘……다른 여인이랑 착각했을 리가 없어. 확실해.’
그는 신하들을 대할 때와 달리, 자신에겐 기꺼이 몸을 낮추고 눈을 마주했다. 만약 자신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내 얼굴을 마주한 그가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조금씩 위태로워졌다. 위태로운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수록 더욱 깊은 잠이 몰려왔다. 침실 문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상체가 뒤로 기우뚱하며 넘어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을 단단하게 받치는 다리가 느껴졌다. 그녀는 잠이 묻어나오는 눈을 겨우겨우 떴다.
“안쓰럽게 보이려 마음먹었나 보군.”
동요의 기색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켈타가 느긋하게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엘제는 그의 다리에 기댄 채 그를 멍하니 보고 또 보았다. 잔잔한 시선을 차분하게 더듬을수록 아까까지 요동치던 불안이 잠잠해졌다.
“네가 이렇게 있어 봤자…….”
그가 주는 안온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엘제는 저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순간 강렬한 맥박이 온몸을 덮쳤다. 그의 것인지 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의 맥박을 함께 나누는 듯한 느낌은 어느새 기이한 안정감으로 변했다. 그에게서 제 몸을 떨어트릴 수 없게 만들었고, 아늑한 품을 더욱 파고들게 했다.
그녀가 그의 목에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켈타는 목에 단단히 힘을 싣다가도 끝내 허탈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한동안 두 사람은 똑같이 움직임을 멈추고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
“……갈수록 날 다루는 게 못돼져.”
그가 마치 자신은 그녀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력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제 새끼를 보듬듯이 그녀의 등줄기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안긴 자세 그대로 침대에 앉은 엘제는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을 가만히 느꼈다. 안도감을 조금 더 확실하게 느끼고 싶어서 고개를 비틀어 그를 눈에 담았다. 그는 얼굴에 음영을 드리운 채 한참 다른 곳을 보고 있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가 주고 싶지만, 네 안전에 관한 일이라 그럴 수가 없어. 네가 질 책임에 대해 생각해 둔 게 있기도 하고.”
엘제가 잠시 멀뚱하게 눈을 깜빡이다 탄식했다. 사하의 말에 정신이 팔려 정작 중요한 그의 말은 무책임하게 잊고 있었다. 저절로 뜨끔하자, 그가 고개를 내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고민은 해 봤나?”
제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당황한 그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피했다.
켈타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밀착된 상체를 뒤로 물려 그녀가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 냈다.
따뜻함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엘제는 무심결에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다가도 쭈뼛쭈뼛 허리를 세웠다. 오늘 일에 대한 답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표현하는 척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양심이 콕콕 찔려서인지 제 손가락에 닿는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느껴졌다.
“천천히 표현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까.”
그가 왠지 시들한 음성으로 말했다. 뜻밖에 생겨난 여유에 그녀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선 그의 말을 잊고 있었단 사실을 지금이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저지른 잘못을 외면하고 있었단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자신에게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뭐라도 답해야 하는데…….’
스스로 다그칠수록 생각이 더욱 떠오르지 않아 초조해졌다. 엘제가 불안한 듯 그를 힐끔거리며 이마를 문질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는지 빠르게 흘렀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는 정말 답을 해야 한단 사실이었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말을 미룬 채, 반지에 대해 생각하며 버린 시간이 아까워져 무심코 탁자 위에 있는 풀 반지를 스쳐보았다.
“……반지?”
그녀의 짧은 눈길을 놓치지 않은 켈타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팔을 뻗어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그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 반지가 내내 고민하고 내린 결론인가?”
우물쭈물 뜸을 들이던 엘제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준 시간마저 허투루 쓴 멍청함을 그의 앞에서 인정하기 싫어선지, 저 반지라도 있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반지를 만지작대던 켈타는 얼굴에 서리려는 웃음을 억지로 지우듯이 눈가를 어색하게 찌푸렸다. 그러고는 떫은 걸 씹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로선 짐작도 못 하겠군.”
그의 말씨가 풀 반지를 건넨 제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것 같아 얼굴이 심하게 붉어졌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것보다, 초라한 걸 생각 없이 건네준 행동이 도리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반지를 향해 다급하게 팔을 뻗자, 그가 지그시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얇은 손가락을 더듬어 내려가며 물었다.
“오늘, 네 행동에 대한 대가치고는 내게 과분한 것 같지 않아?”
그녀는 언제 부끄러웠냐 싶게 눈을 땡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답을 끈질기게 요구하는 시선에 엘제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고개를 뻔뻔하게 끄덕이는 건 차마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어떤 집념을 담더니 예리하게 빛을 냈다.
“그래……. 그럼, 내가 지금 말하는 책임과 반지 중 네가 선택해.”
책임과 반지로 위장한 그의 속셈을 읽을 수가 없었던 그녀가 경계 섞인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 네가 황후로서 짊어질 책임이야.”
켈타는 그런 소리를 정말 간단하게 했다. 너무 간단명료해서 정신이 얼얼했다.
엘제가 귀를 의심하며 멍하게 있다가, 그의 진솔한 얼굴을 확인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책임져야 할 자리가 생긴다면, 오늘과 같은 위험한 행동은 함부로 못 할 거야. 물론, 주변 신하들이 그런 네 행동을 마냥 두고 볼 리도 없을 테고.”
일순 그의 호흡이 단칼에 베이듯이 뚝 끊겼다. 켈타가 한층 고요해진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자신의 목소리를 새기려는 듯이 그녀의 귀를 만지며 말했다.
“무엇보다 그때쯤이면 이곳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침실이란 것 정도는 네가 확실히 알게 되겠지.”
너그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그가 자신이 오늘 저지른 잘못을 너그럽게 봐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태도는 그가 분노할 때보다도 더 큰 당혹감을 주었다.
뒤로 몸을 물린 엘제가 그의 말들을 차분하게 곱씹으며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가장 먼저 마주한 황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와장창 깨부쉈다. 천한 신분의 자신이 그런 자리에 앉는다고 생각하자, 고귀한 자리를 모욕하는 듯한 불결함이 들었다. 그런 감정 탓에 머릿속이 꽉 막혀 버렸다. 결국 생각을 포기했고, 그의 말들을 부정하려 했다.
그녀가 애원에 가까운 감정을 눈에 담은 채 고개를 저었다. 더듬거리며 그의 손에 있는 풀 반지를 쥐려 들었다. 그러자 반지를 순순히 내어 준 켈타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살갗을 쓸어내렸다.
투박한 손끝이 얼굴과 목덜미를 오랫동안 섬세하게 오르내리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엘제가 숨을 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
“……네가 반지를 원한다면, 난 네 약지에 끼울 생각이야. 그때부턴 네가 후회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어.”
이제껏 아무런 뜻도 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어떤 열기로 타고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한 그녀는 반지를 도로 내어 주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어느새 미끄러져 내려온 손이 허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뜨거운 기운으로 덮었다. 황후라는 자리를 들었을 때와는 궤를 달리하는 두려움에 등줄기가 쭈뼛 섰다.
‘……이상해.’
황후와 그의 아내는 분명 같은 말이지 않은가. 아까와 달리 그의 숨에서 야릇한 체취가 느껴져 혼란스러웠다.
슬금슬금 멀어지자, 켈타가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녀의 턱을 받치어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눈에 숨겨진 열망을 보고 말았다.
그의 입김이 가까이 닿을 때마다 본능적으로 가빠지는 숨이 무서워 어떻게든 지금 상황에서 비켜서고 싶었다. 애써 침착하게 허리를 감싼 팔을 떼어 내고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글을 적었다.
<다를 게…….>
엘제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오늘 글을 처음 배운 사람이 문장을 적는 게 가능한 건가. 어떤 행동도 보이지 못하고 굳어 있는데, 단호한 음성이 들렸다.
“달라. 권력과 나. 둘 중 네가 원하는 걸 손에 쥐라는 말이잖아.”
켈타는 그녀가 답하기 전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그녀를 감싼 팔에 힘을 실었다.
엘제가 한참 주춤거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허리를 단단히 감은 팔이 물러나 줬으면 싶기도 하고, 더욱 끌어안아 줬으면 싶기도 한 혼란에 사로잡혔다.
따뜻해서 마냥 좋았던 품이 지금은 아슬하기만 했다. 그의 품에서 찾던 편안함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자 정말로 벌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함부로 사라지는 게 아니었어.’
이런 가혹한 벌을 받을 정도로 그를 화나게 할 줄은 몰랐었다. 잔뜩 움츠러든 그녀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켈타가 금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그러고는 조금 불그스름해진 그녀의 눈가를 입술로 훑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날 택한다면, 난 네 몫까지 뭐든 책임질 거야.”
뭐든 책임지겠다는 말에 엘제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한동안 손을 꼼지락대며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켈타가 반지를 쥔 채 그녀의 손을 끌어오자, 엘제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은 반지가 아니라 그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니 황후와 그의 아내로서의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오늘 제가 저지른 잘못 탓에 마주하게 된 그러한 책임들까지도…… 그가 가져가 달라는 억지였다.
엘제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를 더욱 끌어안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제 모습을 그가 곱게 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매달리다시피 그를 안고 있는데, 예상한 날카로운 말과 반대되는 말이 들렸다.
“잘했어, 엘제.”
엘제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제 뜻대로 상황이 풀렸는데, 순순히 물러나 주는 그의 모습 때문인지 오히려 그의 뜻대로 상황이 풀린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한 선택, 절대로 잊지 마.”
켈타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며 여린 목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내리누르고 문지르자, 쾌감인지 아픔인지 모를 짜릿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잘게 몸을 떨며 위태롭게 있다가 허리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 팔에 몸을 맡기고 힘을 풀었다.
아까까지 몰아친 상황 탓에 진이 다 빠졌다. 그렇게 한동안 뜨거운 물 위를 부유하는 느낌을 받아 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며칠 동안 비가 온종일 쏟아지듯 내렸다. 어찌나 매섭게 내리는지, 정원이 굵은 빗방울이 아니라 안개로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가끔 보면 큰바람이 불기 전, 산에 펼쳐지는 하얀 기운 같기도 했다.
엘제가 두르고 있는 숄을 꼼꼼히 여미며 의자에 앉았다. 가을밤이 부쩍 추워졌다. 겨울처럼 오들오들 떨 정도는 아니었지만, 추위를 잘 타는 체질 탓인지 쌉싸름한 가을 추위에도 콧등이 엷게 붉어지곤 했다. 코를 살살 문지르다가 창밖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접시처럼 동그랗던 달이 날이 갈수록 크기가 줄고 있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으스스해졌다.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필사하면 힘드실 것 같아 짧은 글들로 가져와 봤어요.”
사하가 손에 쥔 양피지를 테이블에 내밀었다. 창에서 시선을 거둔 엘제는 고개를 꾸벅이며 깃펜을 쥐었다.
그녀는 요즘 들어 밤늦게까지 글 연습을 하며 날을 보냈다. 글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면서 최대한 빨리 글을 쓸 방법은, 노력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매일, 밤늦게까지 정무를 보고 온 켈타는 깨어 있는 그녀를 보면 피로가 가신 얼굴로 웃곤 했다. 그 얼굴이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자국처럼 남겨 어느 순간부터 그를 기다리는 게 그녀의 일상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불러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엘제는 테이블에 놓인 양피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묘한 표정으로 양피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키텐 찬가라는 짧은 시였다. 말 그대로 수도인 아키텐을 찬미하는 내용이었다.
도시의 건물과 자연에 관한 설명들이 있었지만, 그중 눈길을 끈 건 시문에 관한 내용과 양피지 뒤편에 있는 도시 조감도였다. 아쉬운 점은 시문의 위치까지 세세하게 조감도에 그려져 있진 않았다.
‘……시문이 11개.’
만에 하나 정말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도시 조감도를 양피지에 베껴 그린 뒤, 황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시문을 추측해 보려 했다.
수도 아키텐은 아래쪽이 더 큰 땅콩 모양으로 성곽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그란 원형이었다면 거리를 규칙적으로 띄워 문을 설치했을 텐데……. 저런 모양이니 좀처럼 시문이 위치한 구역을 추측하기 힘들었다.
한동안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켈타를 확인한 그녀는 자신이 그린 조감도를 양피지 더미 사이에 재빨리 끼워 넣었다.
문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그의 안아 들려는 행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더니 깃펜을 쥔 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티 나게 보여 주었다.
“쉬엄쉬엄해.”
켈타가 침대에 앉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엘제는 글을 쓰는 척하는 데에만 몰두하며 생각에 잠겼다. 근 2주를 이러고 있었는데, 이제 짧은 문장 정도는 수월하게 적을 수 있는 시기가 됐지 않나……. 어릴 적 글을 배웠을 땐 나이가 어렸던 터라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게 아니었을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심란하게 입가를 문지르고 있는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엘제,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