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바람에 기울지 않고 2권
지은이 ∥ 화서
펴낸곳 ∥ 카멜리아
발행일 ∥ 2025년 02월 14일
문의 ∥ junelm4@naver.com
ISBN ∥ 979-11-6926-583-6
정가 ∥ 3,600원
ⓒ 화서,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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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目次

달은 바람에 기울지 않고
四.
五.
六.
七.
八.
九.
十.

일러두기
※본 도서는 가상 시대물로 실존 인물 혹은 역사적 사건과 관계가 없습니다. 이용에 참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달은 바람에기울지 않고



四.




기름한 손가락이 탁자 위 깨끗한 천에 나란히 놓인 세 뿌리의 약초를 조심스레 건드렸다. 약초의 말린 정도를 가늠하는 손끝은 능숙하고도 세심했다. 고개를 끄덕인 윤우는 손을 떼고 오소초 위에 얇고 투명한 천을 덮었다.
“다른 약재를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살펴 다녀오십시오.”
윤우는 김 상궁의 배웅을 받으며 빈 자루를 들고 덕원의 방을 나왔다. 서두르는 그의 걸음걸이는 바르고 안정적이었다. 발목만이 아니라 다른 상처도 거의 나았다.
영산에 다녀온 지 며칠이 지났다.
그는 환궁하자마자 약을 짓고 싶었으나 오소초를 그늘에서 바짝 말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덕원의 상태가 또 나빠질까 조마조마했던 마음에 비해 윤우 자신의 움직임은 좋아졌다. 좋은 약을 쓴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하필 등을 다쳐서인지 황제는 따로 의관을 보내 주었는데 그의 방에 들른 사람은 무려 황제의 주치의인 태의였다. 윤우는 언감생심 사양할 생각조차 못 하고 진료를 받았다. 태의가 연고를 발라 줄 때마다 영산의 동굴이 자꾸만 생각나서 그는 혼자 난감해했다.
윤우가 가는 곳은 황궁의 서쪽에 모인 창고 구역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약재를 정리해 내의감으로 갈 때까지 보관하는 금약고도 그곳에 있었다. 내의감에 가서 받아 오는 방도도 있었지만, 이번에 필요한 약재 중 하나가 다방면으로 쓰임이 잦은 데다 대량으로 필요했다. 내의감에 충분한 양이 있을지 알 수 없고, 있어도 다 털어올지 모를 마당이니 바로 창고에서 가져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경 황궁의 구역은 크게 동서남북에 자리를 뜻하는 글자 ‘위’을 붙여 일명 동위?서위?남위?북위, 중앙으로 나뉜다. 나라를 대표하는 본궁 및 주요 관청들은 중앙에 위치하고 태자 및 황자들의 영역은 동위, 다른 관청들과 지방관의 숙소, 이국 사신 맞이는 남위, 황궁의 살림살이는 서위와 연결되었다. 북위에 대해서는 자세한 수치가 기밀이라 황궁 전체의 정확한 넓이는 아무도 모르지만, 동서남위와 중앙 사이는 거리가 똑같으며 중앙에서 각 문까지 서두름 없는 걸음으로 이각이 좀 넘는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침궁을 나와 황제의 사적 영역인 북위를 벗어나자마자 오가는 궁인들의 시선이 아닌 듯 따갑게 쏘아졌다. 윤우는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그는 덕원의 치료가 기밀에 해당하며 자신이 황제의 약제감으로 알려진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의심을 살 것도 듣자마자 알았다. 제국에서 탁월한 의원만 뽑혀 수십이 모인 내의감이 번듯이 있는데도 따로 데려온 약제감이라니. 그렇다고 황제의 침궁에 기거하고 수시로 약재를 가져가는 사람을 달리 뭐라고 할지, 스스로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긴 했다. 자신이 감수할 일이었다.
꾸준한 걸음 끝에 중앙과 남위를 잇는 넓은 길과 나란한 연못이 나왔다. 옹기종기 모인 전각 지붕들은 연못 너머에 있었다. 백로의 긴 목을 닮았다 하여 노호라 칭하는 이 길쭉한 연못은 서위와 그 외를 구분 짓는 경계이기도 했다. 실용성을 위해 다리를 놓으려 했지만, 이 연못에서 보는 일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국가 연회나 사신 접대에 자주 쓰이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는 얘기가 돌았다.
윤우는 연못을 빙 둘렀고 각진 돌을 틈 없이 짜 맞춘 긴 담장 옆을 지났다. 모퉁이를 돌아서 도착한 대문 앞은 험상궂고 어깨가 떡 벌어진 무관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붉은 술이 달린 창을 옆구리에 끼고 손을 긁고 있던 그는 윤우를 발견하고 얼른 창을 고쳐잡았다.
그에게 묵례한 윤우는 약제감인 것을 증명하는 나무패를 내보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활짝 열린 대문간을 넘기 전에, 긴 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못 들어간다. 돌아가.”
“약재가 필요해서 금약고에 가려고 합니다.”
“글쎄, 아무나 못 들어간다고. 금약고에 불이 나서 다른 창고들까지 전부 출입을 제한하는 중이다.”
“……언제 말입니까?”
“닷새 전에.”
그때라면 영산에 다녀오던 중이었다. 눈을 깜박이는 윤우에게 무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법 큰 불이었고 소문이 다 퍼졌는데 그것도 여태 몰랐나? 이거 역시 수상한 놈이네.”
무관은 황궁에서 더욱 눈에 띄는 윤우의 민복 차림을 훑었다. 황제의 부재는 극히 일부에게만 알려졌기 때문에 변명할 수가 없었다. 설명한대도 무관이 안 믿으면 그만이었다. 윤우는 나무패를 다시 꺼냈다.
“소인은 폐하의 약제감입니다.”
“그래? 나는 폐하의 무관이다.”
“…….”
“황궁에선 누구나 폐하의 수족이야. 내세울 걸 내세우시지.”
무관이 코웃음을 쳤다.
“내의감에 누가 새로 왔다는 얘기도 못 들었고, 내가 아는 건 여길 철통같이 잘 지키란 명뿐이다.”
“내의감 소속은 아닙니다. 하오나…….”
“내의감 의관이 아닌데 감히 폐하의 약을 짓는다고? 헛소리.”
“정말입니다. 내사성에, 아니 내의령께 직접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내가 왜? 더구나 그 양반이 눈 돌아가게 바쁜 거 궁에서 모르는 사람도 있나. 방해해서 경을 치라는 거냐?”
“그게 아니라……. 아니,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바로 나오겠습니다.”
“안 된다고!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무관은 난공불락이었다. 윤우는 막막해졌다. 벌써 두 손 놓고 흘려보낸 시일이 며칠이건만, 다시 쳐다본 무관은 눈을 부라렸다. 윤우는 주저하다가 물었다.
“저, 하오면 금약고 어디에 어느 정도로 불이 났는지만 좀 알려 주십시오.”
“……2층 서남쪽이 타고 나머지는 무사하다지.”
윤우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번에 왔던 기억을 돌이키면 그가 필요한 약재들은 전부 1층에 있었다. 설마 그 사이에 위치를 바꾸진 않았겠지. 불쑥 걱정이 일었지만 당장은 방도가 없었다. 윤우는 천천히 뒷걸음질하다 결국 돌아섰다.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신의 목적을 잘 아는 내의령이나 태의나, 고작 창고 출입으로 방해하기엔 너무나 바쁜 사람들이다. 해 볼 만한 일은 다 해 보는 게 먼저였다. 여길 지키는 무관이 한 명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교대하면 그때 다시 와 보기로 했다.
……그 다른 사람도 막으면 어쩌지.
불쑥 붙은 물음에 윤우의 걸음이 멈추었다. 교대한 사람이 호의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자세히는 몰라도 궁인들 사이에 자신의 소문이 그다지 좋지 않게 퍼진 참이었다. 오히려 더 심할지도 몰랐다. 머뭇거리던 윤우는 한 번만 더 사정해 보기로 하고 돌아섰다.
사정해서 안 될 때를 가정하는 머릿속이 바쁘게 굴렀다. 뇌물은 가진 게 없고 겁박도 역시 가진 게 없었다. 폭력은 당연히 이길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이용하느니 신분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낫다. 황제의 약제감이라고 신분패를 보였는데도 눈도 꿈쩍하지 않은 상대였다. 배짱인지 허세인지는 몰라도 웬만한 강제로는 통과할 수 없을 듯했다.
윤우가 고심하면서 모퉁이를 막 돌아섰을 때였다.
“……니네. 불난 지가 언젠데 정리가 여태 안 됐어.”
안에서 나온 관리 한 명이 불평했다. 의관의 복식을 알아본 윤우는 얼른 몸을 숨겼다. 내의감 의관들이 외부인인 자신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훼방을 놓을지언정 도와주진 않을 것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무관이 편안하게 말을 받았다. 계속 불평하는 의관의 태도도 꽤 친근해 보였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밤낮없이 질리도록 풀 냄새를 맡아서 머리가 아픈데 창고 정리까지 신경을 쓰자니 죽을 맛이네. 게다가 웃전에선 밖에서 사람을 데려왔다지, 허, 참! 내의감 체면이 말이 아니야.”
“아, 그 약제감이요.”
무관의 추임새가 자연스러웠다. 윤우는 고개를 슬쩍 빼고 이쪽으로 등을 보인 내관과, 마주 선 무관을 엿보았다. 말을 잇는 무관의 목소리가 한층 뻔뻔하게 들렸다.
“그러잖아도 아까 다녀갔습니다. 약재를 찾는다나요.”
“흥. 그럴싸하게 구는군. 실제로는 어떨지. 그래, 뭘 가져가던가?”
“모릅니다. 못 들어갔으니까요.”
의관이 눈을 끔벅이다가 크게 웃으며 무관의 등을 두드렸다.
“이 사람 보기만큼 배짱이 두둑하구먼!”
“그야, 수상하니까요. 달랑 나무패 하나 가지고 처음 보는 작자의 무얼 믿고 출입하게 해 준답니까. 어림도 없지요.”
“아주 믿음직하네. 그 불 난 밤에 자네가 번을 섰어야 했는데.”
의관이 금약고 방향을 보며 덧붙였다. 그 틈에 무관의 웃음이 일순 깨졌다가 어색하게 붙는 것은 윤우만 보았다.
윤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자네라면 금약고 2층에 마른풀밖에 없어서 불이 특히 잘 번질 걸 아니까 더 빨리 움직였겠지. 한데 번도 아닌데 거기 왜 있었나? 불을 같이 껐다며?”
“아니, 아닙니다. 불이 꺼진 다음이었고요.”
무관이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그게…… 뭘 좀 놓고 가서 잠깐 들렀던 겁니다.”
“아, 그랬군. 그런데 어쩌다 그리된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벽에 걸린 등불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잘 달려 있었다지 않은가.”
무관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조금 전보다 붉어진 안색이며 코를 긁적이는 손짓이 윤우의 주의를 끌었다. 생각에 빠져 팔짱을 낀 의관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누가 어슬렁거리거나, 그런 건 못 보았나?”
“아, 당연히 못 보았지요!”
무관이 돌연 목청을 높였다. 의관이 깜짝 놀랐고 윤우도 어깨를 무심코 움츠렸다. 무관이 얼굴이 벌게져서 성토했다.
“그날 번이 아니었다지 않았습니까? 불도 다 꺼진 다음에 왔다고요!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그냥 물어본 것인데.”
“모른다고 하는데도 자꾸 그러시면 탓하시는 거 같고, 의심받는 거 같지 않겠습니까?”
“아니, 자넬 탓하는 게 아니고, 하도 이상해서 그러지. 사람 참, 무슨 말을 못 하겠구먼. 마음 상하지 말게.”
의관이 무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입을 꾹 다무는 무관이 몰래 옷자락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본 윤우의 위화감이 한층 강해졌다. 마음속으로 한 가지 계산이 섰다. 아까 가진 패가 없다고 젖혀 뒀던 방도였다. 완전히 심증이긴 하지만…….
“난 이만 가네. 수고하게.”
“……살펴 가십시오.”
돌아서는 의관의 걸음이 퍽 잽쌌다. 다행히 의관은 윤우의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무관은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두꺼운 어깨가 축 내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 윤우는 마음을 정했다. 그는 무관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나리!”
“음, 응?”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저 꼭 갖고 가야 합니다!”
윤우는 무관의 오른팔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무관이 당황해서 주춤하는 틈을 타 윤우는 무관의 오른손 소매를 걷었다. 손바닥의 두 개의 작은 점과 주변의 푸른 멍, 긁은 흔적으로 더욱 붉게 일어난 두드러기가 눈에 띄었다. 윤우는 다짜고짜 맥을 짚었다. 짐작대로 빠르고 거센 맥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냐!”
무관이 윤우를 밀어냈다. 윤우는 순순히 손을 떼면서 방금 무관에게서 알게 된 것들을 돌이켰다.
―자네라면 금약고 2층에 마른풀밖에 없어서 불이 특히 잘 번질 걸 아니까
“지금 뭘…….”
무관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는 윤우를 보고 말문이 막힌 듯 말끝을 흐렸다. 그는 펄쩍 물러났지만, 윤우는 이미 그의 신발 끝을 보았다. 촛농이 눌어붙은 자국이 마지막 조각을 채우고 윤우의 머릿속 그림을 완성했다.
……그렇더라도 명확한 물증은 아니지만.
해 볼 만한 도박이었다. 성공하면 바로 해결하고 약재를 가져갈 수 있었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백안시당할 명분을 하나 가져다 바치는 정도였다.
어차피 사람은 미움받는다고 죽지 않으니까. 윤우는 느리게 무릎을 털고 일어섰다. 상대에 대한 반감도 그의 등을 밀었다. 정당한 이유를 가진 그를 방해한 건 고리타분할지언정 지켜야 할 원칙이 아니라 거부감 혹은 텃세라는 부당한 이유였다.
“지금부터는 혼잣말입니다.”
윤우는 무관과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금사라는 뱀이 있습니다. 이마가 높이 솟아 뿔 달린 뱀으로 알려졌는데 고아 먹으면 정력에 좋다는 속설이 있지요. 독사는 아니지만 물리면 상처에서부터 전신에 가려움증이 생기고 이것이 사람을 못 견디게 합니다.”
무관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특효약은 백만초인데 흔한 약재는 아닙니다만 금약고는 다르니까요. 2층 서남쪽 벽장 하단에 들어 있던 기억이 납니다. 같은 장에 비슷한 이름이 많기 때문에, 아마 밝지 않은 곳에서는 촛불이라도 켜서 정확하게 보지 않으면…….”
“그만!”
버럭 외친 무관이 제풀에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알고 내지른 참이었기에 윤우는 가만히 있었다. 다시 눈이 마주친 무관은 처음엔 시선을 비꼈다가 식식거리며 윤우를 노려보았다.
“증거가 있느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금약고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 잊을 테니까요.”
“…….”
“꼭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잠시 다른 곳을 보고 계셔 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무관은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는 윤우를 한 번 더 노려보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감사합니다.”
윤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의 앞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