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 전에 1권
지은이 ∥ 채밀
펴낸곳 ∥ 매그놀리아
발행일 ∥ 2025년 02월 13일
문의 ∥ junelm4@naver.com
ISBN ∥ 979-11-6926-576-8
정가 ∥ 3,400원
ⓒ 채밀,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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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CONTENTS

1장. 넬란
2장. 개화


1장. 넬란







해가 뜨고 있었다. 어느새 고개를 빼꼼 내민 햇빛은 어두운 방 안을 주홍색으로 물들였고, 남자는 옅은 빛에 의존하여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로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여쁜 것.
얼굴을 반쯤 가리며 쏟아진 푸른 머리카락, 긴 속눈썹과 오밀조밀한 붉은 입술까지,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머리가 아프도록 생각해도 한 가지 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모두 로아나를 천재라고 불렀다. 평민이 가질 수 없는 마력을 타고났다고, 천장을 뚫고 더 크게 될 아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마탑의 마법사로 시작한 로아나가 황실의 마법부인 넬란에 평민 최초로 들어가게 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넬란의 마법사들이 평민인 로아나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긴 했지만, 로아나의 삶에서 그 정도 멸시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는 저 대단한 귀족들이 언젠가 저를 우러러보게 하리라. 그만큼 높게 올라가리라. 로아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아, 아! 응! 으읏!”
하지만 높은 곳이라는 게 이런 뜻은 아니었다. 로아나는 그 대단한 귀족들을 이런 식으로 내려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발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소복이 쌓인 궁의 한편에서, 남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든 한 쌍의 남녀가 로아나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골반까지만 내린 바지 사이로 한껏 튀어나온 남자의 성기가 엉덩이를 높게 치켜올린 여자의 틈을 매섭게 들쑤셨고, 남자가 앞뒤로 힘껏 움직일 때마다 여자는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앞으로 쏟아지듯 무너지고 있었다.
“아, 흐읏! 레닌!”
“엉덩이 제대로 들어.”
그 모습을 보고 로아나는 해야 할 임무도 잊고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여기서 이렇게 남의 정사나 보고 있어야 하는 걸까.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자면, 시간은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들 집중해.”
오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고 지루한 하루였다.
로아나는 넬란에 입단한 후,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마도구만 밤낮없이 만들고 있었다.
평민인 로아나를 골탕 먹이려는 듯 아무런 교육도, 훈련도 없이 맡겨진 단순 작업은 재미없었지만, 넬란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걱정했던 황궁 생활도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황궁에 침입자가 발생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신이시여.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침입자라니요. 제 삶이 좀 더 순탄하게 흘러갈 수는 없는 걸까요.
로아나는 언젠가 큰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고 누구보다 빨리 승진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지만, 로아나가 바라던 시기는 지금이 아니었다.
아직 황궁의 길조차 제대로 모르는 로아나는 수색은커녕 사고나 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안전하시지만, 침입자 수색에 넬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넬란의 마법사들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저 여자는 네오 제칼린, 넬란의 모란이었다. 오른팔 완장에 새겨진 만개 직전의 붉은 꽃봉오리가 유독 돋보였다.
황궁의 마법부인 넬란의 직급 체계는 꽃의 이름을 따 모란, 난(蘭), 연(蓮), 유채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모란 중에서도 만개한 모란꽃을 완장에 달 수 있는 사람은 넬란의 단장이 유일했다.
넬란의 단장, 단 세그릭. 아직 로아나는 얼굴도 본 적 없는 소문만 무성한 남자였다. 바람을 주로 다루는데, 손짓 한 번에 마물 수십 마리가 죽어 버린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지금 단은 로아나와 가까워질 일이 없는, 저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로아나는 본인의 완장에 새겨진 노란 유채꽃이 괜히 부끄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침입자 셋 중 둘은 사살하였으니, 남은 하나는 생포하라는 명이시다.”
상황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도망간 침입자 하나를 생포하는 것. 로아나는 이런 상황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해 볼 만하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침입자를 잡으면 바로 승진하는 거 아니야? 막 황제 폐하 눈에도 들고 말이야. 승진해 하얀 연꽃 완장을 찬 본인의 모습을 떠올린 로아나의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로아나, 신입 단원들이 가장 사고를 많이 칠 때가 언젠지 알아?”
“네?”
그때 로아나의 옆에 서 있던 알폰이 상상의 나래에 빠진 로아나에게 말을 걸었다.
알폰 데칼마드. 넬란의 난. 로아나와 같은 연구실 소속은 아니었으나, 평민인 로아나를 유독 잘 챙겨 주는 고마운 선배 중 하나였다. 알폰이 눈을 장난스레 접고는 로아나를 보며 실실거렸다.
“바로 딱 이 시기에 수습하기도 어려운 사고들을 치고는 하지. 로아나 너, 아주 사고 치고 싶은 표정인데 조심해.”
로아나는 알폰의 말에 뜨끔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벌써 상상 속에서의 로아나는 초고속 승진을 통해 넬란의 모란까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거기,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짧은 잡담이었는데 그새 네오에게 걸려 버렸다. 네오의 지적으로 인해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었고, 로아나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붉어졌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넬란의 업무는 하나, 도망친 괴한을 생포할 것.”
“도망친 괴한을 생포할 것.”
넬란의 마법사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지시 사항을 복창했다. 로아나는 잡생각을 버리려 애쓰며 네오의 말에 집중했다.
“둘, 2차 습격을 대비하여 황제 폐하를 보호할 것.”
“황제 폐하를 보호할 것.”
“셋, 안전에 유의할 것.”
“안전에 유의할 것.”
“이상. 다른 질문은?”
“없습니다.”
“현재 단장님이 자리를 비운 상태이니, 특이 사항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해라.”
짧은 상황 공유가 끝나고, 네오는 사고 수습으로 바쁜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순간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잠재우며 빈 단상에 올라선 이는 알폰이었다. 어느새 장난기는 사라진 진지한 얼굴이었다.
“지금부터 인원을 분배하겠습니다. 수색조는…….”
금세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몇 명의 이름이 순서대로 불렸고, 곧 로아나 카로시아, 하는 호명도 이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색 아니면 황제 호위, 둘뿐인 업무 중에서 로아나 같은 신입에게 황제를 호위하는 중요한 일이 주어질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베른의 황제, 라한 베르니아는 거침없고, 또 잔인한 사람이었다.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칼부터 꺼내 들고 피의 숙청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선 황제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릴 기세로 황궁을 뒤집어엎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그 폭풍 속에서 넬란도 화를 피해 가진 못했다.
정치 싸움에 연루된 마법사 몇 명이 죽기도 했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몹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덕분에 마탑을 전전하던 로아나가 평민임에도 넬란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모두 자리로.”
넬란의 마법사들이 모두 주어진 자리로 흩어지고, 로아나도 할당된 수색 지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넬란의 마법사 숫자는 많지 않다. 겨우 마흔 명 남짓 될까. 그 때문에 로아나는 함께 배정된 기사 둘과 함께 서궁 수색을 맡게 되었다.
서궁이라니. 배정된 곳마저도 너무나 신입인 로아나를 배려하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서궁은 평상시에는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근처에 가기만 해도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왜 출입이 금지되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엄청난 죄인이 살던 곳이었음은 분명해 보였다.
“저, 기사님. 서궁은 언제부터 출입이 금지된 건지 아세요?”
괜히 무섭기도 하고 분위기가 어색하기도 해서 로아나가 기사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단순히 수색 전에 분위기를 푸는 잡담이나 하려는 마음이었다.
“한 일 년 되었을 겁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직후 폐쇄되었으니까요.”
“폐하께서 서궁과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로아나의 말에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긴장하는 기색을 보인 것이다. 로아나는 대체 왜 저러나 싶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궁금증을 해결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모르시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
누가 보아도 무언가 있는 듯한 애매모호한 대답은 로아나의 호기심만 더욱 자극했다.
뭔데, 대체 뭔데. 그렇게 쳐다볼 거면 제발 뭔지 알려 주기라도 해 줘.
하지만 로아나와 친하지도 않은 무뚝뚝한 기사들이 친절하게 설명해 줄 리가 없었다.
“수색 먼저 합시다. 내부 진입 전에 주변부터 확인하시죠.”
물론 일이 가장 중요하고 기사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지만, 로아나는 기사의 저 말이 화제를 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버려진 서궁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로아나의 궁금증보다 주어진 일이 우선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황궁에서 계속 지내다 보면 언젠간 알게 되겠지 뭐.
서궁은 관리되지 않은 나무와 덩굴에서 나는 음습한 냄새와 함께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만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담장의 문을 밀자 낡은 문이 끼이이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로아나는 서궁에 들어가기 전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전 후원을 살피겠습니다.”
“낯선 자를 발견하면 신호 먼저 하는 것 잊지 마세요.”
세 사람은 담장과 마당, 후원으로 각각 갈라졌고, 로아나는 본인에게 할당된 후원 쪽으로 향했다.
괴한을 잡아 공을 치하받고 싶은 마음 반, 그냥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어느 쪽의 마음이 더 큰지는 로아나 본인마저도 헷갈렸다.
서궁은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욱 황폐해졌다. 궁을 감싸고 있는 담벼락 틈 사이로는 잡초가 무성해진 지 오래였고, 가지치기 없이 자라난 나무들은 관리되지 않은 거친 녹음이 무성했다.
로아나는 후원에 가까워질수록 공격 마법 사용 방법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공격용 마법도 좀 연습해 둘걸.
로아나의 주특기는 물의 마법으로, 공격보단 실용 마법에 가까웠다. 빨래를 손쉽게 하거나, 마실 물을 편하게 길어 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넬란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풀 냄새…….”
서궁의 후원에서는 짙은 풀 냄새가 나고 있었다. 주인 없이 마구잡이로 자란 이름 없는 꽃들이 불규칙적으로 흩날리고 있었고, 무릎까지 자란 잡초는 로아나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여기, 진짜 누구 하나 숨기 좋게 생겼네…….”
대충 보아도 숨을 곳이 많은 후원은 당장 누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고, 로아나의 불길한 상상을 자극했다. 조심스레 내딛는 로아나의 발걸음에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었다.
“휴우…….”
다행히도 잔뜩 겁먹었던 것이 무색하게 후원의 풀숲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등을 돌려 입구로 돌아가려던 로아나의 눈에 구석의 별채 하나가 보였다.
여기에 별채가 있단 말은 못 들었는데. 못 본 척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순간 들끓었지만, 본 이상 확인은 해야만 했다.
낮게 한숨을 내뱉은 로아나가 잡초를 헤집으며 걸음을 옮겼고, 낡아서 삐걱거리는 별채의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끼이이익.
요란스럽게 별채의 문이 열리고, 내부로 진입하기도 전부터 로아나를 반긴 것은 별채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남사스러운 소리였다.
“아응! 읏!”
아. 로아나는 차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소리는 누가 들어도 그거, 그거 아닌가. 지금이라도 못 본 척 돌아갈까. 의무와 충동 사이에서 로아나가 갈등했다.
“하…… 미친.”
하지만 로아나가 선택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출입이 금지된 서궁에서 관계를 가지는 남녀. 비록 괴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확인해 봐야 할 필요성은 있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걸음을 옮긴 로아나가 곧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뱉으며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흐읏! 아아!”
제일 먼저 로아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드레스였다. 이런 먼지 구덩이 속에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화려한 레이스와 보석이 잔뜩 장식된 드레스가 형편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드레스를 자세히 살펴볼 새도 없이, 서로에게 빠져 로아나의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두 사람에게로 로아나의 시선이 움직였다.
“아, 거기! 아윽! 레닌!”
짐승처럼 엎드린 채로 엉덩이를 높게 치켜들고 있는 여자의 뒤에서 백금발이 눈에 띄는 남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퍽, 퍽,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여자의 신음이 터져 나왔고, 함께 들려오는 찌걱이는 소리에 로아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로아나는 지금 그저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닌, 황궁의 침입자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저들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다른 수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확인을 하느냐는 말이다. 실례지만 잠시만 멈춰 주시겠어요? 이건 정말 실례다. 그럼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건? 누가 봐도 관음증 변태가 아닌가.
“아아, 흐응!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