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바람에 기울지 않고 3권
지은이 ∥ 화서
펴낸곳 ∥ 카멜리아
발행일 ∥ 2025년 02월 14일
문의 ∥ junelm4@naver.com
ISBN ∥ 979-11-6926-584-3
정가 ∥ 4,000원
ⓒ 화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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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目次

달은 바람에 기울지 않고
十一.
十二.
十三.
十四.
十五.
十六.
十七.
十八.
十九.
二十.
二十一.
후일담
一.
二.
三.

일러두기
※본 도서는 가상 시대물로 실존 인물 혹은 역사적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용에 참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달은 바람에기울지 않고



十一.




유난히 긴 하루였다. 피곤이 바늘처럼 몰려들어 오히려 신경이 예민해졌다. 무원은 아주 잠깐 망설이다 술을 들이도록 명했다.
침의로 갈아입은 그는 탁자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정 속에서 다른 것은 단 하나, 서윤우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뿐인데도 마치 시간을 한껏 잡아 늘인 것처럼 매 순간이 느리게 흘렀고 그 틈을 메우는 건 어김없이 서윤우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멍하니 벌어진 젖은 입술. 흔들릴지언정 단 한 명만 담고 있었던 그 눈. 술잔을 든 무원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는 가득 채운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일과 중에는 애써 내쳤던 상념들이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생각할수록 목이 말랐다. 그럼에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술병은 꾸준히 줄어들기만 했다.
고작 마음 하나 똑바로 바라본 것만으로 정무를 성가시게 느낀 한심함은 차치하고, 서윤우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황제가 가까이해서는 안 될 역적 노예다. 다만 본인은 죄가 없으며 이미 스스로 하기에 따라 면천할 기회를 얻은 상태였다.
덕원을 일으켜 세운다면.
무원의 목울대가 무겁게 오르내렸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한층 독하게 느껴졌다. 서윤우를 곁에 두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자신이 살린 환자가 처형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는 그를 멀리할 수는 없었다.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인 침궁에 두고 무엇을 하는지 훤히 알면서도 궁금해서 방금 읽었던 글줄을 또 한 번 읽는 마당이다.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서윤우는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덕원의 일이며 역당이며 아직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지금 너는 내게 수단이 아니라 대상이다.
무원의 입술이 희미하게 비틀렸다. 영산에서 그 말을 한 이후로 하세월이 흐른 기분이었다. 여전히 대상은 대상이건만. 이제는 다른 백성과 서윤우를 두고 포기의 무게가 같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지금 쓰고 있지 않은 황제의 관이 머리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는 술잔으로 입을 축였다. 그때 바깥문이 여닫히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태감이려나. 온 김에 술을 한 병 더 내오라고 할까 싶어 그는 반쯤 빈 술병의 무게를 가늠했다.
“폐하.”
그의 손이 허공에 뜬 채 멎었다.
“약제감입니다. 청컨대 입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무원은 술병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들라.”
간격을 두고 문이 열렸다.
무원은 소리 없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차분한 걸음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서윤우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 때문에 잠시 밀려났던 어젯밤의 기억이 그의 호흡을 방해했다. 서윤우는 이쪽을 살피는 듯하다가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눈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불쑥 치솟았다. 무원은 매끄러운 턱 대신 술잔을 잡았다.
“휴식을 방해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일단 듣지.”
덕원의 차도가 달라졌는가 보다. 짐작한 무원은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금일은 다른 용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잠깐 서윤우를 외면했던 시선이 되돌아갔다. 무원은 그를 응시하며 확인했다.
“특별한 차도가 보여서는 아니다?”
“예. 폐하. 다른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듣겠다.”
이번엔 짚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덕원의 일 외에 굳이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올 만한 용건이라. 순간 간밤의 접문을 떠올리고 멈칫한 무원은 서윤우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 모습을 보았다.
깊이 조아리는 머리를 내려다보는 무원의 가슴 한편으로 한 줄기 한기가 스쳤다. 어쩐지 불길했다. 탁.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인은.”
서윤우가 한 마디 한 마디 눌러쓰듯 말했다.
“칠 년 전에 명하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습니다.”
무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 칠 년 전, 조금의 경계도 하지 않던 등 뒤에서 꽂힌 화살과도 같은 고백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쓸려 나갔다. 빈자리를 채우는 지난 기억들이 생생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황자 전하를 싫어하셨습니까?
―잉어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맡겨 주신 일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전부터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침착한 언동이나 우직한 책임감이며, 당돌함 같은 것이 그가 아는 명하와 겹친 적이 꽤 있었다. 설마 사실인가. 여태 코앞에 두고도 몰랐던 것이었을까. 서윤우가 명하라면 덕원의 일과 상관없이 은인으로서 곁에 둘 수…….
―서가의 삼남입니다.
무원의 숨이 멈추었다.
핏기가 가신 서진우의 시체가 그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시신에서 떨어졌던 옥패의 감촉이 움켜쥔 주먹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순간이나마 믿으려고 했다.
이미 죽은 명하를 두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도 눈을 감고.
……내 사정에 맞춰서.
현기증이 일었다. 무원은 눈을 힘주어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조아린 서윤우는 사라지지 않았다. 스스로 느낀 환멸만큼이나 서윤우를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 명하를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을. 지나간 과거로 잊으려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함부로 파헤쳐서 이용해도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탕, 무원은 탁자를 내리쳤다. 서윤우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게 있느냐.”
바깥문이 열렸다. 내관의 답이 넘어왔다.
“하명해 주십시오. 폐하.”
“모두 물러가라. 부르기 전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명 받들겠습니다.”
내관의 기척이 사라졌다. 무원은 서윤우를 뚫어질 듯 응시한 채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명했다.
“오십 보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무원은 밀군이 명대로 물러갔음을 알았다. 주변을 비우고도 무원은 한참 동안 서윤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너는 명하가 아니다. 나는 이미 알아. 너는 명하와 상관없어. 너는…….
네 이름은.
“서윤우.”
처음으로 불러 본 이름이었다.
지금에서야.
혀가 묵직했다. 이처럼 엉망진창인 와중에도 음미하고 싶어진다. 대체 얼마나 더 실망하려는지.
“다시 말해 봐라.”
이어진 목소리는 무감했다. 다행스럽게도.
“네가 누구라 했느냐.”
“……명하입니다.”
“그 명하가 누구냐.”
“칠 년 전, 태자이셨던 폐하께서 안성현의 산에서 독화살을 맞고 쓰러지신 것을 구했던 소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라고.”
서윤우가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당시의 일로 감히 은인이랍시고 나설 생각은 없습니다. 미천한 재주로 베푼 것이 있었어도 이미 그때 주신 영산의 약초로 그 이상을 받았습니다.”
“…….”
“소인은 그저, 소인이 명하라는 사실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알아주면.
그다음은 대체 무엇인데.
고집스럽게 우기는 서윤우에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어째서. 이해할 수 없어서 노여움은 더욱 커졌다. 죽은 형을 사칭하면서까지 나선 까닭이 무엇일까. 덕원을 회복시킬 자신이 없어서? 총애에 기대고 싶어서? 개소리라 치부한 헛소문이 보란 듯이 되돌아와 무원을 비웃었다. 왜 그 말을 믿지 않았던가.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건 왜인가. 너답지 않다니, 배신감이라니, 그딴 건 잘 아는 사람을 믿을 때나 가질 감정일 텐데. 내가 설마 너를. 너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안다고.
더구나 바로 어제 그는 감정에 못 이겨 서윤우를 입술부터 집어삼킬 뻔했다. 명백한 동요였다. 영리한 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기로 한 거라면 하필 오늘로 날을 잡은 것만은 납득이 가는 일이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 일이 고작 저열한 수작질의 기회일 뿐이었던가.
너에게는.
“……증거는.”
“없습니다.”
서윤우는 가증스러우리만치 침착했다.
“주셨던 옥패는 본가의 방에 두었습니다만, 그날…… 아마 망가졌거나 분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면 증거도 없이 이름만 대면 짐이 대뜸 반길 줄 알았더냐.”
무원은 비웃었다. 그래야 했다.
“그 이름이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소인을 제외하면 오로지 폐하께서만 알고 계실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딴 것은 얼마든지 주워들을 수 있지 않으냐.”
무원은 잇새로 내뱉듯 말했다. 마치 묻기만 하면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그 며칠을 낱낱이 고할 자신이라도 있는 듯한 서윤우의 당당한 태도가 무원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몸 안 어딘가가 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명하가 그만큼 제 아우에게 알려주었다는 뜻이 되니까. 자신은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고 묻었던 시간을, 그때의 소년은 한 살 아래 아우가 외울 만큼 말하고 또 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쁘게. 어쩌면 뿌듯하게.
“하오나 명하와 태자 전하만의 며칠입니다.”
서윤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말대로였기에 무원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너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냐. 그 얘기를 해 줬던 형이 죽은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는데.
“대체 다른 누가 알기에 얻어듣는단 말씀인지 소인은 감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
더 참지 못한 일갈이 터졌다.
서윤우는 입을 다물었다. 다만 수긍의 의미가 아님은 알 수 있었다.
무원은 들끓는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명하는 이미 한번 묻은 기억이었다. 이제 와 새삼 휘둘릴 필요는 없다. 명하의 존재를 따로 떼어 놓고 보자면, 상황은 단순했다. 한 걸음 밖에서 냉철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제삼자가 말한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