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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했더니 괴담이 돼 버렸다 1권
지은이│설탕후루
펴낸곳│로즈엔
투고메일│editor@ridi.com
ⓒ 설탕후루,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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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를 소환하는 방법]
[□에 선 □여
□□□자의 □□로 땅을 더럽혀라
너의 □ □린 손으로 원을 그려라
감읍하여 □을 앙망하라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영글게 하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맺게 할지니
□□하며 □□하라
땅을 돌아 지상에 강림할 □□의 □□를 맞이하라]
야옹.
***
로한슨 백작가의 무남독녀 에반젤린 로한슨이 죽었다.
대외적으로는 병사라고 알려졌었으나, 로한슨 백작가에서 근무하는 고용인들만큼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나무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던 창백한 발을 잊지 못했다.
그날 벚꽃이 얼마나 붉고 아름답게 피어났던지 아직 코끝에 탐스러운 향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아니면 흰 백합 대신에 관에 가득 채워진 벚꽃 때문인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돌아서 좋을 것 없는 사인 때문인지 장례는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별관에서 식을 마치면 신전에 안치하는 대신 후원의 한쪽에 비석을 세울 예정이었다. 신전에서는 자살한 사람을 안치해 주지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백작의 자식 사랑을 추켜세우며 애도를 표했다.
장례식은 조촐했다.
모름지기 귀족의 장례라면 가는 길마저 화려하고 웅장하기 마련이나 에반젤린의 식은 귀족 가문 아가씨의 장례라기엔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
병이 옮을 수 있다는 걸 빌미로 귀족들의 조문을 거절해서인지 자리를 채운 건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과 기사 몇이 전부였다.
빈객이 많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장례식인데도 아무도 고인을 위해 울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장내를 감돌았다.
그나마 신관이 읊는 기도문이 음습함을 환기했다.
장례를 주관하는 건 그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관이다. 기도문을 읊는 모습과 새하얀 정복은 신실해 보이긴 했으나, 진정 명예를 아는 자였다면 금화를 빌미로 이 자리에 함께하지도 않았을 거다.
신관의 기도가 끝나면 식순도 거의 마무리된다. 이제 관을 덮고 미리 파 놓은 구멍에 시체를 안치하기만 하면 됐다.
미리 관을 옮기라고 언질 받은 하인 몇이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적막만이 감도는 식장 안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자신의 권위를 끔찍하게 챙기는 신관이 헛기침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계속 기도를 이어 가려 했으나 소란은 더욱 심해졌다.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기름칠 되지 않은 무언가가 뼈를 부딪치며 움직이는 소리, 나무가 삐걱거리는 소리. 작고 작은 소음들이 한곳에 뭉치더니 결국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할 즈음 참다못한 신관이 기도를 멈추고 눈을 떴다.
그리고 신관은 사람들이 그토록 동요하던 원인과 마주했다.
새하얗게 센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릿결은 실타래보다는 어쩐지 거미줄을 한데 모아 길게 뽑아내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열린 눈꺼풀 뒤로 새빨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루비 같은 보석보다는 생물의 심장을 연상시키는 색채였다.
피를 응축해 놓은 붉은 눈만 빼면 새하얗기 짝이 없었다. 검은 상복 사이에서 혼자 흰 드레스를 입고 있으니 세상과 유리된 이면의 존재를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조용하고 차가웠으며 창백했다.
신관은 자신이 처음 들었던 작은 소음이 왜 유독 크게 들렸는지 깨달았다. 관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신관은 마음속으로 신을 부르짖으며 기도문을 읊었다.
안타깝게도 효능은 없었다.
되살아난 시체는 이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을 굽히는 것부터 시작해 주먹을 쥐어 보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꼭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익숙하지 않은 몸을 다루는 것 같았다.
그것은 천장에서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바라보더니 이내 식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 시선에 마주친 사람들은 몸을 흠칫거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멈췄다.
그 시선이 마침내 신관에게 닿자 그는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십분 이해했다. 마치 인간의 눈을 박아 넣은 명화와 목도한 듯했다. 심지어 그림의 눈이 움직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존재해서도, 일어나서도 안 될 불길한 것의 눈에 담겼으니 차라리 혀를 씹거나 스스로 목을 졸라 버려서라도 도망치는 편이 나았다.
차라리 명화가 화폭에서 걸어 나왔다거나, 혼을 갈아서 섬세하게 조각해 낸 조각상이 인간 행세를 한다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저것과 비교하면 인형술사의 실에 매여 있는 꼭두각시 인형이 차라리 더 살아 있는 것에 가까웠다.
“…내 이름이 뭐지?”
마침내 그것이 입에서 인간의 말까지 토해 내고야 말았다.
에반젤린 로한슨의 몸을 차지한 그것이 새로운 몸에 적응을 끝마치고 몹시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나는 아무래도 빙의한 것 같다.
눈을 떴더니 가장 먼저 보인 건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였다. 참고로 매우 비싸 보였다. 샹들리에의 가격을 가늠해 보면서 내가 어쩌다 죽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려 봤다.
원체 몸이 건강했던지라 병사는 아니다. 아직 취업도 하지 않아서 과로사도 아니고, 동물이나 아이를 구하다 차에 대신 치이지도 않았다. 신도 만난 적 없고 수상한 점술가도 안 만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자다 빙의한 것 같았다.
아무리 요즘 빙의가 판을 친다지만 이렇게 무성의하게 빙의할 사람을 골라도 되는 건가? 뭐. 끝난 일이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미 빙의했는데 전생을 되짚어 봤자다. 중요한 건 내가 빙의한 이 몸이다.
빙의에 성의가 없어서 그런가? 원래 몸 주인의 기억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손을 보니 어린 나이 같지는 않은데…. 기왕이면 좀 어린 몸에 넣어 주면 덧나나? 몸 주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래도 기억 상실로 밀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하얗고 손도 고운 걸 보면 귀족이 분명한데 딱히 생각나는 캐릭터도 없다. 원래 이런 건 읽고 있던 책이나 가장 좋아하던 작품 속에 들어가는 게 정석이던가?
최애 작품 같은 건 없는 데다가 하필 내가 요즘 즐겨 읽던 건 천마가 회귀하던 무협이었다. 제일 최근에 읽어서 기억이 가장 생생했으나 샹들리에만 봐도 무협은 아니었다. 무협에 빙의했으면 나는 비명횡사했을 거니까 차라리 다행이다….
안 되겠다.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럴 땐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옆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저씨한테 뭐라도 물어봐야겠다. 입고 있는 옷이나 두툼한 경전을 들고 있는 게 꼭 사제 같았다. 병약한 캐릭터에 빙의한 설정이면 사제가 옆에 있어도 이상할 게 없지. 그 편이 기억 상실 테크를 타기 더 좋고.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디지? 쓱 주변을 한번 훑어봤다.
순간 식겁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거지? 어디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방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옷을 빼입고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나도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낯선 천장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여긴 침실도 아니었다. 바닥이 푹신해서 침대인 줄 알았지. 보니까 꽃이 가득 깔려 있다. 벚꽃? 아니면 매화인가? 어쩐지 어디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더라.
…잠깐. 내가 누운 곳이 뭔가 익숙한 형태인데….
이거 설마 관이야? 나 관에 누워 있던 건가? 그럼 설마 지금 장례식 중인 건가? 사람들이 다 검은 옷을 입은 것도 그것 때문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은 사람 몸에 빙의하는 게 드문 건 아니다. 원래 잘 살던 몸에 빙의하면 보던 독자들도 원래 몸 주인을 불쌍히 여기니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을 운명이거나 이미 죽은 애 몸에 빙의시키는 전개가 자주 보이곤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장례 치르는 중에 빙의 되면 어쩌자는 거지?
어쩐지 사람들이 나를 귀신 보듯 보더라!
적어도 죽고 바로 빙의시켰어야 할 것 아니냐고! 이 정도로 무성의하니까 일관성마저 없어 보였다.
내 옆에 있는 사제 아저씨는 이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사제 아저씨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시체가 되살아난 거 아니냐고.
이거 뭔가 수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 말하지? 짜잔, 죽은 줄 알았죠? 깜짝 카메라였습니다? 몰라. 대충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 아차, 다른 말을 하기 전에 꼭 이 말부터 해야지.
“내 이름이 뭐지?”
참고로 귀족에 빙의한 게 분명하니까 존댓말은 생략했다.
***
내가 빙의한 몸 이름은 에반젤린 로한슨이다.
응. 역시 누군지 모르겠다.
벌써 빙의한 지 이틀이 지났다. 첫날에는 신관이랑 의사한테 붙잡혀 시달렸고 둘째 날은 에반젤린과 이 세계의 정보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뒀다.
추론하건대 이건 악녀 빙의물이다.
고용인들이 나만 보면 고개를 숙이고 말을 걸면 벌벌 떨고, 심지어 산책 가다가 날 보고 졸도하는 사람까지 봤다. 좀 어린 하녀는 나보고 살려 달라고 빌다가 입이 막혀 연행당하기까지 했다. 원래 몸 주인이 얼마나 악독했으면 애가 저럴까. 좀 착하게 살지.
게다가 에반젤린은 빨간 눈이었다.
로판 세계관에서 빨간 눈을 가질 수 있는 건 좀 더러운 성향의 사람들뿐이다. 대체로 불길한 색이라고 여겨져 학대당하고 기피당하다 원작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이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난 예쁜 것 같은데.’ 따위의 위로를 받고 금사빠 수준으로 뻑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로한슨 백작가의 외동딸이다. 엄마는 어려서 별세하고 구성원은 아버지랑 딸이 끝. 부녀 사이는 별로 좋지 않은지 빙의한 지 이틀이 넘어가는데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딸이 죽었다 살아난 상황인데도 보러 오지 않다니, 악녀 아빠는 쓰레기거나 팔불출이거나 극과 극으로 나뉘는데 하필 전자였다.
그것 말고는 모르겠다.
약혼자도 없고, 보통 로판은 황태자가 남주니까 제일 먼저 그쪽부터 알아봤는데 이 세계의 황태자는 이미 중년이고 애가 둘이나 있었다. 북부 대공도 없고 성녀도 성자도 없었다.
사실 이것도 하녀한테 물어본 것만 주워들은 정도였다.
일기장이라도 있을까 해서 방을 뒤져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찾았어도 못 읽었을 거다. 난 문맹이 돼 버렸으니까.
글을 못 읽는다니 뭐 이런 무성의한 빙의가 다 있냐?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면서 글자는 모르는 게 말이 되나? 글을 모르니까 도서관에 가서 정보 수집 같은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빙의 전에도 해 본 적 없는 제2 외국어를 공부하게 생겼다.
하녀한테 글자를 못 읽겠다고 하니 얼마나 당황하던지. 동공 지진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그래도 기억 상실이란 좋은 변명이 있어서인지 글자 책을 사 오겠다고 했다.
책은 내일 올 테니 오늘 하루는 집 탐방이다!
‘다 털어 버리자!’
어제 못 찾은 일기장이 나올지도 모른다. 에반젤린 방은 다 뒤졌으니까 다른 방들을 뒤져 보자.
여기는 화장실이고, 여기는 욕실이고, 여기는 응접실이고, 아! 여기다!
문이 뻑뻑해서 열기 힘들긴 했는데, 창고로 보이는 방이었다. 천이 덮인 물건들도 있고 종이가 아닌 나무 상자에 잡화들이 담겨 있었다. 와… 여기는 이사 갈 때 어떻게 가냐?
천에 덮인 것들은 다 그림이었다. 찾다 보니 물감들도 있던데 에반젤린이 그림 그리는 취미가 있었나 보다. 책꽂이도 있는 걸 보니 화실 겸 독서실인 듯싶었다. 어쩐지 커튼이 쳐져 있더라고.
그림은 뒤로하고 책들을 살펴봤다. 글자는 못 읽지만 일기는 직접 쓴 거니까 태가 날 거 아니야. 그러다가 월척을 낚았다! 표지가 새까만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이건 손수 쓴 게 분명했다. 잉크가 묻어 번진 흔적까지 있었다. 위에 숫자 써진 걸 보니 백 퍼센트였다.
대충 훅훅 페이지를 넘겨 보다가 이상한 게 툭 떨어졌다. 무슨 쪽지인가? 종이를 주워 들었다.
‘소환진?’
원형에 기하학적인 무늬. 이건 백 퍼센트 소환진이다! 미친 일기장에서 소환진이 나왔어!
이걸 보니 내가 빙의한 곳은 아무래도 연식이 좀 있는 소설인 것 같았다. 요즘은 인외랑 계약 잘 안 하거든.
고민은 안 했다. 소환진을 그려야겠다. 정령이 나오든 드래곤이 나오든 일단 그려야 한다. 악녀는 자기 몸 지킬 능력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마침 물감이 있었다. 빈 캔버스는 없고 적당한 종이도 안 보이길래 바닥에 그리기로 했다. 원래 이런 건 다 바닥에 그리더라고.
혹시 그리다가 물감이 떨어질까 싶어서 제일 양이 많은 빨간 물감을 쓰기로 했다. 붓이 다 굳어서 안 휘어지길래 그냥 손가락에 물감을 묻혔다.
먼저 크게 원을 그리고, 삼각형에 별에… 글자도 가득하다. 열심히 그리다가 나무 바닥에 손이 찔렸다. 다행히 가시는 안 박혔는데 피가 났다. 이게 뭐라고 더럽게 아프길래 나머지는 그냥 딱딱하게 굳은 붓으로 그렸다. 불편했어도 그릴 만했다. 진작에 이걸로 할걸.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까.
‘완성했다!’
좀 찌그러지고 이상한 감이 있었지만 다 그렸다! 소설처럼 당장 뭐가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변화가 생길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안 생겼다. 역시 그림을 다 그리고 주문을 외워야 하나? 종이에 그려진 화려한 소환진 아래 주문이 적혀 있기는 한데…. 그러면 뭐 해. 내가 못 읽는데!
그린 게 아까우니 대충 아무 말이나 지껄여 봐야겠다.
“정령왕님? 정령님? 드래곤님? 저기요…?”
아무 일도 없었다.
“저기… 뭔가 계약하고 싶은데 아무나 나와 주실 분?”
구질구질하게 매달려 봤자였다. 역시 주문을 외워야 할 것 같았다. 글자 먼저 익히고 재도전해야겠다. 문맹은 소환도 못 한다니 뭐 이런 거지 같은 세상이 다 있냐.
***
로한슨 백작은 눈앞의 하녀를 내려다봤다.
죄인도 아닌데 데이지는 눈을 감고 벌벌 떨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눈앞의 로한슨 백작이 고용인에게 그렇게 매정하지 않은 고용주라는 걸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은 모양새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데이지는 지난 이틀 동안 그 에반젤린 영애의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들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든 겉모습만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니 로한슨 백작에게서 영애의 파편을 엿봤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로한슨 백작은 하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눈앞의 데이지는 죽은 딸애와 신분을 막론하고 절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고 그래서 ‘그것’의 시중에 선뜻 자원해 줬기 때문이다. 로한슨 백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것이 뭘 하던가.”
“에반젤린 아가씨에 관해 물어봤어요. 나이는 몇 살인지, 가족 관계는 어떤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자주 하던 행동 같은 게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진짜 아가씨가 된 것처럼 굴어요. 아가씨가 8시에 산책하러 나간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러겠대요. 아가씨 옷을 꺼내 입고 걷는데….”
주근깨가 박힌 귀여운 인상이 일그러졌다. 꼭 감고 있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데이지가 신부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것처럼 토하듯 말했다.
악에 받친 고함이 점점 죽어 나가 흐려졌다. ‘그건 마치 에반젤린 아가씨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뒷말을 다 잇지 못한 건 자신이 너무 감정적이었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 누구보다 그걸 끔찍하게 여기는 건 에반젤린의 아버지인 로한슨 백작일 테니까.
“자길 본 하녀들이 기절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어요.”
그뿐일까. 데이지는 입이 막혀 연행당하는 하녀를 보던 에반젤린 영애를 떠올렸다. 살려 달라고 그렇게 처절하게 외치는데 그걸 보는 붉은 눈에 깃든 감정은 분명 혐오였다. 길가에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는 듯한 멸시가 서려 있었다.
데이지가 아는 에반젤린 아가씨는 그렇지 않았다. 그 유약한 소녀는 스스로 병들지언정 남에겐 험한 말 하나 못 꺼냈다. 아가씨가 되고 싶었다면 사람을 그렇게 경멸하듯 바라봐선 안 됐다. 그렇게 보지 말라고. 데이지는 시선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그건, 그 눈은 아직도 나를 보고 있을까?
“그러다가 갑자기 글자를 배우고 싶다고 하셨어요.”
“글자?”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말했다.
“기억 상실이라 글자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사 와 달라고 했어요.”
데이지는 그것의 시중을 들기로 약속했기에 책을 사러 갈 수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고 그냥 말만 전달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그 잠깐 사이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가씨의 몸을 가지고 어디로 도망친 건가 싶어 4층을 전부 뒤졌다. 그리고 맨 끝방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말았다. 아가씨가 아무에게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던 방이었다. 열쇠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두고 있던 참이었다. 잠겨 있던데 어떻게 열었을까에 대해 잠깐 의문이 들었다.
아주 작게 문틈이 벌어져 있었다. 더 열면 소리가 나겠지. 그럼 데이지도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거다. 숨을 죽이고 문틈 사이로 방 안을 훔쳐봤다. 그것은 분명 책을 들고 있었다.
“글자를 모르니 책을 사 와 달라고 말한 건 저를 떼어 놓으려고 한 거짓말이 분명해요. 다시 돌아갔을 때 책 읽는 걸 봤거든요. 그리고, 그리고….”
이 이후의 일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잊고 싶은데 그럴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어요. 그 피로 바닥에 문양을 그렸나 봐요.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지는 그림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