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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한글로 살아남기 7권
유우리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세상 유능하지만 무능한 녀석
#중층
#저주받은 황녀
#위기의 벨비지 마을
#전조 현상
#혐오의 재앙
1
#세상 유능하지만 무능한 녀석
“길이 막히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놀라 묻는 테른을 향해 길버트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내가 알던 탈출로가 죄다 사라지고 있어.”
10년 차 유급생답게 길버트는 아카데미를 빠져나갈 수 있는 여러 탈출로를 알고 있었다.
이미 개연이 쌓인 자신은 쓰지 못하더라도 그렇지 않은 테른이라면 꽤 쓸 만한 곳들을.
그런데 그 탈출로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막히고 있다는 것이다.
“설마 놈들이 저희 계획을 눈치챈 걸까요?”
“글쎄, 확답하기는 어려운 문제야.”
“네?”
“일단 유력한 용의자가 있긴 하거든?”
“용의자요?”
길버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건은 행정관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커.”
“행정관들이요? 졸업한 선배들?”
테른은 학술제를 관리하기 위해서 1챕터를 방문한 데안 미미르 같은 선배들을 떠올렸다.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아카데미가 워낙 빠르게 깨끗해졌잖아. 아무래도 그게 화근이 된 모양이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길버트는 마저 대답했다.
“할 일이 없어진 행정관 놈들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해 버렸단 거지.”
학술제를 대비하여 제국의 행정관들, 그러니까 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은 1챕터를 정돈하고자 아카데미로 파견을 나온다.
원래 그들은 이 시기엔 엄청 바빠야 했다.
이 시기에는 결코 풀이할 수 없는 <행운의 편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만의 죄>가 아주 지독하게도 더러웠으니까.
적어도 행정관들은 학술제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저주의 힘을 억눌러야 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까지 더러운 오물을 밟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저주가 없으니 어쩌겠어? 그들 입장에선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셈이지.”
문제는 행정관들에게 있어 할 일이 없어졌다는 게, 무조건 좋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카데미로 파견을 나온 이상 그들은 여기서 무언가를 하긴 해야 했으니까.
상부에 제출할 보고서에 ‘저주가 이미 사라져서 어쩔 수 없이 놀고먹다 돌아왔습니다!’라고 적어 낼 수는 없질 않은가.
“그렇다고 무작정 복귀를 할 수도 없을 거야.”
‘할 일이 없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보고하면 ‘할 일이 없으니 너희들도 죄다 사표 쓰고 나가면 되겠군!’ 하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면 파견 건으로 인하여 이미 관련 부처로 예산이 산정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돌아간다면 해당 예산의 사용처가 불분명해진다. 자칫 반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예산을 반환하는 선례를 남긴다면, 안 그래도 부족한 예산이 다음에는 더 줄어들 가능성이 생기거든.”
행정관들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할 일을 만들어서라도 아카데미에 붙어 있어야 했다.
억지를 써서라도 한 줄의 보고서를 늘려 써야만 하는 것이다!
“마침 곳곳에서 터진 테러가 명분이 됐겠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내부의 시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탈출로들을 막고 있을지도 몰라.”
결국 쓸데없이 성실해진 행정관들로 인해 벌어진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었다.
길버트는 혀를 차며 말했다.
“차라리 물난리라도 계속되었더라면 행정관 녀석들도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지 않았을 텐데…….”
테른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다. 어차피 물난리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을 거야. 제아무리 강한 정령이라고 해도 마력이 무한정 솟구치는 건 아니잖아.”
폭발적이던 블루버드의 힘에도 한계는 있었고, 오만의 죄만큼 지독하지도 않으리라.
졸업생 출신인 행정관들에게 있어서 물난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결할 일감이었을 터.
아마도 블루버드는 제풀에 지쳐서 쓰러졌을 거라는 게 길버트의 의견이었다.
‘흠, 글쎄… 블루버드라면.’
테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블루버드는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픈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미르위를 공격하고자 터뜨렸던 ‘만신전의 조각’……. 그걸 만약 다른 곳에서 터뜨렸다면?
“어쨌든 저희 계획이 들통난 건 아니라는 거군요.”
“말했잖아. 확답할 수는 없다고.”
“…?”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어. 행여나 누군가가 행정관들을 뒤에서 꼬드긴 거라면?”
길버트는 테른을 향해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 확답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어떤 이유로든 탈출로가 막히고 있다는 것. 더 늦으면 나갈 수 없을지도 몰라.”
“그 말은…….”
길버트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래. 우리는 내일 아카데미를 빠져나간다.”
* * *
작전을 앞둔 지금, 테른이 딱히 챙기고 준비해야 할 물건은 없었다.
변경의 마을, 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지만 고작 이틀의 여정이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엔 선물로 가져다줄 것도 없지.’
굳이 챙긴다면 마법 주문이 적힌 부적들 정도?
늘 위험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변경의 생활에선 마법 부적만큼 유용한 선물은 또 없었다.
‘뭐…… 선물을 줄 상황도 아닌가?’
이번 작전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테른의 행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칫 계획이 들통나면 어떤 식으로든 적의 방해가 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미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문에 일정을 재촉해 급박하게 출발해야 하는 만큼, 만에 하나의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하, 이곳만큼은 정말 가기 싫었는데.”
그렇게 작전 당일. 야심한 밤을 틈타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온 테른은 길게 한숨을 내뱉는 길버트를 마주했다.
“여기 진짜 피곤하거든? 행정관 녀석들도 그래서 이곳에 손을 안 댄 거긴 한데…….”
“그렇게 어려운 던전입니까?”
“어렵진 않아. 까다로워서 그렇지.”
길버트가 안내하는 아카데미의 탈출로는 1챕터 내의 한 던전 안에 있었다.
문제는 그 던전이 여태 테른이 겪은 그 어떤 던전보다도 난해하다는 것.
“옴니버스 구조를 가진 던전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던전의 핵이 여러 개 쪼개져 있다는 거지. 그게 무슨 뜻인 것 같아?”
옴니버스 구조를 가진 던전은 말했듯 ‘던전의 핵’, 그러니까 ‘주제’가 여러 개로 나뉜다.
각기 다른 이야기로 구성되었기에 또한 그에 따른 테마도 제각기 다른 던전.
“느닷없이 설산에 내던져지거나 뜨거운 사막 위에서 눈을 뜰 수도 있어.”
혹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협곡이나 수풀이 우거진 정글 속에 방치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옴니버스 구조를 가진 던전은 힘들기로 유명한 거다.”
겨울을 이겨 낼 옷차림과 사막을 견딜 옷차림을 동시에 준비해야 했다. 언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만반의 채비를 갖추는 게 중요했다.
“그중 우리가 찾을 곳은 ‘어둠의 미로’라는 주제로 이루어졌어. 아마 운이 좋으면 들어가자마자 찾을 거고, 운이 나쁘면 꽤 고생할 거다.”
옴니버스 구조의 던전이 더욱 까다로운 건, 이야기의 순서가 정해져 있질 않다는 점이다.
원하는 주제의 이야기로 향하려면 몇 개의 이야기를 공략해야 할지 아무도 몰랐다.
운이 좋으면 첫 번째, 혹은 두 번째에서 만날 것이며 나쁘다면 가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목적지에 다다른다.
“중요한 건 침착해야 한다는 거야. 차분하게 공략해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 해. 그러다 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거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미로에서 다시 보자.”
앞서 들어가는 길버트를 보며 테른도 따라서 걸음을 내디뎠다.
옴니버스 던전이 까다로운 두 번째 이유는 함께 이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들어가는 즉시, 랜덤으로 각자의 공간으로 전이된다.
‘괜찮아. 던전의 난이도는 나도 풀 수 있을 정도야.’
1챕터에 있는 던전답게 신입생이라도 머리를 잘 굴리면 누구나 공략할 수 있다.
하물며 독해력만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게 테른이었다.
최근 율 테일러에게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니 더더욱 자신이 넘쳤다.
‘길버트 선배의 말대로 침착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진입한 <아카데미 단편집>이란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던전은 한껏 마음의 준비를 한 테른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생각을 이을 겨를이 없었다.
‘여기는… 꼬르륵!’
첫 번째로 마주한 이야기는 무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해저였다.
숨이 다 떨어지기 전에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익사하는 극한의 서바이벌 테마!
‘이거 생각보다 더 어렵겠는데?’
* * *
이후로도 테른은 왜 길버트가 그토록 이 던전으로 오길 싫어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여기 너무 극단적이로군.’
<아카데미 단편집>은 말 그대로 단편을 엮어 모아 둔 던전이다.
문제는 단편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굉장히 축약되어 있다는 거다.
한마디로 이야기 속 엑기스만을 취하기에, 급전개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다른 도서 같으면 해저로 들어가기 전에 몸이라도 풀 시간을 줄 텐데. 여기는 아예 그런 것조차 없으니 원.’
냅다 물속에 내던지고 짧은 시간 내에 공략하라고 재촉해 온다.
물론 단편이고, 이야기의 깊이가 얕은 만큼 공략 난이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극단적인 전개는 지독한 피로를 불러왔다.
막말로 냅다 수면에 처박히고, 젖은 몸으로 설산에서 덜덜 떨다가, 깎아지를 듯 높은 절벽을 오르라고 하면 지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진짜 죽겠군. 대체 미로는 언제 나오는 거야?”
한숨을 가득 내뱉고 긴장하고 있던 테른은 드디어 다음 주제에서 원하던 풍경을 맞이했다.
불과 1m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풍경과 꽉 막힌 석실과도 같은 분위기의 장소.
누가 보더라도 여기는 ‘어둠의 미로’였다.
그 말은 즉, 지독한 옴니버스 던전과도 이제는 안녕이란 뜻이었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해 보면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겠지만…….’
적어도 이 던전에서의 고생은 끝난다는 사실이 테른을 기쁘게 했다. 마치 군에 입대한 병사가 훈련소의 수료를 앞둔 심정이라고 할까?
“선배는 잘 도착했으려나.”
테른은 불빛을 불러오며 어두운 미로를 밝게 비추었다.