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아카데미에서 한글로 살아남기 9권
유우리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재앙의 내면
#사가
#전생에 휘둘리지 않는 법
#서울
#다시, 아카데미
#교수가 되다
#만신전
#심연에서
1
#재앙의 내면
테른의 미간이 깊은 골을 만들며 구겨졌다.
‘걱정할 게 없긴 개뿔이…….’
우려했던 대로 드래곤들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사나운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건, 드래곤들은 학생들이 넬리리아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자신들의 처지도 어쩌면 방금 피떡이 된 해방자들과 다르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그때, 머릿속으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니까요.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하나 같이 자존심이 지랄 맞게 쎈 편이라 여러분을 해칠 위험은 없답니다.
넬리리아 교수가 말하길, 드래곤 사이에는 나름의 불문율이 존재한다고 했다.
상대가 먼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에는 절대로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냐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나선다는 건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거든요.
특유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드래곤들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더라도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상황 자체가 드래곤에겐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심장이 터져도 드래곤은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게 드래곤의 불문율이었고.
넬리리아가 괜찮다고 주장하는 이유였다.
실제로도 넬리리아 교수가 쥐어터지는 걸 보고도 여태 가만히 있던 이유는 그녀가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그럼 드래곤들이 움직인 건…….
-제가 부탁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해츨링 넬리리아는 자존심 때문에 못 할 일이었으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교수 넬리리아에겐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드래곤’이란 설정에 얽매일 정도로 개연이 부족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요. 설정 상 드래곤들은 여러분을 해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테른은 우려를 쉽게 접을 순 없었다.
왜냐면 드래곤들의 눈빛이 보통 흉흉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곳에 넬리리아만 없으면, 당장이라도 테른 일행을 피떡으로 만들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할 이들이다.
넬리리아의 말처럼 ‘자존심이 지랄 맞게 강한 족속’이 바로 드래곤이 아니던가.
자신과 같은 드래곤이 인간 따위에게 얻어터졌다는 것 또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행위다.
넬리리아가 나서지 않아 가만히 있을 뿐, 기회만 있다면 테른 일행의 미래는 처참해질 터였다.
-그나저나 저 혼자 온 게 아닙니다.
테른은 넬리리아 교수와 그녀의 뒤편에서 살기를 보내오는 드래곤들을 둘러보았다.
“그렇죠. 확실히 혼자 오신 건 아니네요.”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미엄 패드로…… 그 양반은 넬리리아 교수님이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도 우릴 이곳으로 보냈다는 거잖아?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 마디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이리 당황스럽진 않을 텐데.
어떻게 호랑이굴… 아니, 드래곤의 레어로 보내면서 일언반구의 말도 없었을까.
아카데미의 교수도 사지(死地)로 보낼 땐 작은 정보라도 쥐어주는 법인데.
에라이, 교수만도 못한…….
‘근데 아까부터 저 드래곤들은 뭐라는 거야?’
테른은 콧김으로 불꽃을 내뿜는 드래곤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냥 죽이는 게 낫지 않나? 감히 우리 드래곤을 업신여긴 종자들이잖아.
-되겠냐? 넬리리아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까?
-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놔 둬? 이런 것들은 아예 싹을 짓밟아줘야 한다고.
-그만 둬. 넬리리아가 자존심을 굽히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테른은 이어지는 이야기에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드래곤들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사랑이다! 넬리리아는 저 인간 놈을 사랑하게 된 거라고!
-뭐, 뭣이?!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을 공격한 놈을 살려두고 자존심을 꺾어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있을까?
-!
자존심 빼면 시체인 드래곤이 자신을 공격한 대상을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
그걸 둘째로 치더라도 도움을 요청해 그들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이는 죽으면 죽었지, 부탁 따위는 하질 않는 드래곤의 설정 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더 죽여야지? 저런 쭉정이 같은 놈에게 우리 귀여운 넬리리아를 내줄 수는 없어!
불같이 화를 내는 드래곤들을 보던 테른의 등줄기는 땀으로 범벅이 됐다.
마치 딸아이가 남자친구를 데려온 것처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드래곤들!
그 대화의 결말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에 빠졌다는 추론도 황당하지만 그 결론이 죽여서 없애자는 거라니.
드래곤이 지혜롭다는 설정은 이들에겐 없는 모양이다.
-시끄러워요. 당신들 때문에 도통 이야기를 할 수가 없잖아요!
결국 참다못한 넬리리아가 드래곤들을 향해 성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역효과였다.
-허억!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하군! 그 넬리리아가 우리한테 존대를 하다니?
-사랑에 빠진 드래곤은 머리가 이상해진다더니만!
-정신 차려라! 넬리리아야! 너는 그리 예의 바른 아이가 아니었어!
-싸가지 없는 게 네 매력이라고!
레드 드래곤인데도 그 얼굴이 붉어졌다는 게 보일 정도로 넬리리아 교수의 얼굴엔 홍조가 깊게 물들었다. 그녀는 잠시 학생들을 돌아보고 다시 드래곤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다들 이만 돌아가요. 이젠 괜찮으니까.
-그럴 순 없다. 넬리리아. 너를 여기에 두고…….
-레드 드래곤 아웃.
-?!
그 말과 동시에 넬리리아 교수의 몸을 뒤덮은 색깔이 하얀색으로 바뀌었다.
저마다 말을 꺼내던 드래곤들의 입으로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고요해진 순간이었다.
-자, 지금부터 속성 경매 들어갑니다. 제 말을 잘 듣는 쪽으로 갈 겁니다.
넬리리아의 원작 속 드래곤들은 날 적부터 그 ‘속성’이 정해진 게 아니라는 특징이 있다.
해츨링일 적에 레드 드래곤이든, 블랙 드래곤이든, 혹은 실버 드래곤이든…… 자신의 속성을 골라 해당 속성의 드래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드래곤들이 유난히 넬리리아에게 친절한 이유였다.
워낙 해츨링이 귀하다는 설정도 있는 세계관인지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넬리리아가 자신들의 속성 드래곤이 되길 바라는 것이다.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테른이 물었다.
“그게 대체 뭔 설정입니까?”
-몰라요. 작가한테 물어보세요.
물론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넬리리아와 그녀의 세계를 창작한 작가는 진즉에 재앙에 휩쓸려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다들 돌아가요. 더 화나게 하지 말고.
-하지만.
-두 번은 말 안 해요.
-…….
드래곤들은 부리나케 날개를 펄럭이며 떠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풀이 죽은 채로 날아가는 레드 드래곤의 어깨는 처량했다.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던 토드 애나그램이 물었다.
“근데 저분들의 도움을 받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확실히 드래곤이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굉장한 도움이 된다.
해방자나 침묵의 재앙이라는 강대한 적을 앞둔 상황에서는 더더욱 필요한 힘이 아닌가.
넬리리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입니다. 통제가 안 되거든요. 드래곤은 워낙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해서 어떤 사고를 쳐도 이상하지 않아요.
“…….”
-괜히 데려갔다간 더 귀찮아집니다.
넬리리아 교수는 콧김으로 불꽃을 뿜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대신 데려온 사람이 있으니까요.
“맞다, 그랬죠.”
넬리리아 교수는 학생들을 돌아보더니 냅다 여백을 열어젖혔다.
-여러분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테른은 그 말에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교수 급’은 아닐지라도 그에 준하는 강력한 조력자일지도 몰랐다.
‘누굴 데려왔을까?’
가만히 여백을 들여다보던 테른은 그곳에서 빠르게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으아아악! 미친 교수야! 내가 순순히 잡혀갈 것 같으냐!”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폭탄을 들고 난동을 부리는 한 학생.
“루시아?”
그 뒤편으로는 살벌하게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졌다.
테른은 순식간에 목전에 드리운 검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멈춰선 검의 주인은 사납게 그를 올려다본다.
“에, 에리온.”
이외에도 테른은 여백에서 각 학부의 학생들이 떼거지로 튀어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 * *
경기도 수원. 폭삭 주저앉은 역사를 내려다보던 지그문트는 들려오는 보고에 짜증 섞인 얼굴을 했다.
“뭐라고? 전부 죽었다고? 그게 사실이더냐?”
“네, 들려온 보고로는 드래곤들이 움직였답니다.”
지그문트는 밀려오는 두통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부하들이 향한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얼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데.
“넬리리아를 죽여선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